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26화
42. 각오(3)
오전 스케줄을 마친 지혜가 차 안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그녀의 매니저가 고생했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수고했어, 지혜야.”
“……아니에요. 저보다 오빠나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고생하시는데요, 뭘.”
“……?”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매니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오늘 녹화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아니요. 잘 풀린 거 같던데요. 왜요?”
“아니…… 뭔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거 같아서.”
매니저의 한마디에 지혜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최근 지혜는 여러모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고민의 큰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다름이 아닌 그녀의 짝사랑, 이우석이었다.
눈물 비 여주인공 역할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지혜에게 넘겨주고 싶다는 발언을 한 우석.
그 때문에 지혜는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눈물 비는 거대한 콘텐츠임에 틀림없다.
이미 눈물 비가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뉴스 기사들이 특보로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고, 각종 커뮤니티나 SNS에서도 눈물 비의 주연을 맡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지혜가 여주인공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면, 여론은 분명 실망한 눈길을 보내올 게 틀림이 없었다.
지혜도 그녀가 스스로 연기자로서의 커리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석이 말한 대로 뮤지컬 배우로서의 경력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장기간 한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눈물 비 여주인공 배역은 탐이 날 만했다.
원작의 팬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연예인으로서.
하지만 섣불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많은 인신공격성 악플들만 봐도 정신적인 데미지를 많이 받곤 하는 지혜인데, 과연 그 배역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그녀 본인에게도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힘들 것이다.
무리다.
할 수 없다.
이런 것들뿐이었다.
점점 낯빛이 어두워지는 그녀를 매니저가 여전히 이상하다는 식으로 바라봤다.
“무슨 일 있는 게 분명하구만.”
“딱히 그런 건…….”
“이야기라도 한번 해봐.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에서는 해결해 줄 테니까. 설령 해결 못 하는 문제라 하더라도 털어놓기라도 하는 게 어때?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많이 나아진다고 하잖아.”
고민 상담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상담을 요청해 온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해 주는 일이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을 잘 들어 줄 줄도 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은 보기와는 다르게 어려운 일에 속하기도 했다.
반면,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분명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외부로 새어 나가선 안 될 중요한 건수였다.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 드릴게요.”
“흠…… 그러냐.”
지혜가 이렇게까지 말을 할 정도면, 사적인 문제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말을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기로 결심한 매니저가 운전대를 잡아 차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매니저로서는 그저 지혜가 슬기롭게 그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게 고작이었다.
* * *
LC 엔터테인먼트 휴게실 안.
그곳에서 회사 대표인 오채원은 우석에게 예상치 못한 요구 조건을 받게 되었다.
눈물 비 여주인공 캐릭터, 유미인을 한지혜에게 맡기고 싶다.
조건은 상당히 간단했다.
하지만.
과연 지혜가 잘해낼 수 있을까?
오채원은 끊임없이 그런 질문을 되새겼다.
이제 막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한테 그런 막중한 배역을 맡겨도 되는지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실 여지는…… 전혀 없나 보군요.”
“예.”
“허허…….”
우석은 계속해서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확실했다.
한지혜.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
금액적인 요구도 아니고, 설마 해당 연예인을 직접 지정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그 상대가 여배우도 아닌 신인 여가수라니.
“받아들이시겠다면,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지혜 양에게 유미인 배역을 넘기겠습니다.”
“저야 좋긴 합니다만…… 지혜가 과연 이 배역을 맡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군요.”
분명 지혜는 이 자리를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석의 선택은 크나큰 실수가 될 수도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우석은 자신의 선택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잘 풀릴 겁니다.”
“…….”
“지혜 씨라면 충분히 대한민국을 넘어서…… 아니, 세계를 넘는 대스타가 될 겁니다. 저는 지혜 씨에게 그 초석을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지혜를 도와주려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지혜와 무슨 관계이기에 그녀를 이렇게까지 믿어주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기회를 주려고 하는지 오채원의 입장에선 도통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건 분명 기회였다.
다른 소속사에게 기회가 넘어가기 전에, 차라리 일찌감치 LC 엔터테인먼트가 배역을 가져오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이 대표님의 이런 갑질이…… 과연 우리 회사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요.”
오채원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지혜 아니면 안 된다는 확고한 조건을 가지고 갑질을 부리는 우석.
우석이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나중에 두고 보시면 알 겁니다.”
그의 강인한 신념이 느껴지는 그 한마디에 오채원은 더 이상의 의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채원 또한 자신의 밑에 있는 연예인들을 믿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였다.
지혜는 분명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소속사 대표가 믿어주지 않으면, 과연 누가 믿어줄까.
지혜의 성장 가능성은 이미 오채원도 많이 접해 왔다. 이번에도 분명 지혜는 LC 엔터테인먼트를…… 오채원을 만족시켜 줄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 대표님의 말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남자가 서로 악수를 주고받았다.
이윽고 잠시 뒤.
“실례되지 않는다면 릴리아나 양에 관해서 한 가지 질문해도 괜찮습니까?”
“무엇이죠?”
