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11화
38. 드라마 제안(1)
모든 직장이 그렇듯 항상 대한민국 샐러리맨들은 피로라는 두 글자를 양 어깨에 달고 사는 듯한 인생을 보내곤 했다.
물론 방송업계에 종사하는 PD도 예외는 없었다.
“…….”
편집실에 틀어박힌 채 근 12시간째 계속 같은 영상만을 반복해 바라보던 중년의 남성, 고준서 PD가 깊은 한숨을 토로했다.
“미친…… 졸려 뒈지겠네.”
주변에 널려 있는 피로 회복제와 자양 강장제들.
대다수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일이 얼마나 힘든 고충을 낳고 있는지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잠깐 좀 쉬면서 할까…….”
좁은 편집실에서 나와 기지개를 펴는 사이에, 때마침 복도를 지나던 젊은 여성 작가가 고준서 PD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어머, PD님. 아직도 일하고 계시는 중이었나요?”
“……보면 모르냐. 이 다크서클들을 봐라. 밤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냐.”
“밤새우셨어요?”
“그렇게 되었다.”
고준서가 담당하고 있는 수목 드라마, ‘바다의 자손’이 이번 편수로서 최종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시청률 30퍼센트를 꾸준히 넘기면서 상당히 괜찮은 성적을 유지해 왔던 드라마의 최종 편수였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첫 시작이 좋았던 만큼 마지막에도 좋은 인상을 남겨야 훗날, 고준서의 차기작이 시청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고 나서 편히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번 작을 마지막으로 드라마 PD를 때려치운다면 편집실에서 12시간 가까이 틀어박히면서 작업을 할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름 평생 가고 싶은 길이었기 때문에 이런 열정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준서와 같이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 작가, 황희진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PD님도 참…… 워커홀릭이시네요.”
“강제 워커홀릭이지. 그보다 그거, 뭐냐?”
“아, 이거요?”
희진의 품 안에 들려져 있는 두꺼운 책을 가리키는 고준서.
책을 집어 든 희진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려줬다.
“출퇴근하면서 짬이 날 때마다 읽고 있는 로맨스 소설이에요.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제목이 뭔데?”
“눈물 비요.”
“눈물 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거 같은데…….”
“어머, PD님, 모르시는 거예요? 요즘 로맨스 업계에서는 엄청 잘나가고 있는 베스트셀러예요.”
“그렇게나 잘나가냐?”
“네.”
“흐음…… 그래?”
드라마의 소비층은 대다수가 여성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공중파 드라마의 경우에는 여성 시청자들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는 로맨스적 요소가 항상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잘나가는 로맨스 소설이라는 말에 귀가 번뜩 뜨였다.
안 그래도 차기작 드라마 준비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였다. 만약 원작이 반응이 좋다면, 그 원작을 가지고 드라마화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던 고준서였기에 희진의 책 평가를 결코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그 책, 나도 좀 빌려주면 안 되겠냐.”
“PD님이요? 한창 바쁘실 텐데 책 읽을 시간이나 나시겠어요?”
“괜찮아. 이래 봬도 예전에 독서왕으로 불릴 정도로 책도 많이 읽었으니까.”
“그렇다면야 뭐…… 상관없지만요.”
“땡큐!”
결국 희진에게서 눈물 비 1권을 잠시 빌리는 데에 성공했다.
곧장 편집실로 들어간 뒤.
“…….”
편집 화면과 눈물 비, 두 가지를 나란히 바라보던 고준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12시간 동안 같은 화면을 응시해 왔는데, 이제 와서 또다시 화면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용기는 지금 당장으로선 선뜻 나지 않았다.
“역시 지금은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지.”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며 독서에 매진하기 시작하는 고준서의 눈이 인쇄되어 있는 활자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BLT 방송국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회의실.
황희진은 비록 젊은 여성 작가이긴 하지만, 경력으로 따진다면 현재 그녀와 같이 일하고 있는 그 어떠한 작가들 중에서도 우위를 점할 정도로 방송업계에서 많은 활동을 해 온 인물이었다.
“도민수 배우 연락처는…… 알아보셨나요?”
“아, 네.”
그녀의 말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작가가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윽고 희진이 언급한 배우의 스마트폰 번호를 액정 화면에 띄워 보여 줬다.
“여기 있습니다.”
“……네, 고마워요. 그리고 혹시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쪽에 한번 연락해 보세요. 도민수 배우 스케줄 체크해 보고, 후에 저희 측 드라마 역할 맡아 주실 수 있는지도 확인해 보시고요.”
“예, 선배님.”
“그리고 다음은…….”
차근차근 회의를 진행해 나가기 시작하는 희진.
바로 그 순간.
덜컹! 소리를 내며 회의실 문이 급작스럽게 열렸다.
깜짝 놀란 작가들이 멍한 시선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갑자기 안으로 난입한 어느 한 남자를 응시했다.
희진이 모든 작가들을 대신해 그에게 작은 불만을 토로했다.
“PD님! 놀랐잖아요! 문 좀 천천히 열고 들어오시면 안 되나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편집실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작업을 해 오고 있던 고준서가 두 눈에 강한 이채를 띠면서 회의실 의자 하나를 차지했다.
그러면서 책상 위에 어느 한 물건을 올려놓는데…….
