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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116화 (116/201)

갑질의 신 116화

40. 조건(1)

서로 마주 보게 된 4명의 남녀.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한 채 지속되는 만남으로 보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부터 치열한 심리전을 치르기 위해 서로가 지닌 무기들을 하나하나씩 입에 올리며 딜을 해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뭔가를 필요로 하는 쪽은 우석과 반드 미디어가 아닌, 바로 상대방이기도 한 고준서 PD와 BLT라는 점이었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입장이 되는 건 늘 그렇듯 을(乙)의 위치를 유지하게 된다.

그 반대가 갑(甲)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이들의 자리에서 갑은 우석이었다.

갑을 얼마나 만족시키느냐에 따라 눈물 비 드라마 제작 권한을 따낼 수 있느냐 마느냐가 갈리게 될 것이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이 대표님. 듣자 하니 장르문학 업계에서 상당히 잘나가고 계신다고 습니다만.”

“하하, 소문이 언제 방송업계 쪽에도 퍼졌는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잘나가는 편은 아닙니다. 아직 한참 멀었지요.”

겸손으로 고준서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는 우석이었다.

이 정도 말은 ‘오늘 날씨 참 좋네요!’같이 안부를 묻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고작 이런 사탕발림성 발언에 우석이 홀라당 넘어가 눈물 비 드라마 제작 권한을 넘길 리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준서도 잘 알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눈물 비 드라마를 저희 쪽에서 제작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군요.”

이미 알고 있는 요구 사항이었다.

실제로 전화상으로 이미 고준서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남은 건 우석이 이들의 요구 조건에 부합을 해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 결정이 BLT에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고자 직접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 왔다.

그런 고준서의 부탁에 우석은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이러한 자리가 성사되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우석이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눈물 비는 현재 가장 잘나가는 1차 창작물이기도 합니다. 이미 원작 소설은 몇 달째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웹툰화도 거의 다른 플랫폼의 매출을 압도하다시피 많은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는 시점이지요.”

“예, 그 점도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고준서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미 원작 소설뿐만이 아니라 웹툰까지.

전부 다 정독을 하고, 그에 관한 외부적인 정보들까지 다 취합해서 조사한 상태였다.

그래서 우석이 하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해당 회사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가 얼마만큼 높은 값어치를 자랑하고 있는지 밝혀두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더 좋은 조건을 받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우석이 하는 말이 전부 맞았다.

눈물 비라는 콘텐츠는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미 눈물 비 관련 유행어들은 각종 SNS,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밥 먹듯이 사용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눈물 비 명장면 등은 CF라든지 아니면 공연식 코미디 프로그램 등에서 패러디로 연출이 되는 중이었다.

2차 창작의 경우에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결국 드라마로 제작만 하면 무조건 기본적인 시청률은 보장이 되는 콘텐츠임을 입증한 것이다.

“이 대표님께서도 이번 콘텐츠에 거는 기대가 상당히 크시겠군요.”

“그런 셈이지요.”

우석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물 비는 현재 반드 미디어의 킬러 타이틀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콘텐츠를 함부로 다른 곳에 넘겨준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우석의 이런 심정을 고준서 역시 십분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급적이면 좋은 조건으로 맞춰 주고자 생각을 하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BLT 방송국이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한치를 부를까 생각 중입니다만…….”

“가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신경 쓰는 건 딱 세 가지.”

“그게…… 무엇입니까?”

“우선 첫 번째로 편수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대략 50회 정도는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50화라……. 그건 충분히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만족스러운 대답이 들려오자, 우석이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눈물 비는 러브 스토리 장르였기 때문에 특수 연출이라든지 제작비 소모가 심한 장면 연출이 최소화되는 콘텐츠이기도 했다.

그래서 50화라는 편수를 맞추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석이 더 욕심을 부린다면 50화 그 이상의 편수 제작도 가능했다.

그러나 질질 끄는 것만이 최선의 수는 아니었다.

“두 번째는 방영 시기입니다. 드라마는 가급적이면 이번 연도 말 정도에 방영이 될 수 있게끔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4분기가 시작될 때…… 즉 9월 정도에 맞춰서 방영하면 좋겠군요.”

“얼추 맞출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만. 특별히 그 시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가 모은 정보에 의하면, 이번 연도 4분기 때에 만약 BLT 채널에 눈물 비가 방영된다면, 공중파 채널 중에서 유일하게 러브 스토리 장르를 지닌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기더군요.”

“과연…… 라이벌이 아닌 독점적으로 나가고 싶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지요.”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는 라이벌 드라마가 눈물 비와 같은 장르를 지니게 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차라리 웬만하면 장르를 겹치지 않는 방향으로 시기를 잡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러브 스토리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눈물 비 드라마에 집중시키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전략적이로군…… 젊은 나이에 사업을 대박으로 이끈 건 순전히 운이 아니었어.’

우석이 들려주는 말들로 인해 고준서는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하긴, 어느 사업이건 성공시킨 사람들은 제각각 그만의 비결을 가지고 있었다.

