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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130화 (130/201)

갑질의 신 130화

44. 선출(1)

최근 우석의 절친인 철수에게 생긴 변화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차를 구입했다.’라는 점일 것이다.

그간 장롱면허 상태였던 철수가 차를 뽑은 지 채 2주가 안 되는 상황에서 대뜸 우석이 이렇게 말을 했다.

“철수야, 외근 가자.”

“……릴리아나 씨랑 같이 안 가고?”

“릴리아나도 같이 갈 거다.”

즉, 3명이서 같이 외근을 나가자는 소리였다.

평소 외근을 나갈 때는 철수를 제외한 둘이서만 가곤 했었는데, 대뜸 철수까지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 뭔가 수상쩍었다.

‘뭔가 있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보는 철수였지만, 그래도 마침 마땅히 할 것도 없었기에 우석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친구라 하더라도 회사 내에서는 우석이 대표이기도 했다.

대표인 우석에게 ‘난 가기 싫다.’라고 튕겨내 버린다면, 회사 내의 위계질서가 완전히 엉망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철수도 공적인 관계에선 가급적이면 우석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외근을 같이 나가는 것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승낙을 하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잠시 바람 좀 쐰다는 기분으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중간에 우석의 추가적인 발언이 철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동 수단은 네 차다.”

“……뭐?”

“왜. 운전 연습도 할 겸, 차 몰고 갈 기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냐?”

“잠깐…… 이제 딱 세 번 몰아 본 실력으로 어디까지 가려고.”

“덕립인쇄소.”

“더럽게 멀잖아? ……그보다 덕립인쇄소라고?”

“그래.”

“거긴 왜?”

반드 미디어와 덕립인쇄소는 사실 접점이 없었다.

물론 예전에 민아 출판사 쪽으로 종이책 출간 작업 외주를 넣을 때에는 그나마 미세한 인연이 이어지긴 했지만, 지금은 딱히 민아 출판사와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덕립인쇄소라는 단어를 들어 볼 일이 최근까지는 거의 없었다.

또한 반드 미디어는 종이책 출간을 다른 곳이랑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덕립인쇄소를 찾아갈 이유는 없을 터.

“뭐하러 가는 건데?”

“우리 회사가 민아 출판사를 인수하기로 했잖냐. 그럼 그쪽과의 관계도 정리를 해야지.”

“아하…… 과연.”

이제야 우석이 왜 덕립인쇄소를 찾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된 철수였다.

물론 철수의 차를 타고 거기까지 간다는 건 아직까지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 * *

이러한 이유로 고지식과의 재회를 가지게 된 우석과 철수였다.

중간에 철수의 미숙한 운전 때문에 길을 뱅뱅 돌다가 예상 소요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오늘 일정의 메인 디시는 바로 고지식과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잘 지내셨죠? 사장님.”

‘잘 지냈을 리가……!’

민아 출판사가 사업을 철수한다는 소식에 조마조마했던 나날을 이어 가고 있던 고지식이었다.

우석의 말대로 잘 지냈었다고 묻는다면 절로 입에서 욕을 쏟아내고 싶은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 판 명함을 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그간 만나지도 못했으니, 늦게나마 명함을 드리게 된 점에 대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명함 하나를 건네주는 우석이었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명함을 내려다보던 고지식의 손이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반드 미디어 대표, 이우석.

‘이 녀석이…… 그 대표 놈이라고?’

우석이 새로 회사를 차렸단 소문은 얼핏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회사가 하필이면 민아 출판사를 인수한 회사일 줄이야.

우석이 반드 미디어 대표라면, 그를 쉽사리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다. 이제 그는 간접적인 갑이 아닌, 완벽한 갑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민아 출판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잘 들으셔서 알겠지요?”

“이, 일단은요…….”

“저희는 민아 출판사랑은 다르게 작업을 하고 있어서요. 제작 단가부터 좀 측정을 달리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아, 물론 기존에 나오고 있는 민아 출판사 쪽 소설들은 그대로 진행을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향후 협업 관계는…… 사장님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

“아니면 저희 쪽이랑은 계약을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제 회사는 다른 곳이랑 작업을 하고 있어서요. 어떠신가요?”

“하, 하하! 이 대표님!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저희가 언제 이런 냉정한 사이였습니까? 그래도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가족 같은 사이였…….”

“월급도 제대로 안 주고 노예처럼 부려 먹던 가족 같은 사이였지요.”

“그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제가 무릎이라도 꿇고서 사죄를…….”

“아니요. 딱히 그런 것까지 바라진 않습니다. 그냥 앞으로 제 신경을 건드리지만 않으시면 될 거 같군요. 물론 여기 일하고 있는 노동자분들에게 월급 제대로 줘야 한다는 건 기본 전제로 깔고 가시고요.”

“무, 물론이지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내일이나 모레 즈음에 저희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김민혁 팀장이 이쪽으로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 들으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 살펴 가십시요!”

고지식이 머리를 조아리며 우석에게 배웅 인사를 건넸다. 옆에 있던 철수 역시 추가적으로 한마디를 들려줬다.

“앞으로 잘해보자구요,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대화 몇 마디 나눈 게 고작이었지만, 우석이 직접 고지식에게 찾아와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우석이 뜻한 바는 이미 고지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꼼수 쓰지 마라.

결국 이 뜻이었다.

사실 더 심한 갑질을 부릴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우석의 기준에서 보자면 진상에 불과한 짓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딱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만 표현하고 다시 돌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우석 일행이 공장을 떠나자, 고지식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하필이면 저 녀석이……!”

억울할 만도 했지만, 그렇다고 어찌하랴.

