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17화
40. 조건(2)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빠르게 녹화 현장을 빠져나가는 지혜가 바쁘게 스마트폰을 매만졌다.
“다음 스케줄이……!”
매니저가 입구 쪽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다는 내용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지혜는 더더욱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만 해도 자그마치 3개의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예능 프로그램 녹화가 2개,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이 하나.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게스트로 출연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혜야, 이쪽이다!”
“네!”
그녀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남성이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며 다급하게 손짓했다.
밴에 몸을 실은 뒤,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지혜.
“후우…….”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저보다 오빠가 더 고생 많으시죠.”
“하하, 나야 뭘…….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오늘 일정 마치고 나면 집에 들어가서 일단 좀 푹 쉬어라. 요즘 너무 고생하는 거 같다고 대표님도 많이 걱정하시더라.”
“대표님이…… 괜한 심려 끼쳐 드린 거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지혜가 소속되어 있는 LC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를 맡고 있는 오채원은 대표직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소속 가수들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챙겨주려고 하는 정이 있었다.
그 때문일까. 신인에 불과하지만, 지혜의 근황이라든지 스케줄 같은 것 등 오채원도 직접 전부 다 실시간으로 파악을 하는 편이었다.
물론 지혜가 신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 한참 잘나가는 여성 아이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LC 엔터테인먼트 자체적으로도 지혜를 특별 관리 대상으로 포함시켜 최대한 많은 대우를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NPC라는 걸그룹으로 데뷔해 이제는 다양한 분야까지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 가는 그녀.
연예인으로서 한지혜의 재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컸다.
“스튜디오까지 가려면 좀 멀었으니까 잠이나 좀 자둬라.”
“아…… 네.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지혜가 천천히 눈을 감아 본다.
익숙한 차량의 천장.
이동 시간이 워낙 긴 탓에 주로 차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예전의 경우에는 반드 미디어 사무실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건만…….
지금은 잘나가는 연예인이 된 탓에 반드 미디어에서 근무했던 시간도 이제는 추억으로 묻어둬야 했다.
‘우석 씨는 잘 지내고 계시려나.’
최근 도통 연락을 주고받지 못해 섭섭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석도 지혜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반드 미디어라는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데, 어찌 한가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연예인이 되고 나서도 반드 미디어에서 서비스되는 작품들은 꾸준히 챙겨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눈물 비는 예나 지금이나 지혜의 마음을 풍족하게 만드는 콘텐츠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신간이 나온다고 했었지…….’
눈물 비의 최근 연결권을 사서 읽는다는 걸 깜빡한 모양인지 지혜가 짧게 혀를 찼다.
눈을 붙이기 전에 스마트폰 메모장에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눈물 비 책 사기’라는 단어를 적어 놓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이 환해지면서 동시에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문구가 새겨졌다.
보내온 사람을 보자마자 지혜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우석 씨……?”
너무 오랜만에 받아 보는 우석의 문자에 순간 손이 떨릴 정도였다.
그래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문자를 열람해 봤다.
[요즘 잘 지내시지요? 연락이 통 없는 거 같아서 문자라도 한번 보내 봅니다. 오랜만에 지혜 씨 얼굴도 보고 싶은데…… 한가하실 때 회사라도 한 번 찾아와 주신다면, 제가 저녁 크게 한턱내겠습니다. 그럼 이만.]
많은 단어들 중에서도 유독 ‘보고 싶은데’라는 문장이 지혜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남자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문자를 보자마자 지혜가 대뜸 상반신을 일으키며 외쳤다.
“오빠! 혹시 다음 주에 하루라도 스케줄 뺄 수 있나요?”
“음? 왜 그러냐. 뭐 약속이라도 잡혔어?”
“네!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그 날만 좀 빼주셨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릴게요!”
“……?”
워커홀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스케줄을 자처해 소화해 오던 지혜가 대뜸 휴일을 요구해 왔다.
도대체 어떤 문자기에 그녀를 이리도 적극적으로 만든 것일까.
내심 호기심도 든 매니저였지만, 그래도 어찌하랴. 연예인의 요구 사항을 가장 먼저 들어주고 해결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거늘.
“알았다, 노력해 보마.”
“잘 부탁드려요!”
“그래그래.”
데뷔 이후 그동안 일만 계속해 왔으니, 오히려 매니저의 입장에서는 휴식을 권유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 * *
점심시간 이후.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 든 민혁이 그의 상관이기도 한 이임전에게 외근 사실을 알려 줬다.
“그럼 전 미팅 나가 보겠습니다.”
“미팅? 오늘이 누구랑 미팅이 있었지?”
“남궁진수 작가요.”
“아…… 그 작가…….”
