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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121화 (121/201)

갑질의 신 121화

41. 미행(2)

“아…… 죽겠네…….”

오늘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영상 편집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고준서가 두 눈 밑에 잔뜩 낀 다크서클을 매만졌다.

이놈의 다크서클은 지워질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매번 이렇게 피로를 달고 살다시피 하는 고준서.

이것이 PD의 숙명이거늘. 어찌하겠는가.

그래도 그가 도맡았던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지어져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상부에서는 고준서 PD를 향한 기대감이 한층 더 높아졌다.

그 기대감은 부담감이라는 이름을 지닌 마음의 짐으로 뒤바뀌어 그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차기작도 성공을 시켜야 했다.

이번에는 좀 더 대박을 터뜨리고 싶다.

그런 욕망이 고준서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을 무렵이었다.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요즘 유행을 탄 발라드 노래가 좁은 영상 편집실 내부를 가득 채워 가기 시작했다.

그의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벨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고준서 PD가 크게 움찔하더니, 이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또 누구야…….”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혹시 스팸 번호는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지만…… 걸려온 전화번호는 070이 아닌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음을 알아차린 고준서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고준서 PD님 핸드폰 맞나요?

“예. 제가 고준서입니다만…….”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혹시 세간에 유명한 그 ‘김미영 팀장’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 봤다.

스팸 전화일 가능성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괜한 의심에 불과했다.

-반드 미디어에서 근무하고 있는 릴리아나라고 합니다만.

‘릴리아나? 가만…….’

외국인 같은 이름을 되짚어 보기 시작하던 고준서가 이내 그녀가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금발의 미인, 릴리아나.

얼마 전에 눈물 비 드라마 제작 관련 때문에 이우석과 같이 만났던 적이 있었던 그 여자였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곧바로 정신을 차리며 통화 내용에 집중을 했다.

릴리아나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은…….

눈물 비 드라마에 관한 무언가의 사항을 통보하기 위함이 아닐까.

-얼마 전에 저희 측에서 제시했던 조건 여부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저희 측 조건을 가급적이면 다 수용하는 쪽으로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그 의견은 변함없으신가요?

“예. 변함없고, 이 대표님이 그때 말씀해 주신 것들 전부 다 충분히 수용 가능합니다. 이미 윗선에 보고를 드렸고, 허락까지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고준서 PD님께 이번 드라마 제작을 맡기려고 합니다만.

“……네?”

대답을 듣고도 순간 이해가 잘되지 않은 모양인지 어벙한 반응을 보여 버린 고준서였다.

그러자 릴리아나가 재차 말을 반복해 들려줬다.

-BLT 방송국 측에 드라마 제작에 관한 권한을 넘겨 드리려고 합니다.

“저, 정말입니까?”

-예. 이우석 대표님께서도 그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갑자기 들려온 반가운 소식에 고준서가 자신도 모르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앞에 대상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로 있는 양 머리를 조아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고의 드라마로 만들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종료되었다.

방금 겪었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던 고준서가 자신의 볼을 살짝 꼬집어 봤다.

“그래…… 분명 꿈이 아니야!”

영상 편집을 하던 도중에 잠이 들어 이러한 꿈을 꾸게 된 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곧장 영상 편집실 문을 박차고 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가기 시작하는 고준서.

이윽고 사무실 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희진아! 대박 소식이다!”

“PD님,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문 좀 그렇게 난폭하게 열지 말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방금 반드 미디어 쪽에서 연락이 왔다고! 우리한테 드라마 제작을 맡긴다고 하더라!”

“……정말이요?”

“그래!”

“혹시 PD님, 꿈속에서 그런 말을 들은 건 아니죠?”

“아니라니까? 내가 방금 볼까지 꼬집어 봤어!”

다시 한번 희진의 눈앞에서 자신의 볼을 꼬집는 시늉을 선보인 고준서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박 사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지금 당장 작가들 소집해라. 회의 시작한다!”

“네, 알았어요!”

고준서의 말에 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행동에 임했다.

여유롭게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눈물 비 드라마 제작!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르는 원작 콘텐츠가 이들의 손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 * *

슬슬 나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하는 우석.

“그럼 잠깐 나갔다 오마.”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잘 갔다 와라.”

릴리아나와 철수의 배웅을 받으면서 현관문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어머, 우석 오빠!”

때마침 화염룡과 마주한 우석이 별일이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이 시간에 회사에는 무슨 볼일이지?”

“그냥 이 주변에 온 김에 심심해서 한번 들러봤어.”

“그런가.”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굳이 회사를 방문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우석이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석 오빠는 퇴근하는 거야?”

“아니, 지혜 씨랑 약속이 있어서 나가려고 한다만.”

“지혜 씨? 오늘?”

“그래.”

“흐음…… 그래?”

화염룡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태도 변화에 우석이 살짝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딱히.”

“그렇다면 나 먼저 가 보마.”