고지식은 은연중에 자신이 우석에게 평생 갑질을 당하면서 살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 * *

“으갸갸갸갹!”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기지개를 펴 보이는 화염룡.

그녀의 모습에 은지가 어색한 눈빛을 선보였다.

“일어나셨나요? 화염룡 씨.”

“어머, 이제는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알게 됐네?”

“아무래도…… 몇 달 동안 봐 오다 보면 이제 딱 봐도 어느 인격인지 구분이 금방 가더라고요.”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보네?”

“화염룡 씨도 인간이잖아요.”

“아는 아직 이 생활에 적응이 안 되더라고.”

화염룡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뻐근함과 피로함은 전부 소봉예화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창작을 담당하고 있는 소봉예화였기 때문에 장시간 원고를 집필하거나 하는 그런 작업들은 화염룡이 아닌 소봉예화의 인격으로 진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화염룡은 자신이 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피로함을 느끼곤 했다.

이게 여간 좋은 감촉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한 몸에 2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무튼 이 피곤함을 보아하니…… 한 이틀 밤새고 난 이후에 오는 후유증이네.”

“그런 것까지 자세히 아실 수 있는 건가요?”

은지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반응에 화염룡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다른 인격이라 해도 일단 이 몸도 내 것이니까.”

“만화에서 보던 거라서 신기해요.”

“제3자가 보기에는 신기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라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냉장고를 열어 보는 화염룡.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사이다는 없어?”

“네. 소봉예화 씨가 다 마셨을 걸요?”

“아 씨…… 나는 한 모금도 못 마셨는데.”

“아니…… 엄청 마셨다니까요.”

“그건 소봉예화 인격이고. 화염룡인 나는 한 모금도 못 마셨다고.”

“아, 아하하…….”

뭔가 모순된 이야기이기도 했다.

분명 그녀의 몸은 많은 사이다를 섭취했었다.

그러나 정작 화염룡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인격이 다름에서 오는 일상생활의 불편 중 하나였다.

짧게 혀를 찬 화염룡이 근처에 놓여 있는 후드티를 걸쳤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은지가 질문을 던졌다.

“나가시게요?”

“응.”

“사이다 사 오시려고요?”

“당연하지.”

원래 화염룡은 사이다에 목숨을 걸 만큼 미친 듯이 마시는 성격까진 아니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유독 특정 음식, 혹은 음료가 엄청 당기는 날이 있지 않은가.

지금이 딱 그때였다.

사이다가 당기는 그 타이밍.

그게 바로 지금의 화염룡의 상태였다.

“잠깐 편의점 좀 들르고 올게.”

“아, 오실 때 캔 커피도 좀 사 오실 수 있나요?”

“……은근슬쩍 심부름 시키기야?”

“에헤헤…… 부탁 좀 드릴게요.”

은지가 애교 섞인 웃음을 들려줬다.

처음에는 화염룡 앞에서 제대로 기도 못 펴고 주눅이 들어 있던 은지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농담도 할 정도로 많이 친해졌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쉰 화염룡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거. 아메리카노?”

“카페라떼요. 아,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아이스예요!”

“그래그래, 알았습니다요.”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건방진데, 세세한 항목까지 짚어 주니 왠지 모르게 심술도 났다.

그래도 사 주기로 했는데, 여기서 튕겨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리고 화염룡도 그렇게까지 심성이 고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한 번 사 주기로 결정을 했으면 그래도 책임은 질 줄 아는 여자이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저번 미행 사건 때 이후로 계속 내가 자꾸 남을 사 주게 되는 듯한 형태가 생기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애써 불안감을 지우며 편의점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 화염룡이었다.

* * *

소봉예화와 은지,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

그곳은 한때 우석과 만나기 전, 소봉예화가 아르바이트를 다녔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물론 창작 활동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관두긴 했지만, 그래도 편의점을 이용할 때에는 이곳을 자주 찾는 편이었다.

화염룡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남자 종업원이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받아 줄 틈도 없이 곧장 음료 코너로 간 화염룡이 사이다와 더불어 커피캔 2개를 집어 들었다.

하나는 카페라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노였다.

어린애 혀이기도 한 은지였기 때문에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왠지 모를 심술이 발동한 모양인지 화염룡의 손에는 여전히 아메리카노 캔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이 정도 복수는 해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

속으로 작게 웃음을 토해 내는 화염룡이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을 열자마자 화염룡의 하이 텐션은 금세 로우 텐션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거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릴리아나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 줬다.

“우석 님께서 널 찾으셔. 나랑 같이 가줘야겠어.”

“무슨 범죄자 연행하는 경찰도 아니고……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눈물 비 남자 배우 섭외에 관해 상의할 게 있다고 하시더라.”

“그래?”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릴리아나의 말을 들으며 차곡차곡 냉장고 안에 사 온 음료를 넣어 두는 화염룡의 뒤로, 은지가 다가왔다.

“이 커피는 릴리아나 씨 드려도 되죠?”

“자, 잠깐……!”

미처 말릴 틈새도 없이 릴리아나에게 캔 커피를 바치는 은지였다.

“여기요.”

“이건…….”

“카페라떼예요.”

“카페라떼……?”

뚜껑을 딴 뒤 음료를 마셔 본 릴리아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메리카노입니다만.”

“네? 그럴 리가요. 분명 카페라떼 2개를 부탁드…… 화염룡 씨……!”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화염룡에게 은지의 잔소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결국 릴리아나 때문에 은지를 골탕 먹일 기회도 날아가고 말았다.

‘역시 릴리아나랑 나는 영 안 어울린다니까.’

소소한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금 체감하게 된 화염룡의 속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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