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28화
43. 인수(引受)(2)
화창한 어느 평일 오후.
전철을 타고 신림역에서 내린 김민혁이 한적한 지하철역 내부를 훑어봤다.
“사람도 별로 없고, 좋구만.”
민혁의 얼굴에 만연의 미소가 번졌다.
아이티처럼 폐쇄적인 성격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한테 마구 부대끼는 것보다 이렇게 편히, 그리고 여유롭게 걸어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 한적한 오후의 시간대에 맞춰 산책을 나온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2시 20분…… 약속 시각까지 5분 정도 남았다.”
마침 딱 적당했다.
작가와의 미팅에선 늦는 모습보다 차라리 5분에서 10분 정도 미리 도착해 있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1번 출구에서 잠시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무렵, 약속 시각 1분을 남겨 두고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예. 파란색 와이셔츠 입은 사람이 저 맞습니다. 네. 그럼…….”
전화를 끊자, 한 중년의 배불뚝이 남성이 민혁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민혁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작가님.”
오늘 미팅 일정이 잡혀 있는 판무협 작가 중 한 명인 정수남이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줬다. 그러면서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훔쳐냈다.
아무래도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인 듯했다.
“날씨도 더운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민혁의 말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식으로 곧장 반응을 보이는 정수남이었다.
그와 함께 근처 카페 안으로 들어선 민혁이 커피를 주문하고 의자에 착석했다.
“그나저나 설마 작가님께서 직접 연락을 해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먼저 연락을 취한 것은 반드 미디어가 아닌 정수남이었다.
예전에는 반드 미디어가 적극적으로 작가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당연시되긴 했지만, 최근에는 정수남과 같이 오히려 작가들이 반드 미디어와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최근에 많이 표명해 오고 있었다.
우석이 염두에 두고 있던 주객전도 현상이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야 뭐…… 요즘 반드 미디어가 워낙 잘나가잖아요? 그래서 예전부터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옳은 선택을 하셨군요. 근데 제가 알기로는…… 현재 출판사 한 곳과 계약을 해 종이책을 내고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건…….”
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기 시작하던 수남이었지만, 어차피 이 바닥이 너무나도 좁아 금방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굳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알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종이책 출간도 이미 되어 있는데, 당장 검색만 해봐도 어느 출판사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숨길 이유는 전혀 없었다.
“민아 출판사입니다.”
“아하…….”
민아 출판사는 반드 미디어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초기 우석이 콘텐츠 재활용 사업을 통해 자금 기반을 마련할 시기에 가장 첫 번째로 희생을 당한 곳이기도 했으며, 그만큼 우석이 도움을 많이 준 출판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크나큰 자금난에 휘말려 작가들의 인세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물론 우석뿐만이 아니라 민혁까지 그 소문을 전부 다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건 따로 있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속으로 우석이 일부러 민아 출판사를 나 몰라라 한 이유를 추측해 보는 민혁이었다.
그러는 순간, 정수남이 추가적인 말을 들려줬다.
“실은 저뿐만이 아니라 민아 출판사와 같이 일을 하던 다른 작가분들도 서서히 그곳을 떠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저도 이번에 바로 5권에서 완결치고 다른 곳이랑 계약을 하려고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반드 미디어와 연락이 닿아 이렇게 김민혁 팀장님을 만나 뵙게 된 겁니다.”
“5권 완결이라면…… 아깝군요. 지금 출간되는 작가님 거 현대 판타지 작품, 꽤나 부수도 잘 유지되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그래도 출판사가 인세를 제대로 챙겨 주지 않는다면 말짱 꽝이지요. 저처럼 힘없는 작가들은 출판사가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며 답도 없습니다. 그냥 일찌감치 마감을 치고 다른 곳에 가는 수밖에요.”
그의 말을 통해 민아 출판사가 점점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 민혁이었다.
이 바닥은 결국 신뢰 관계를 비롯한 계약이 전제로 깔려야 했다.
그래야 작가들로부터 차기작 작품을 원활하게 받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민혁이 남궁진수에게 많은 대우를 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지금 당장의 이득을 취하는 것도 좋지만, 장기적인 안목도 필요했다.
판매량도 낮고 무시당하던 비주류 작가가 언제 시기를 잘 만나 대박을 터뜨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 생각을 한다면 가급적이면 오래, 그리고 신뢰를 유지하며 주기적으로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는 작가와 일을 하는 편이 좋았다.
그 부분에 있어서 민아 출판사는 작가들에게 안 좋은 구설수에 많이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민아 출판사에서 나오기로 결심한 작가들 중에서 정수남 작가님과 친분이 있는 작가님이 계신다면, 언제든지 알려 주세요. 저희야 대환영입니다.”
“이런……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작가들 중에서 대다수는 반드 미디어 쪽과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이군요!”
민혁의 한마디에 정수남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반드 미디어 측에서는 사실 이러한 현상을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들도 어느 정도 경력을 가지고 있는 기성 작가들 아니겠는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반드 미디어에 온다고 하는데, 오히려 두 손을 들고 환영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
* * *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민혁이 오자마자 향한 곳은 바로 우석이 있는 반드 미디어 사무실이었다.
“대표님, 김민혁입니다.”
“들어오도록.”
“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민혁이 우석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우석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며 입을 열었다.
“정수남 작가와의 미팅이었지. 잘 갔다 왔나?”
