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18화
40. 조건(3)
“처음 뵙겠습니다. 반드 미디어 영업부 팀장, 김민혁이라고 합니다.”
“……남궁진수입니다.”
민혁으로부터 명함을 건네받은 남궁진수가 여전히 불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그와 마주 섰다.
사실 이 미팅 자리를 성사시키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반드 미디어.
최근 웹소설 업계에서 대세라 불리며 동시에 웹툰 쪽에도 진출을 한 신흥 강자 업체.
남궁진수 역시 반드 미디어라는 상호를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반드 미디어에 소속된 웹툰 작가들 중에는 남궁진수가 인정하는 실력을 겸비한 작가들도 꽤 많았다.
그래서 반드 미디어를 예전부터 예의 주시해 오긴 했지만, 그래도 남궁진수가 딱히 먼저 연락해 그곳과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닌 적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그는…….
대한민국 웹툰 업체들에 대해 많은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앉으시지요.”
“……그러도록 하죠.”
남궁진수가 자리에 앉자, 민혁이 빙그레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일기예보를 보니 당분간 이런 날씨가 계속될 거라고 하더군요. 이럴 때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참 좋을…….”
“서두를 길게 끄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
역시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상당히 까칠함’이라는 감정을 너무나도 잘 어필했다.
물론 민혁도 남궁진수의 이런 성격을 사전에 잘 알고 왔기에 그의 발언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작가님께서 그걸 원하신다면야……. 저희 측에서 작가님을 뵙고자 한 목적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민혁의 눈이 남궁진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희 반드 미디어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으면 합니다.”
“…….”
“물론 금액적인 부분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업계 최고의 대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저는 딱히 돈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미 벌 만큼 벌었거든요.”
남궁진수 역시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말을 보탰다.
“팀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그간 제가 연재해 오면서 대박을 친 웹툰만 대여섯 개 정도 됩니다. 책도 수만 권은 팔아먹었고, 드라마화도 몇 번 되었지요. 더 이상 돈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앞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기존의 작품들만으로도 평생 먹고살 돈은 다 마련했으니까요.”
“오호…… 그렇군요.”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남궁진수의 눈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어렸다.
“제가 그리고 싶은 작품. 그것을 연재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계약은 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싶어 하시는 게 무엇이지요?”
“대체역사물입니다.”
장르를 듣자마자 민혁은 속으로 그간 남궁수진의 차기작이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납득을 하고 말았다.
대체역사물.
사실 웹툰 장르 가운데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장르이기도 했다.
물론 대체역사물을 소재로 한 웹툰들은 대다수 작품성도 좋았다.
역사적인 의미를 담은 사건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넣음으로 인해 웹툰을 보는 독자들에게도 역사 공부를 시켜줄 수 있는 좋은 장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러브 코미디, 19금, 일상 웹툰, 이능력 배틀물, 혹은 소위 말해서 병맛 콘셉트라 불리는 소재들이 대세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남궁진수가 대박을 터뜨린 웹툰들도 러브 코미디 아니면 이능력 배틀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진지한 대체역사물을 쓰고 싶다고 하니, 그와 접촉을 펼친 플랫폼들의 입장에서는 실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을 터였다.
플랫폼들이 원하는 건 남궁진수가 그린 러브 코미디, 혹은 이능력 배틀물. 이러한 장르를 지닌 웹툰이었다.
제아무리 남궁진수라 하더라도 돈이 충분히 될 법한 장르들을 버리고 모험수를 강요하기에는 너무 위험 요소가 컸다.
“대체역사물이 그간 작가님이 쓰셨던 웹툰 장르들에 비해서는 마이너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저도 많이 양보를 한 겁니다. 돈은 많이 줄 필요도 없으니, 제가 연재하고 싶은 웹툰을 연재하게 해 달라. 이렇게 생각을 굳혔지요.”
“그렇군요.”
이것이 남궁진수를 포섭하기 위한 가장 큰 난관이었다.
괜히 비싼 돈 써서 데려온 웹툰 작가인데, 정작 돈이 되지 않는 웹툰을 그린 덕분에 몸값도 채우지 못하고 돈만 날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민혁은 아이티로부터 받은 정보 중 하나를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눈여겨보고 있었다.
“저희 측에서도 조건을 걸 수 있겠습니까?”
“무슨 조건이지요?”
“그리고 싶으시다는 대체역사물 웹툰은 그릴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이능력 배틀물 장르로 웹툰 하나를 더 그려주신다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웹툰을 2개 동시에 진행할 정도로 손이 빠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체역사물은 장기적으로 갈 생각이기 때문에, 향후 2년은 제가 구상한 웹툰 하나에만 집중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고집쟁이였다.
그것도 상당히.
‘이래서 플랫폼들이 두 손, 두 발을 다 든 거구만.’
반드 미디어는 전속 계약을 체결할 시 기본적으로 3년을 기준으로 잡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역사물 웹툰 하나를 최소 2년을 잡고 있다니…….
작품 준비라든지 기획 등에 소요되는 기간까지 합산하면 전속 기간 3년을 다 채우고도 대체역사물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 말은 즉, 대체역사물을 끝내고 그 차기작으로 다시 대중들이 좋아하는 장르를 지닌 웹툰을 연재하게끔 만든다 하더라도 전속 기간이 만료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전속 계약을 5년으로 늘리는 건 어떻습니까?”
“제 입장에선 너무 긴 거 같습니다.”
“…….”