우석의 경우에는 뛰어난 머리와 더불어 돈의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감각을 지닌 남자였다.

수익을 한꺼번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 사실 웹툰, 웹소설보다는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였다.

그래서 우석은 눈물 비 드라마화를 진행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한편, 우석으로부터 방영 시기에 대한 조건을 들은 고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맞출 수 있게끔 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어찌 보자면 이게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무엇입니까?”

그의 다음 이어질 말에 집중하는 고준서와 황희진.

그러나 머지않아…….

두 사람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주인공을 맡을 배역들은 저희 반드 미디어 측에서 선정을 하고 싶습니다.”

* * *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의 방 안은 여전히 어둠과 함께하고 있었다.

창문이란 창문에는 죄다 커튼이 쳐져 있었으며, 전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의 방을 밝히는 건 오로지 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전부였다.

“…….”

딸칵! 딸칵!

마우스 클릭에 열중하던 아이티가 책상 위에 놓인 음료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티가 살짝 얼굴을 찌그렸다.

“언제 다 마신 거지……?”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홀짝이다가 순식간에 바닥까지 다 마셔 버린 듯했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아이티가 냉장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거대한 냉장고 문을 열어 보지만…….

마실 만한 탄산음료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바깥에 사러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귀찮기도 할뿐더러 가급적이면 외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몰골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남서진, 그 녀석을 부를까.”

어차피 반드 미디어 사무실 안에 있어 봤자 하는 일이라고는 잡무뿐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에게 먹을 것을 조달해 주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심부름꾼으로 적당히 부려 먹을 만한 인물은 남서진밖에 없었다.

소봉예화, 화염룡 콤비는 아이티의 냄새 나는 방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릴리아나와 우석은 괜한 것으로 부르면 자신의 소중한 컬렉션(모니터)들을 가지고 매번 협박하기 바빴다.

특히나 릴리아나가 많이 심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 세 사람은 부르고 싶지 않았다.

“역시 남서진이 가장 무난하겠어.”

결정을 했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편이 좋았다.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아이티.

그때 마침, 그의 집 내부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오기 시작했다.

띵동!

“……누구지?”

아이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집을 찾아올 사람들은 지극히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집 바깥에 누가 서 있는지 보기 위해 감시 카메라를 발동한 순간, 아이티가 의아함을 토로했다.

“이 녀석이 왜……?”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

바로 최근에 합류한 김민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 문 바깥에 대기를 시켜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해 문을 열어 줬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민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줬다.

“또 보네, 아이티.”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그냥 이야기할 상대도 없고 그래서 심심하기도 하고. 또 이때쯤이면 슬슬 마실 거하고 먹을 것도 부족할 거 같아서 사 올 겸해서 왔지. 너, 예전부터 바깥에 나가면 막 어지럼증 생기고 기분 별로 안 좋아 보이는 표정 많이 짓곤 했잖냐.”

“……잘 아는군.”

“예전부터 서로 직장 동료였으니까.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아둬야지.”

“…….”

과도한 칭찬이었다.

그래도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든 간에 어찌 되었든 먹을 것을 조달해 준 착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보다 여전히 삭막한 곳에 사는구만. 좀 사람답게 살자고, 우리.”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뭔데.”

“일단 이 모니터들부터 좀 치우고…….”

“얀마! 지금 뭐하는 짓이냐? 사람답게 살자면서 내 삶의 전부를 치우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하하, 예전부터 모니터 좋아하는 것도 변함이 없구만.”

“…….”

김민혁의 언행을 접하는 순간, 아이티는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심심해서 찾아온 건 아니었다.

혹시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이 절로 들었다.

“너도 릴리아나과냐.”

“음? 릴리아나과?”

“남 못 괴롭혀 안달이 난 사람들을 줄여 그렇게 표현하기로 했다.”

“하하하! 그렇구만. 네 입장에서는 릴리아나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어.”

김민혁이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한편, 그를 노려보던 아이티가 의자에 앉아 말했다.

“왜 찾아온 거냐.”

“말했잖냐. 식량 조달 겸 심심풀이로 왔다고.”

“그럼 먹을 거 놓고 가. 볼일은 끝났으니까.”

“매정하구만. 옛 직장 동료를 나 몰라라 하다니.”

“……그놈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구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아이티였다.

그러자 민혁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세계의 주인님에 대해서 물어보고자 온 거다.”

“……궁금한 거라도 있냐.”

“네 입장에서는 섬길 만한 그릇이 되는지, 아닌지 물어보고 싶어서.”

“…….”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민혁을 바라보던 아이티였으나, 머지않아 답변을 들려줬다.

“내가 보기에는…… 전(前) 주인보다 훨씬 현명한 사람 같더라.”

“그렇구만.”

“그러니까 너도 현 주인에게 붙어 있는 편이 좋을 거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 우리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니까.”

“오케이, 좋은 조언 고맙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인 민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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