“개인적으로 릴리아나 양이 연예계로 진출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연예계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릴리아나가 연예계라니.
쉽게 상상이 잘 안 갔다.
만약 이 자리에 화염룡과 김민혁이 있었다면, 배꼽을 잡고 웃어 댔을지도 몰랐다.
릴리아나가 얼굴이 반반한 건 사실이었지만, 애초에 성격이 연예인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나도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릴리아나는 연예계 활동보다 더 중요한 꿈이 있었다.
“네 생각은 어떻지?”
우석의 물음에 릴리아나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답변을 들려줬다.
“저는 우석 님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우석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릴리아나의 현재 위치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우석의 곁이었다.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 * *
얼마 전 우석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한 지혜는 며칠 뒤, LC 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오채원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지혜.
비록 LC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 기획사의 사장을 맡고 있는 오채원이었지만, 소속 사원들이라든지 연예인들에게는 대표라고 해서 딱히 대하기 어렵다는 느낌은 잘 없었다.
애초에 오채원은 본인이 스스로 대표임을 자처하며 위압감 있는 모습을 어필하기보다는 오히려 연예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며 자주 어울리는 형태의 생활을 고집해 왔다.
LC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차리기 전에는 가수 지망생 몇몇을 데리고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해온 경력도 지니고 있었다.
진정으로 바닥부터 정상 끝까지 올라온 사람이었기에 보다 더 스스럼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오, 지혜 왔냐. 일단 좀 앉거라.”
“네.”
오채원에게 인사를 건넨 뒤, 손님용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자리를 잡자, 채원이 곧바로 지혜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혜야, 놀라지 말고 들어라.”
“예? 뭔데요……?”
갑자기 놀라지 말라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감이 잘 안 잡힌 지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오채원이 며칠 전, 우석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반드 미디어라고…… 알고 있느냐?”
오채원의 물음에 순간 지혜가 속으로 헛숨을 삼켰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빤히 보였다.
한편, 지혜의 그런 반응에 오채원이 도리어 의구심을 드러냈다.
“응? 알고 있는 게냐?”
“그…… 자, 자세히는 모르구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출판사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혹시 몰라 짐짓 모른 척을 하는 지혜였다.
“좋아하는 소설?”
“눈물 비요.”
“아하…… 그렇군. 그래…… 때마침 잘됐다. 내가 이야기할 것도 눈물 비와 연관이 있는 거니까.”
‘역시 그랬구나.’
이것으로 오채원이 무슨 말을 꺼낼지 거의 확실시 되었다.
보나마나 뻔했다.
우석이 지혜에게 들려줬던 그 말이 확실했다.
“BLT 방송국에서 조만간 눈물 비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하던데, 반드 미디어가 너에게 여주인공 역할을 주고 싶다고 의사를 밝혀 왔다.”
“저, 정말요?”
“그래. 놀랍지 않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놀라움을 지혜는 며칠 전에 겪었지만 말이다.
단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 들어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채원이 지혜를 따로 불러 이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우석이 오채원을 찾아와 직접 그의 의사를 밝혔다는 뜻이 되었다.
“일단 반드 미디어 측에서 밝혀 온 건, 너 아니면 여주인공 역할을 줄 생각이 없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어떠냐, 지혜야. 한번 해 보겠느냐.”
“그, 글쎄요. 저는 잘…….”
아직까지도 고민 중이었기에 섣불리 대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의 망설임에 오채원이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네 스케줄이라든지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드라마에 출연한다 하더라도 앨범 작업은 계속할 테니까 가요계 활동도 너무 심려치 말고.”
“……대표님께서는 배우도 아닌 제가 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나요?”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하는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오채원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말이다…… 이 LC 엔터테인먼트를 차릴 때, 이런 각오를 다졌던 적이 있었다.”
“어떤 각오인가요?”
“나와 같이 걸어갈 연예인들을 믿어주기로. 세상이 등을 져도, 나 하나만큼은 내 연예인을 끝까지 믿기로 결심했다. 그게 나의 창업 설립 포부야.”
“믿음…….”
“이우석 대표가 너의 어떤 면을 높게 샀는지에 대해선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외부인이 이렇게까지 너를 믿어주는데, 회사 대표인 내가 너를 못 믿으면 쓰겠나. 그러니까 난 네가 잘할 거라 믿기로 했다.”
오채원의 말 때문일까.
무한의 반복을 펼쳐 오던 고민이 마침내 결승점을 발견한 듯했다.
물론 그 결승점은 아직 한참 멀게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목표가 보인다는 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믿음…….”
우석은 지혜를 믿었기에 드라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배역인 여주인공 자리를 제안했을 것이다.
그 믿음에 보답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가 우석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답이었다.
“……대표님.”
“그래, 지혜야.”
“저, 한번 해볼게요……!”
지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믿어주는 이들이 그녀를 응원하고 있는데…….
그녀라고 가만히 멈춰 설 필요가 있겠는가.
지혜의 답변을 들은 오채원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그 마음가짐이다!”
앞으로 나가리라!
그러한 의지가 지혜의 눈동자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