“응, 잘 갔다 와~”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우석을 배웅해 주는 화염룡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무실 바깥을 나서자마자.

“우석 오빠를 혼자서 독점하려고 하다니…… 갑자기 질투가 확 나네.”

“…….”

화염룡의 태도 변화에 바로 근처에서 업무를 진행하고 있던 철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미 반드 미디어 사무실에 소속되어 있는 사원들은 화염룡이 우석에게 대놓고 애정 행위를 시도하려고 하는 모습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실제로 본인도 대놓고 우석을 좋아한다는 말을 수시로 하고 있으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진짜로 우석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강제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화염룡의 질투 발언에 릴리아나가 곧장 태클을 걸어왔다.

“그저 사업상 이유로 만난다고 하시니, 그런 감정 품을 필요 없어.”

“사업상이라니. 남자와 여자 사이는 언제든지 연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거야, 너?”

“그건…….”

예전의 릴리아나라면 화염룡의 말을 이렇게 맞받아쳤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최근 들어 릴리아나는 자신이 과연 단호하게 이러한 말들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의심이 들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우석에 대한 마음에 뭔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단정을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릴리아나가 입을 굳게 다물자, 도리어 화염룡 측에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분명 릴리아나가 뭐라 반박을 가할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그저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 봐라?’

그 순간, 화염룡의 머릿속에 드는 한 가지 추측이 있었다.

어쩌면 릴리아나가…….

우석에게 향하고 있는 자신의 애정을 점차적으로 인정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무언가 결심을 내린 화염룡이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미행하자.”

“……뭐?”

화들짝 놀란 릴리아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강하게 따지고 들었다.

“미행이란…… 우석 님의 뒤를 쫓겠다고?”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절대로 허락 못 해.”

“그럼 나 혼자라도 가면 되지.”

화염룡이 독단적으로 행동을 하려 하자, 릴리아나가 강경한 발언을 들려줬다.

“혹시 서열 순위를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얼마 전, 우석은 비서들에게 서열 제도라는 것을 도입시켰다.

상위 순위를 차지한 비서가 상관의 위치에 서는 제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위 순위에 있는 비서들에게 통제 권한을 쥐고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다는 그런 것까지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순위라는 게 매겨지는 순간, 자신보다 상위 순위에 있는 비서의 말이 예전에 비해 더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릴리아나와 눈싸움을 하듯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드는 화염룡.

한편, 두 여자가 서열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말을 내뱉으며 사무실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기 시작하자, 철수가 중재를 하기 위해 나서게 되었다.

“자자, 아가씨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

“…….”

철수의 말이 맞았다.

여기는 비서들만 있는 공간도 아니고, 우석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정체를 모르고 있는 자들이 대다수인 반드 미디어 사무실 내부였다.

괜히 여기서 문제를 일으켰다간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괜히 소란을 피웠군요.”

우석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릴리아나가 먼저 종전 의사를 표했다.

그녀가 그렇게 한발 물러서자, 화염룡 역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여러분. 저희 매번 이렇게 싸우다 말다 하는 게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

결코,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싸움을 일으키는 걸 멈춘 것만 하더라도 어디겠는가.

그녀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철수였다.

그래도 화염룡은 우석의 뒤를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충분히 그녀의 의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릴리아나와 화염룡은 그래도 나름 예전부터 같이 직장 동료로 일을 해 왔다.

이미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릴리아나도 화염룡이 멋대로 하게끔 놔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좋아, 그럼 타협점을 보도록 하자.”

“어머, 괜찮은 생각이네. 어떤 식으로?”

“나도 같이 따라갈게.”

“……정말?”

화염룡이 재차 진의를 묻자, 물릴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릴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야.”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상관은 없는데…….”

화염룡과 릴리아나가 같이 우석을 미행한다고 합의점을 찾기 시작했다.

두 여인의 대화를 몰래 경청하던 오태준이 철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두 사람만 보내기에는 좀 그런 거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철수가 중개자로 개입을 해 따라가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오늘은 종이책 마감이 있는 날이었다.

업무를 내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어쩐담…….’

이대로 2명만 보내면 뭔가 큰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물론 평소의 릴리아나라면 그 누구보다도 합리적이고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줄 터였다.

하지만 화염룡과의 방금 그 언쟁은 릴리아나답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전부터 릴리아나는 화염룡과 엮일 때마다 이런 식으로 욱하는 성격을 몇 번 보여 왔다.

결국 화염룡과 릴리아나, 두 여자가 붙어 다닌다는 말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걸어 다닌다는 뜻과도 같았다.

‘두 사람과 같이 보낼 만한 인물을 찾아야…….’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리는 철수.

그 순간, 유독 한가해 보이는 사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반드 미디어 내부에서 한가함이라면 절대로 뒤처지지 않는 면모를 보이고 있는 자.

소위 말해서 할 일 없는 남자의 대명사, 남서진이 철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서진이 녀석이 있었지!’

철수의 입에서 다행이라는 의미를 담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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