“이건…….”
“……소설책?”
작가들이 의아한 시선을 담아 고준서가 내려놓은 물건을 바라봤다.
몇몇 작가들은 소설의 제목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겠다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눈물 비 맞죠?”
“저도 재미있게 봤었는데…….”
“그래, 바로 그거다!”
작가들의 대화를 중간에 끊은 고준서가 재차 책상을 두세 번 내려쳤다.
“이거라고, 이거!”
“PD님, 말 좀 그만 생략하시고 천천히 좀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뭘 뜻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희진이 재차 볼멘소리를 내자, 그제야 고준서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평정심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텐션이 조금씩 가라앉을 때 즈음.
“이 소설…… 혹시 읽어 본 사람 있나?”
고준서의 말에 몇몇 작가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희진까지 포함해 총 7명의 작가 중에서 4명이 읽어 봤다는 의사를 표현해 왔다.
과반수. 나름 괜찮은 수치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고준서가 근질거리는 입을 주체하기 힘든 모양인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 소설, 드라마로 제작하면 어떨 거 같나.”
“드라마…… 요?”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 들려오자, 작가들 여기저기서 큰 동요가 일렁였다.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둔 드라마는 한국에서도 꽤나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축에 속했다.
그런 걸로 따지면 사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눈물 비는 많은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였다.
드라마화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뭔데.”
“과연 저희만 눈물 비 드라마화를 노리고 있을까요?”
“…….”
희진의 일침에 순간 고준서의 텐션이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이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소설 아니겠는가. 심지어 반응도 좋다.
고준서가 나름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 본 결과, 웹소설 분야에서 매출 1순위를 달리고 있다고 잘 알려진 M 컬쳐 내에서도 반년째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소설이 바로 ‘눈물 비’였다.
이미 업계 관련 사람들에게는 눈물 비에 관한 정보가 퍼질 만큼 퍼져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눈물 비 드라마화에 대한 생각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희진 또한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 드라마화되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몇 번 가져 볼 정도였다.
이미 이들과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생각을 해봄직도 할 법했다.
결국 이 바닥도 스피드가 생명이다.
빠른 자가, 그리고 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자가 우수한 콘텐츠를 차지할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때마침 작가들 중에서도 눈물 비를 읽어 본 사람이 반수가 넘었다.
“드라마화를 제안해 볼까 하는데, 혹시 이견 있는 사람 있나.”
원래는 작가들에게 전부 다 소설을 읽어 보라고 시킨 이후에 의견을 취합하고 싶었지만, 읽어 본 사람들만이라도 먼저 반응을 들어 보자는 생각을 굳히게 된 준서가 선뜻 의견을 구했다.
그만큼 눈물 비라는 소설이 고준서의 마음에는 확 와 닿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이견은…….”
“딱히 없습니다.”
“저도요.”
“오히려 드라마로 제작하면 더 잘될 거 같은데요.”
한마디로 말해서 흥행 보증수표와도 같다는 뜻이었다.
“오케이,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고준서가 곧장 회의실 바깥을 나섰다.
그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지켜보던 희진이 못 말린다는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한 가지에 확 꽂히면 앞뒤 분간을 못 하신다니까.”
* * *
고준서의 고집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결국 반드 미디어의 사무실을 통해서 전화로 연결이 되었다.
눈물 비의 드라마 제작!
그 소식을 듣게 된 우석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새겨졌다.
물론 언젠가는 드라마 제의가 들어올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사전에 소봉예화에게 눈물 비 집필을 시킬 당시, 우석은 그녀에게 한 가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으면 하는 충고를 전한 바가 있었다.
영상화가 가능한 소설을 써라.
그 결과물이 바로 눈물 비였다.
제아무리 소설이 잘나간다 하더라도 영상화가 쉬운 게 있고, 어려운 게 있다.
판타지라든지 이런 형태는 영화가 아니라면 특히나 제작 여건이 많이 힘들었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영화에 비해 장편인 축에 속했다. 스폰을 받을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고, 그 자금으로 어떻게 해서든 영화보다도 월등히 많은 러닝타임을 지닌 영상물을 제작해야 했다.
그래서 특수 연출이 많이 들어간 소설의 경우에는 사실 드라마로 제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우석은 소봉예화에게 최대한 영상물로 만들기 쉬운 장면 연출을 주로 넣어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그 결과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우석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그래도 시기가 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가 생각하는 계획에 큰 차질을 줄 만큼 많이 늦은 편도 아니었다.
“드라마화라…….”
-혹시 생각이 있으시다면 직접 만나서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만.
“예, 저야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가능한 날짜 말씀해 주시면, 제가 최대한 맞추는 쪽으로 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 뒤로 일정을 조율한 뒤, 고준서라는 PD와 미팅을 가지기로 최종적으로 합의를 보게 된 우석.
통화 버튼을 종료하자, 옆에서 우석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철수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방금 그 통화…… 설마 드라마 제의였었냐?”
“어, 그런 것 같다.”
“이런 미친……! 우리 측 소설이 드라마화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철수와는 반대로, 우석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뭘.”
그의 말대로였다.
반드 미디어의 이러한 행보는 겨우 날갯짓에 불과했다.
좀 더 성장해야 했다.
돈의 왕이라 불리던 우석을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한참 먼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