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12화
38. 드라마 제안(2)
철수의 곁에서 같이 대화를 경청하던 오태준도 어느새 우석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방송국이 어디입니까?”
“BLT라고 합니다.”
“BLT면…… 공중파군요.”
“예.”
“이거 참…… 설마 공중파에서 드라마 제의가 들어올 줄이야.”
태준도 케이블 정도는 들어올 거라 생각했지만, 공중파에서 직접 드라마 제의를 먼저 해올 줄은 예상도 못 한 모양인지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우석은 오히려 공중파의 적극적인 드라마 제안 어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중파 정도는 제안을 해와야 고려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지요.”
“하하…… 역시 대표님다운 발상이십니다.”
우석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배포가 상당히 컸다.
그 때문에 사업 초반부터 M 컬쳐라든지 이런 큰 기업들과 엮이면서 곧장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 온 것일지도 몰랐다.
차원이 다른 생각.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우석과 반드 미디어를 현재의 지위까지 올려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제안은 곧장 받아들이실 심산이십니까?”
태준이 슬쩍 우석에게 의사를 물었다.
공중파에서 제안이 왔다는 사실에 대해 나름 만족감을 표현한 우석이었기에 혹여나 BLT의 드라마 제의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해서 물어본 말이었다.
그러나 우석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 당장은 간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그 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겁니까?”
“거절이라기보다는 ‘보류’라는 단어를 선택해 사용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군요.”
“과연…….”
BLT 방송국에서 눈물 비라는 소설을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는 건.
곧 다른 채널들에서도 눈물 비를 노리고 드라마 제의를 해 올 거란 뜻이 되기도 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우석의 말대로 무턱대고 공중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덥석 제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간을 볼 필요가 있었다.
공중파라고 무조건 드라마 흥행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케이블 채널에서도 공중파 드라마를 씹어 먹을 정도로 작품성 있고 인지도 높은 작품이 나올 때가 있었다.
눈물 비는 원작이 워낙 좋기 때문에 2차 창작을 하더라도 웬만큼 평타 이상의 반응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눈물 비 웹툰도 M 컬쳐 내에서 소설 파트와 더불어 나란히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결과를 낸 성공한 콘텐츠, 눈물 비.
그렇다면 웬만큼 바보짓을 하지 않고선, 드라마 자체는 망하진 않을 예정이기도 했다.
이미 성공이 보장된 원작 콘텐츠가 버젓이 놓여 있는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분명 달려들 겁니다…… 먹기 좋은 고깃덩어리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 * *
반드 미디어 사무실 앞.
오토바이 헬멧을 벗은 김민혁이 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며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세계의 주인이 머물고 있다 보기에는 뭔가 좀 초라함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뭐, 어쩔 수 없겠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김민혁은 우석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석이 세계의 주인의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약간의 도박성 평가를 해 본 김민혁.
그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세계의 주인만이 알 수 있다는 현재 세계의 가치.
그것으로 인해 우석은 김민혁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여튼…… 정말 대단한 남자란 말이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반드 미디어 명패가 적혀 있는 사무실 계단까지 올라섰다.
이윽고 초인종 소리를 누르자, 인터폰 너머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반드 미디어입니다. 누구신가요?]
“나야, 나.”
[…….]
민혁의 말을 듣자마자 릴리아나의 입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마치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방문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듯한 그런 반응이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심지어 목소리에 가시가 톡톡 박혀 있는 듯한 그런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민혁이 천대를 받게 된 점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납득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우석을 상대로 멋대로 자기 나름대로 평가라는 걸 하다가 사기꾼으로 낙인을 찍히게 되었으니…… 우석의 가장 곁에서 그를 모시는 릴리아나의 입장에선 민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네가 날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난 정식으로 우석 님의 초청을 받고 이곳에 온 거라고. 멋대로 쳐들어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정말인가.]
“궁금하면 우석 님에게 직접 물어보든가.”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김민혁은 화술의 달인이라 불리는 비서였다.
그는 세 치 혀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능수능란함을 지니고 있기에 릴리아나가 ‘잠시만 기다려.’라는 말을 남기고 직접 우석에게 확인을 받기 위해 움직였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삑!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자, 눈부신 금발을 뽐내는 아리따운 미인, 릴리아나가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민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째려보지 말라니까.”
“감히 세계의 주인님에게 사기를 친 주제에…… 뻔뻔하게 잘도 그 낯짝을 들이미는군.”
“글쎄, 오늘은 우석 님이 오라고 해서 온 거라니까 그러네. 직접 확인해 봤을 거 아니냐.”
“…….”
그의 말대로였다.
김민혁을 들여보낼지 말지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우석에게 다가갔던 릴리아나다.
대답은 ‘들여보네.’였다.
우석의 결정이었기에 마지못해 따르긴 하지만, 그래도 릴리아나의 입장에선 민혁을 아니꼽게 볼 수밖에 없었다.
“……이쪽으로.”
아직도 말투에 차가움이 묻어 나오는 릴리아나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무실 안으로 입성한 뒤.
대표 사무실까지 단숨에 직행할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업무를 보고 있던 철수와 오태준, 기타 몇몇 직원들이 민혁을 힐끗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꽃미남의 출연에 사무실 여성들의 여심이 살짝 흔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반면, 철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또 이상한 사람을 데려왔구만.’