남궁진수라는 필명을 듣자마자 이임전이 쓴웃음을 지었다. 웹툰 업계에서도 까다롭기로 상당히 유명한 작가였기에 미팅 자체를 꺼려 하는 사원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물론 이임전도 그 사원들의 범주 내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어차피 우리 회사랑 계약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안 되는 거 같으니까…… 그냥 적당히 비위나 맞춰 주고 와라. 그리고 나중에 계약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알려주기만 하고.”
“하하, 네. 알겠습니다.”
이임전은 사실 민혁이 남궁진수에게 계약을 따내 올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방금 한 말 속에도 그러한 뉘앙스가 꽤나 많이 내포가 되어 있었다.
민혁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아이티로부터 자료를 다수 건네받은 민혁이었기에 업계 내에서 그의 이미지가 어떠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고.”
“예!”
기운차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민혁.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 대표님은…… 신입을 너무 괴롭히려고 해서 문제구만.”
설마 다른 순한 작가들을 놔두고 가장 대하기 어려운 남궁진수를 테스트 대상으로 지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반드 미디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건 다름이 아닌 이우석이었다.
그가 하라면 하는 수밖에.
‘마음의 상처나 심하게 받지 않고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기껏 들어온 소중한 후임인데, 남궁진수와의 미팅 때문에 정신적 데미지를 심각하게 받고 그다음부터 회사에 안 나오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본래 콘텐츠 업계에서도 로망을 가지고 입사를 하는 데에 성공한 신입 사원들이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다음 날, 말도 없이 잠수를 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임전이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쪽이었다.
그래도 나름 싹싹하고 회사 생활도 잘 해내는 민혁을 이임전은 내심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사하자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벌써부터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으니…….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게 이임전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 * *
“……이쯤인가.”
남궁진수 작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어느 한 작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여종업원들이 밝은 목소리를 내며 민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쿠앤커피입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사이즈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라지 사이즈로 주세요.”
“네!”
약속 시간까지 대략 10분 정도 남은 상황이었다.
그 정도 시간을 고려해서 일부러 큰 사이즈로 주문을 한 민혁이 곧장 자리를 잡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음…….”
혼자 오거나 아니면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러 카페에 올 때에는 사실 자리 선정에 대해 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대충 빈자리 아무 곳에나 가서 앉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오늘처럼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는 자리 선정까지 고려해야 했다.
‘아이티의 정보에 의하면…… 시끄러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랬던가.’
근처에 손님들이 덜하면서도 동시에 경관이 좋은 창가 쪽 자리를 골라잡았다.
폐쇄적인 공간을 고른다면, 가뜩이나 까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성질을 더더욱 자극할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날씨도 좋고 화창했다.
1층이 아닌 3층 정도의 카페에서 창가 쪽에 자리를 잡으면, 아래 경관도 볼 수 있고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기도 좋았다.
자리를 잡고 가방 안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꺼내 놓은 민혁이 하나하나 눈으로 훑어보며 꼼꼼히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는 아이티가 넘겨준 남궁진수에 관한 개인 정보와 더불어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도 제대로 성사된 게 없는데, 벌써부터 계약서를 꺼내 놓으면 그것도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계약서는 가방 안에 고이 모셔 뒀다.
찬찬히 자료를 살펴보는 와중에, 여종업원이 민혁의 앞에 주문한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를 올려놨다.
“음료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민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자, 여종업원의 볼이 살짝 상기되었다.
거의 배우 수준으로 잘생긴 민혁이었기에 그의 미소는 여심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민혁.
이윽고 약속 시간이 거의 다가올 무렵, 주섬주섬 자료들을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혹여나 도중에 남궁진수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이 광경을 본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개인 정보가 적혀 있는 자료들을 낯선 남자가 빤히 보고 있는데, 기분이 놓을 리가 있겠는가.
천만에. 오히려 이건 상대방을 자극하는 불안 요소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얌전히, 최대한 깊숙하게 가방 안쪽으로 자료들을 감춰 두는 민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한 부분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첫 번째 난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칠 무렵,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가 유독 많은 시선들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하, 한복……?”
여종업원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남자가 입고 있는 복장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의 말대로 젊은 남자는 흰색과 청색으로 어우러진 개량 한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물론 한복을 입었다는 게 곧 이상한 사람을 뜻하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복은 행사라든지 기타 이벤트 등이 있을 때 입는 전통 복장 아니겠는가.
일상복으로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할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는 쪽에 속했다.
그 때문에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한복을 입고 등장한 남자에게 돌려지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한 남자.
들어오자마자 카페 내부를 살피는 동안, 민혁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입니다.”
“…….”
아이티의 정보대로였다.
남궁진수는 평소에도 사복이 아닌 한복 차림으로 외출을 하곤 한다는 정보가 그대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역시 아이티군……. 그나저나 한복이라. 신선하구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궁진수를 바라보며 민혁이 속으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물론 입 바깥으로 내뱉는 일은 없을 것이다.
쉽게 깨질 위험이 있는 보물은 정밀하고 세심하게 다뤄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