갑질의 신 131화
44. 선출(2)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고준서가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찾았다.
그러나 빈 곽을 움켜쥔 고준서의 입에서는 담배 연기 대신에 깊은 한숨만이 내쉬어졌다.
“담배가 없으니 머리가 안 돌아가네.”
그의 말에 곁에서 노트북 키보드를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던 황희진 작가가 쓴소리를 들려줬다.
“담배는 끊으시는 게 좋아요. 건강을 위해서라도요.”
“……지금은 오히려 담배를 못 피우는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더 악화될 거 같은데.”
눈물 비의 드라마 제작도 이제 슬슬 박차를 가해야 했기 때문에 제작진 일동은 밤을 지새워 가며 방송국에서 계속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고준서도 예외는 없었다.
그가 이번 눈물 비 드라마를 총괄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환경이 구축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고준서가 담당을 할 생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준비 과정에 돌입하니 탈주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뿌리잡고 있었다.
애써 멘탈을 부여잡은 고준서가 캐스팅 부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언급했다.
“반드 미디어 측에서는…… 아직 주연 캐릭터 맡을 배우가 누구로 결정되었는지 소식 없어?”
“여배우는 한지혜 양으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어요.”
“NPC의 그 한지혜인가…… 비주얼상으로는 확실히 어울릴 거 같긴 한데, 연기 경력이 없잖아. 잘할 수 있으려나.”
내심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요즘 들어 핫한 아이돌 가수라는 건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요계, 그리고 예능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뿐. 연기라는 분야는 포함되지 않았다.
“잠깐 조사를 해봤는데…… 과거에 뮤지컬 경험이 있긴 하네요.”
“오, 그래?”
“물론 상당히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요.”
“그래도 해봤다는 것과 안 해봤다는 것의 차이는 상당하니까. 그나마 있는 게 다행이군.”
큰 위안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최악의 결과는 면했다는 인식 정도 수준이었다.
“반드 미디어는 무슨 생각으로 한지혜를 선정한 걸까요?”
희진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충분히 궁금할 사항이었다.
일부러 주연 배역을 결정할 권한을 가져가더니, 막상 뚜껑을 까 봤는데 그렇게까지 임팩트 있는 사람이 캐스팅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초보에 가까운 사람을 올려놨으니…… 이들의 입장에선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게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특약 사항이기도 했으니…… 그걸로 태클을 걸 수는 없는 노릇.
“우리가 최대한 끌고 가는 수밖에 없겠구만.”
고준서가 펜을 굴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남자 배우는?”
“그건 아직 정하는 중이라고 하던데요?”
“흐음, 그래? 개인적으로 빨리 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이번 주 안에 결정해서 연락 준대요.”
“그러면 괜찮군.”
주연 배우들이 빨리 확정이 되어야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눈물 비라……. 기대되는걸?”
만드는 입장에서 봐도 이번 눈물 비 드라마는 분명 대박을 칠 게 분명했다.
* * *
여자 배우는 애초에 한지혜로 이미 확정을 지었기 때문에 사실상 큰 문제는 없었다.
그녀가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자 주연 배우 선출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다.
“우석 오빠,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온 화염룡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우석을 비롯해 오태준과 이임전은 그녀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 줄 수 없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남자 배우를 누구로 고를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왔냐.”
우석이 약간의 한숨과 함께 화염룡을 반겼다.
“다들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이것 때문이지.”
책상 위에 펼쳐진 다수의 사진들.
한 가지 공통점을 꼽자고 한다면…….
다들 남자라는 점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평범한 외모를 지닌 일반인들이 아니었다.
배우에서부터 탤런트, 가수, 심지어 개그맨도 있었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화염룡이 대충 어떠한 상황인지 눈치챘다.
“아직도 못 정한 거야?”
“서로 의견이 많이 갈리기도 하고……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는 거 같다.”
“흐음, 그래?”
화염룡이 이곳에 불려온 이유는 이미 릴리아나에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지혜와 함께 눈물 비의 남자 주인공 역할인 조민석을 연기할 배우를 찾아야 했다.
이미 상당 기간이 소요된 시점이었다. 더 이상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면서 배우 컨택을 늦췄다간 드라마 방영 시기 자체를 뒤로 미뤄야 하게 될지도 몰랐다.
4분기에 드라마가 상영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 사람은 다름이 아닌 이우석, 본인이었다.
그런데 반드 미디어 측에서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게 되면, 고준서 PD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후의 보루로 결국 화염룡을 소환하게 된 것이다.
“남자들이 남자를 고르는 것보다, 기왕이면 여자 사원들을 불러서 의견을 모아 보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화염룡이 이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확실히 그녀의 의견이 맞았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수요가 많았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남자들의 시선보다 여성들의 시선에 맞추는 편이 더 이득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말에 우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떤 거 같냐.”
“내가 정해도 돼?”
“그러려고 일부러 널 부른 거다.”
“음…… 그렇다면야 크게 상관은 없지만.”
화염룡의 보는 안목이라면 믿을 만했다.
사진들을 쭉 훑어보기 시작하는 화염룡.
그녀의 눈이 수십 개의 사진들을 응시했다.