결국 반드 미디어에서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웹툰만 그리게 해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플랫폼들이 아직까지도 남궁진수라는 거물급 웹툰 작가를 데려가지 못한 것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른 대안을 제시해 보도록 하죠.”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정보에 의하면…… 작가님이 저작권을 다시 회수해 온 작품이 3개 정도 있는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그건 어디서 안 거죠?”
“정보에 능통한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
“…….”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민혁이 가리킨 그 ‘정보에 능통한 친구’는 정보 담당 비서, 아이티를 의미했다.
어차피 아이티가 누구인지 설명을 해 줘도 남궁진수는 전혀 모를 터.
반대로 남궁진수는 어차피 대한민국 장르문학계가 좁고 좁은 터라 자신의 저작권 회수에 관한 이야기도 널리 떠돌 수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식으로 납득을 해버렸다.
“예, 맞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작품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마도…… ‘언덕을 넘어서’, ‘시간의 끝’, ‘타임 트러블’일 겁니다.”
“그렇군요.”
하나같이 전부가 다 명작 취급을 받는 훌륭한 웹툰들이었다.
심지어 ‘타임 트러블’의 경우에는 드라마화로 대박까지 쳤던 원작이기도 했다.
전속 기간이 만료가 되어, 해당 업체와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내용 증명서와 함께 해지 통보를 보내 남궁진수가 저작권을 가져온 3개의 웹툰 작품들.
그것이 이번에 김민혁이 활용할 무기이기도 했다.
“그 3개의 작품을 저희에게 제공해 주신다면, 작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대체역사물을 연재할 수 있게끔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
“작가님 입장에서도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께서 만드신 웹툰을 저희가 다시 활용하는 차원에서 넘겨주신다면, 기존에 완결되었던 세 작품으로 다시 수익이 날 수 있게끔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작가님께서 계속 가지고 계셔도 그 콘텐츠를 결국 굴리지 않으면 마땅히 손해라고 봅니다.”
“그렇긴 하지요.”
“마케팅이나 홍보 같은 면에서는 저희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반드 미디어는 업계 내에서도 프로모션 잘 걸어주기로 아주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외적인 부분에서 작품을 홍보하는 면에선 반드 미디어만큼 잘하는 업체도 없더군요.”
반드 미디어는 신생 업체임에도 불구하고 그쪽 방면으로도 상당히 유명했다.
그 점은 남궁진수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할 여지가 없었다.
“3개의 작품을 넘겨준다라…….”
작게 중얼거리는 남궁진수의 말이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김민혁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만한 여력이 되었다.
거의 다 넘어왔다!
제아무리 남궁진수가 인지도 있는 웹툰 작가라 하더라도 그가 홀로 여러 업체들을 다니면서 프로모션이라든지 마케팅 업무를 소화할 수는 없었다.
이런 방면으로는 차라리 신뢰 있는 업체에게 맡기는 편이 좋았다.
웹툰 작가로서 오랜 기간 동안 활동을 해 왔던 남궁진수이기에 그러한 점은 더더욱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다가는, 자신의 팬들이 염원하는 차기작이 영영 나오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뭐든지 적당히가 좋았다.
고집을 부리는 것도 이제는 여기서 끝을 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게다가 때마침 반드 미디어라는 좋은 업체에서 접선이 들어왔으니…….
자신이 그리고 싶은 웹툰을 그리게 해줄뿐더러, 기존의 작품들도 굴려 준다는데, 남궁진수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민혁이 입을 열며 또 다른 추가적인 사항을 들려줬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한 시동이었다.
“전속 계약이라 하더라도 외주라든지 이런 건 충분히 하실 수 있게끔 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타 플랫폼에서 새로운 웹툰을 연재한다든지 그런 수준까지는 허용해 드릴 수 없지만…… 광고 만화나 아니면 일러스트 같은 간단한 외주는 괜찮을 거 같습니다.”
“하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손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닙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외주를 받아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만…… 아마 외주를 미친 듯이 받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다행입니다. 퀄리티 좋은 웹툰을 연재하고자 하시는데, 가급적이면 그쪽에 집중을 하시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민혁의 수완 때문일까.
남궁진수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다는 신호 중 하나가 바로 웃음 아니겠는가.
처음 만날 때부터 계약 이야기가 오고 가는 순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싶은 것.
하지만 상업성을 요구해 오는 업체들.
그들 때문에 남궁진수는 이 업계에 환멸감을 느끼고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휴식을 빙자한 슬럼프였으나, 남궁진수의 그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아직까지 불씨가 남아 있었다.
좋은 기회가 온다면 다시 펜을 잡고 싶다!
그 열망이 하늘에 닿았을까.
반드 미디어라는 업체와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 남궁진수는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그럼…… 계약 이야기로 넘어가 보도록 하죠.”
민혁의 말에 남궁진수가 이견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 *
미팅이 끝난 이후.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던 남궁진수가 민혁과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미팅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천만다행이군요.”
“반드 미디어라 했지요? 김민혁 팀장님 같은 분이 계시는 회사라고 하니 뭔가 더더욱 관심이 가는군요. 혹시 내일 정도에 제가 회사에 찾아가 볼 수 있겠습니까?”
“내일 말씀입니까?”
“예. 가서 대표님 얼굴도 뵙고 싶어서요. 듣자 하니 상당히 젊은 분이라고 하셨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만나 뵐 수 있는지 여쭤봐 주시겠습니까?”
회사까지 몸소 찾아오겠다는 말을 할 정도면, 그가 정말로 민혁의 처세술에 만족을 했다는 것을 뜻했다.
“예, 알겠습니다. 조금 이따 저녁 즈음에 바로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작가님.”
그렇게 서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끝나게 된 미팅.
더불어 김민혁은 이번 미팅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데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