“예. 그보다도 한 가지 좋은 정보를 알아내고 왔습니다만.”
“뭐지?”
“민아 출판사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민아 출판사라.”
우석의 입장에선 실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래도 우석과 한배를 탔던 적이 있는 출판사였지만, 지금은 거의 갈라섰다 해도 과언이 아닌 관계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말해보도록.”
“오늘 정수남 작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들은 겁니다만…… 민아 출판사가 사업을 접을 분위기라고 합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우석도 가끔 아이티를 통해 민아 출판사의 근황을 듣곤 했다.
출판 시장에서 유료 연재, 전자책 시장으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장르문학 시장에서 기존의 종이책 출판사들이 살아남으려면 이제는 같은 출판사가 아닌, 신흥 매니지먼트들과의 대결을 펼쳐야 했다.
매니지먼트들의 경우에는 대놓고 유료 연재, 전자책 시장을 겨냥하고 나온 회사였기 때문에 사실상 온라인에서의 수익은 종이책 출판사보다 압도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매출의 주가 되는 건 이제 더 이상 종이책 시장이 아니었다.
예전 같은 경우에는 종이책 계약서를 메인으로, 그리고 부가적으로 이북 계약서가 들어가는 형태가 되었지만, 지금은 부와 주가 뒤바뀌었다.
유료 연재, 전자책 계약이 주가 되었고, 종이책을 작가들 일정 고정 수입 챙겨주는 용도로 계약을 맺는 곳이 많이 느는 추세였다.
그래서 종이책 출판사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 게 현재의 상황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실로 간단했다.
종이책 출판사도 유료 연재, 전자책 시장으로 뛰어들면 되는 것이었다.
알아서 자체적으로 플랫폼을 만든 곳도 있었고, 별도로 종이책 출판사 아래에 매니지먼트를 창설해 이북쪽 시장의 유통망을 형성하는 곳도 존재했다.
민아 출판사가 선택한 방식은 후자였다.
그러나 이미 매니지먼트 경쟁이 과열된 시점에서 후발 주자로 들어선 민아 출판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게다가 이북 쪽에 관해 특화된 지식과 경력을 지닌 자도 다른 매니지먼트에 비해 없다시피 한 덕분에 사업 자금만 날려 먹고, 별다른 소득도 없이 매니지먼트 사업을 철수해야 했다.
이북 시장 경쟁에서 패배한 장르문학 업체에게 남은 희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민아 출판사의 상황은 너무나도 암울했다.
“이인정 대표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군.”
간만에 이인정 대표의 얼굴을 떠올려 보는 우석.
처음에는 사실 그리 좋지 않은 만남을 가졌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딱히 악감정을 품고 있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우석이 그들보다 더 돈의 흐름에 대해 민감하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민아 출판사를 이용했을 뿐.
“이대로 가면 민아 출판사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인 거 같습니다.”
“……그래?”
“뭔가 조치를 취하시겠습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묻는 민혁의 말이었으나.
우석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단호했다.
“아니, 이대로 지켜본다.”
“이유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도리어 내가 묻고 싶군. 도와줘야 하는 명분이라든지 이유가 있나?”
역으로 질문을 받은 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게 나의 대답이다.”
“…….”
민혁도 사실 민아 출판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그저 우석이 정이 많은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파악을 해 보려고 물어봤을 뿐이었다.
민아 출판사를 도와준다면 전자가 되는 거고, 아니면 후자가 되는 거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석이 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이득을 계산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 것뿐이었다.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오태준의 합류로 인해 반드 미디어는 이제 자체적으로도 종이책 출간 작업을 소화할 수 있을 만한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굳이 민아 출판사의 도움이 없어도 됐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우석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남자인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된 민혁이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럼 보고도 마쳤으니, 그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가서 업무 봐라.”
“예.”
대표 사무실을 나온 민혁의 얼굴에 만족감이 드러났다.
이우석.
이 남자는…….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민혁의 마음에 드는 주인이었다.
* * *
“크으…….”
술잔을 기울이던 이인정이 몽롱한 정신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책상 위에 머리를 묻은 채 엎드렸다.
회사로 출근을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직원들은 이미 의욕을 잃었고, 작가들은 민아 출판사를 등지면서 점점 다른 곳과 계약을 하기 위해 발을 내빼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아 출판사의 미래는 갈수록 암울해지고 있었다.
어쭙잖게 매니지먼트 사업에 도전했던 것이 뼈아픈 타격이었다.
억 단위를 쏟아부었지만, 결과는 참혹한 실패로 돌아왔다.
갈수록 늘어나는 빚덩이.
지금 당장 파산 신청을 해도 늦지 않았다.
계속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되지 않을 터.
직원들에게도 슬슬 말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출판사를 지탱하기 힘들 것이라고.
“……젠장……!”
콰앙!
책상을 그대로 내려치는 이인정.
직원들에게도, 작가들에게도 미안했다.
무능한 대표를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게 만들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가 처음부터 이우석의 자질을 파악하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매달려 있었다면 결과는 조금이나마 나아졌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자신이 나름 장르문학 업계에서 많이 굴렀고, 뼈대 있는 출판사를 운영해 왔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 버텨 왔지만…….
그 자부심이 밥을 먹여주진 않았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겠어…….”
더 이상 많은 피해를 보기 전에 선택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