우석은 간혹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 한 명씩을 데려올 때가 있었다.
릴리아나를 비롯해서 그의 주변에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자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뭔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그 능력들이 반드 미디어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는 건 철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남서진은 제외하고 말이다.
릴리아나와 같이 대표 사무실 앞에 마주 선 민혁.
“그래도 내부 인테리어는 나쁘지 않구만.”
“네 멋대로 이 회사에 대해 판단하지 마라. 감히 비서 주제에 어딜 감히 우석 님이 만든 결과물에 판단을 하려는 거지?”
“너도 비서잖아?”
“…….”
역시 말빨로 먹고 사는 비서다운 간결하고도 강력한 일침이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릴리아나가 더더욱 매섭게 민혁을 노려봤다.
더더욱 릴리아나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자, 민혁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알았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순순히 사과를 하는 민혁.
릴리아나는 이렇게 보여도 우석이 정한 비서 서열 순위 중에서도 최상급을 차지한 넘버 원 비서였다.
우석이 서열이라는 것을 정하긴 했지만,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비서들은 사실 서열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서열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아래 순위 비서에게 뭔가 모진 명령을 내리거나 할 만한 비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열을 정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 오면 되는 거 아니냐는 비서들의 생각도 얼추 있었다.
하지만 민혁은 달랐다.
새로운 세계의 주인인 이우석.
그의 존재가 비서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 분명 우석의 ‘결재’ 권한을 필요로 하는 비서들이 우후죽순 우석에게 모여들 것이다.
비서들의 숫자가 지금에 비해 보다 많아지면, 이 서열이 지니는 의미가 훨씬 커지게 된다.
아마 우석은 일찌감치 확 늘어날 비서들의 숫자를 대비해 이런 서열 제도를 도입한 것일지도 몰랐다.
민혁은 진작부터 우석의 진의를 꿰뚫고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서열 제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어떻게든 상위 서열 숫자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순위를 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
그건 바로 우석의 사업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실제로 비서 중 유일하게 반드 미디어 사무실에서 직원처럼 계속적으로 출퇴근을 하며 일을 도와주고 있는 릴리아나가 가장 높은 서열 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열 순위를 따져 보면 우석의 사업에 많은 도움이 되는 순서대로 각각 높은 숫자를 할당받았다.
그렇다면…….
‘내 화술 능력이 우석 님의 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면…… 훗날 서열 랭킹을 어렵지 않게 올릴 수 있겠지.’
민혁도 노리는 바가 있기에 우석의 부름에 응한 것이었다.
때마침 민혁이 지니고 있는 능력은 바로 화술(話術).
우석의 사업에 필요한 능력 중 하나였다.
똑똑.
릴리아나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우석 님, 김민혁 비서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도록.”
“예.”
릴리아나가 문을 열어 주자, 민혁이 고맙다는 의미를 담은 눈웃음을 지어 줬다.
안으로 들어서자, 우석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도록.”
“감사합니다, 우석 님.”
예의를 차리며 의자에 착석한 민혁.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묻어 나오는 옅은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넌 볼 때마다 그 특유의 능글맞음이 사그라지지 않는군.”
“칭찬으로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칭찬이라…….”
우석의 입에서 오랜만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김민혁은 뭐라고 할까. 비교적 순종적인 비서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우석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만한 재목인지 시험해 본 것도 사실 민혁이 처음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괘씸함이라는 것도 느껴지긴 했지만, 동시에 민혁의 말솜씨를 잘 활용하면 분명 우석의 사업 진행에 많은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을 가지게 되었다.
“전(前) 세계의 주인의 밑에 있을 때는 무슨 일을 하면서 지냈지?”
“사기꾼으로 활동했습니다.”
“사기꾼?”
“예.”
“구체적으로 어떤 행보를 걸어왔는지 들을 수 있을까.”
“뭐…… 일관성은 없었습니다. 모 기업으로부터 수천억 원을 빼앗은 경험도 있었고, 유령회사를 만들어 다수의 돈도 가로챘던 적도 있었지요.”
“경찰에게 걸리면 끝장날 죄목들뿐이군.”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전(前) 세계의 주인이 시켜서 한 것들…… 자의로 한 건 아닙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비서들은 그들의 고유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세계의 주인으로부터 결재를 얻어야 했다.
결재 없이는 능력조차 사용할 수가 없었다.
만약 민혁의 사기들이 전(前) 세계의 주인이 지시한 게 아니었다면, 민혁은 그런 대규모의 사기를 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기 전문 비서군.”
“하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 담당 분야는 화술이라는 걸 부디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냥 재미있자고 한번 말해본 것뿐이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우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에게 영업을 맡겨 볼까 하는데.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나.”
“영업이라…….”
이것이 우석이 그를 여기까지 호출한 목적이었다.
그의 화술 능력은 진국이었다.
초반의 안 좋은 인식도 있었지만, 그래도 민혁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우석이기에 영업이라는 말을 꺼내 본 것이다.
우석으로부터 영업직 제의를 받게 된 민혁.
그의 입꼬리가 위쪽을 향해 올라갔다.
“영업은 제 전문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