그러나.
도중에 그녀가 짧게 혀를 찼다.
“내가 모르는 연예인들도 꽤 되네.”
“기본적으로 여기 있는 남자 연예인들은 눈물 비 촬영 스케줄에 합류해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위주로 선정한 거다. 일단 최대한 되는 대로 뽑아봤지.”
“자료가 없는 연예인은 내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 정보 열람 같은 게 없는 이상은 힘들 거 같아.”
“그렇다면…… 아이티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군.”
아이티라는 이름이 나오자, 일순간 화염룡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우석이 릴리아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이티의 집으로 간다. 준비하도록.”
“예, 우석 님.”
“자, 잠깐만! 왜 하필이면 거기에 가는 건데?”
“자료가 필요하다고 말한 건 너잖냐.”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는 화염룡이었다.
아이티의 그 토악질 나오는 거주 환경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아이티의 정보력 말고는 사실상 단기간 내에 빠르게 이들의 정보를 하나부터 열까지 모을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결국 답은 아이티에게 직접 찾아가 정보를 얻는 일뿐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우석이 배짱을 부려 봤다.
“뭔가 좋은 수단이 있다면, 들어 보도록 하지.”
“…….”
“없다면 내 말에 따르도록.”
“……알았어. 내가 졌다, 졌어. 가면 되잖아!”
그녀의 입장에선 절로 신경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 * *
침대 위에 누워 대형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던 아이티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번 편수는……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시덕거리는 아이티였지만.
이내 갑자기 그의 집 거실 한가운데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생성된 빛의 분자들.
점점 숫자가 많아지더니,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이티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릴리아나의 순간 이동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머지않아 아이티의 예상이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팟! 소리와 함께 3명의 사람이 아이티의 집 안에 등장했다.
한 명은 순간 이동 시전자이기도 한 릴리아나.
또 다른 한 명은 세계의 주인, 이우석.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꺄아악! 바, 바퀴벌레잖아?”
오자마자 연신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하는 화염룡이었다.
제아무리 아이티라 하더라도 집에 별로 들이고 싶지 않은 인물은 있었다.
그중 한 명인 화염룡이 오게 되었으니, 아이티 역시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거, 살아 있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과민 반응할 필요 없어.”
아이티가 그래도 나름 위로라고 말을 해줬지만, 화염룡에게는 조금의 위안도 되지 못했다.
“바퀴벌레 시체를 왜 아직까지 방치하고 있는 거야? 빨리 휴지로 집어서 버리라고!”
“……쳇, 귀찮은 여자구만.”
투덜거리면서 마지못해 휴지 몇 장을 뽑아 화염룡의 말대로 벌레 시체를 휴지통 안에 툭 던져 넣었다.
화염룡의 요란한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우석이 아이티에게 곧장 방문 목적을 알려 줬다.
“자료가 필요하다. 저번에 네가 보내 준 남자 연예인 후보 명단, 기억하나?”
“예, 기억합니다.”
“보내준 자료보다 더 많은 상세자료가 필요할 거 같다. 조사 좀 해줬으면 좋겠다만.”
“…….”
아이티의 시선이 뒤에서 노기를 잔뜩 품은 화염룡에게로 향했다.
우석의 상세자료 요구.
그리고 화염룡과 동반한 방문.
‘대충 어떤 이유에선지 알겠군.’
아이티도 머리가 나쁜 남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김민혁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 한 정도는 아닌 만큼 비상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면 해킹까지 불사하는 아이티인데, 머리가 좋지 않으면 이러한 일들도 불가능했다.
그가 추측한 건 다음과 같았다.
우석이 화염룡에게 남자 주연 배우로 적합할 만한 사람을 고르게 했고, 화염룡은 정보 부족을 어필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3명이 아이티의 소중한 애니메이션 감상 시간을 무시하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이들을 빨리 보내야 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빠른 자료 검색뿐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몇 분 정도 소요될 거 같나?”
“10분…… 아니, 5분이면 됩니다.”
“5분이라. 나쁘지 않군.”
우석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우석과 반대되는 의견을 어필하는 여인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지옥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여자, 화염룡이었다.
“1분 내로 끝내! 5분이나 이 더러운 방에 있을 수 없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날라리 여자.”
아이티의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태 아이티가 정보 수집을 할 때의 모습을 자주 보곤 했던 우석이었지만, 지금처럼 빠른 손동작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어지간히 화염룡을 싫어하는 모양인가 보구만.’
우석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추측…… 아니, 확신했다.
릴리아나와 화염룡의 관계도 그렇고. 아이티와 화염룡의 관계도 그렇고.
비서들은 제각각 너무 개성이 넘치는 나머지, 직장 동료라 할 수 있는 같은 비서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순둥이라 할 수 있는 남서진이 유일하게 여러 비서들과 트러블이 없는 축에 속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은 간다.
그 말을 몸소 실천하듯 보여주고 있는 남서진만의 처세술에 우석은 그를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아이티가 약속한 5분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아이티가 자신의 능력을 극한대까지 끌어 올리며 최대한 빠른 정보 수집 능력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화염룡의 안목을 기대하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