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09화
37. 서열(1)
김민혁의 말은 결코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이우석을 제치고 그가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니.
순간 우석의 눈이 그에게로 고정되었다.
“네가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저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남자라는 말입니다.”
“……릴리아나, 저 말이 사실인가?”
질문을 받은 릴리아나 역시 동요하는 눈빛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민혁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세계의 주인은 오로지 단 한 명. 비서들에게 결재를 내릴 수 있는 권한 또한 오로지 한 명에게 주어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거야 네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그런 거고.”
갑자기 릴리아나의 말에 태클을 걸어온 민혁이 천천히 우석에게 다가왔다.
“할 이야기가 많은 거 같으니, 잠시 앉도록 할까요.”
“…….”
“제 말을 못 믿는 듯한 눈치군요.”
“릴리아나의 말과 네 말에 상당한 모순점이 발생하는데. 안 그런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릴리아나가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시죠. 법이라는 게 늘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수정도 되고, 폐기도 되고, 그리고 개정도 되는 법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간단합니다. 한 명으로 고정되어 있던 세계의 주인 자리가 세분화되어서 앞으로 여러 주인을 둘 수 있게끔 바뀐 것이지요.”
“…….”
“공교롭게도 저 또한 돈이 많은지라…… 세계의 주인 자리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더 이상 비서가 아닌 세계의 주인입니다. 당신과 동등한 자라는 뜻이지요.”
그렇게 말하고서 소파에 자리를 잡는 김민혁.
릴리아나를 비롯해 남서진 역시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계의 주인님이…… 2명…….”
“그래, 남서진.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예전의 나와 너는 같은 비서 신분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난 이제부터 세계의 주인이거든.”
“……믿을 수가 없어.”
남서진의 뇌가 과부화되고 있는 모양인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 보기 시작했다.
그건 릴리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알고 있던 세계의 주인에 관한 룰이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러나 화염룡은 두 사람과는 다르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화염룡의 모습을 캐치한 우석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너는 놀라지 않는군.”
“나?”
“그래.”
“나야 뭐…… 이미 민혁이 녀석한테 들었으니까.”
“……그렇군.”
하기야, 민혁을 통해서 이곳으로 비서들과 우석을 소집시킨 게 바로 화염룡 아니겠는가.
두 사람은 우석 일행이 여기로 오기 전부터 이미 만남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우석이 데리고 있는 다른 비서들에 비해 이러한 사실들을 훨씬 더 빠르게 접했다 해도 충분히 믿을 만했다.
소파에 앉은 민혁이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 옆에는 정보의 신이라 불리는 아이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이티를 바라보던 우석이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아이티, 방금 김민혁이 한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낼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우석 님. 컴퓨터가 없는 전 그저 무기력한 비서에 불과한지라…….”
한마디로 말해서 쓸모가 없었다.
우석은 사실 아직까지도 민혁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의 주인에 관한 룰이 그토록 쉽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김민혁보다 먼저 이 세계를 사들인 자가 바로 우석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누가 멋대로 룰을 바꿨단 말인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우석.
그런 그를 바라보던 민혁이 손사래를 쳤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이우석 씨. 그냥 당신과 내가 ‘동급’이라는 것만 알아 두시면 그만이지요.”
“……동급?”
“네.”
그 한 단어가 우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럼 한 가지 묻지. 너는 세계의 주인이 가지고 있다는 ‘결재 권한’ 역시 지니고 있나?”
“지금 당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조만간 저에게도 결재 권한을 준다고 통보가 왔습니다. 제가 세계의 주인이 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
순간 우석이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자가 정말 세계의 주인이 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결재 권한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 직접 눈앞에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혁은 세계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 게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결재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말을 언급했다.
기간이 지나면 확인을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석은 그 소요 기간조차 아까웠다.
그리고 뭐라고 할까.
겉으로 보기에는 민혁의 말이 정말 사실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의 말에 뭔가 허점이 존재하는 듯했다.
‘조금만 더 파고들어 볼까.’
다시 결심을 굳힌 우석이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너는 한때 비서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의 주인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
“우석 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주인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건 기본 아닙니까?”
“돈으로 구입했다 이건가?”
“예.”
우석은 민혁이 이 말을 내뱉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기회를 포착했다.
우석이 내뱉은 세 번째 질문.
그러나 이 질문의 타깃은 민혁이 아닌…….
그의 비서, 릴리아나였다.
“릴리아나.”
“예? 예…… 우, 우석 님.”
릴리아나답지 않게 순간적으로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직까지도 민혁의 말에 많은 복잡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했다.
그러나 우석은 당황하지 않고 연이어 질문을 이어 갔다.
“내가 이 세계를 ‘얼마에’ 구입했는지 혹시 넌 알고 있나.”
“제가…… 말입니까?”
“그래.”
우석은 릴리아나로부터 세계를 사들이고 남은 ‘잔돈’을 받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잔돈의 금액을 릴리아나가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가치가 얼마인지 릴리아나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우석의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잔액만 알고 있을 뿐이지, 우석 님께서 얼마만큼의 금액을 주고 이 세계를 사들였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역시 그랬군……!’
이 세계의 가치가 금전으로 환전되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선 우석만이 알고 있었다.
실로 간단한 계산법이었다.
우석이 라울 더 그레이너로서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 가지고 있던 수중의 재산에서 릴리아나가 줬던 잔돈 5천만 원을 빼면 세계의 가치가 금액적으로 환산이 된다.
오직 우석만이 그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잔돈을 환전해 준 릴리아나조차도 우석이 얼마에 이 세계를 사들였는지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
이건 다시 말해서…….
세계의 주인만이 이 세계의 금액적 가치를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민혁이 정말로 돈을 주고 세계의 주인 자리를 사들였다면, 우석이 생각하는 그 금액을 말할 터.
우석이 릴리아나에게 금액적인 부분을 질문하자, 민혁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했지만, 눈동자의 움직임은 결코 속일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우석이 이번에는 민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질문이다. 이 세계의 금액적 가치는 얼마나 되지?”
“…….”
굳게 입을 닫은 민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우석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체크메이트다, 이 사기꾼아.”
* * *
김민혁에게 세 번의 질문, 그리고 릴리아나에게 한 번의 질문을 한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우석은 이 네 번의 질문만으로 김민혁에게 외통수를 시전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세계의 주인 자리를 사들였다면, 그 금액을 말할 수 있을 터.
그러나 민혁은 도무지 그 금액을 입 바깥으로 꺼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애초에 세계의 주인 자리를 사들인 것도 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거 참. 금방 들통이 나다니 허무하군요.”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석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세계의 주인이시여. 제 이름은 김민혁. 비서들 중에서 ‘화술(話術)’ 분야가 특기입니다.”
“화술이라……. 그래서 나에게 그런 되지도 않는 사기를 치려고 했군.”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주인님께서 과연 제가 모실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인지 아닌지를 판명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거짓 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거짓 쇼에 화염룡도 동참한 건가.”
우석의 시선이 이번에는 화염룡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화염룡이 빙그레 웃으면서 민혁과 공범임을 실토했다.
“미안해, 우석 오빠. 그래도 재미있었으니 됐잖아?”
“과연…… 그렇군.”
화염룡의 성격은 본래 그러하다.
그녀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김민혁, 너의 잘못은 괘씸해서 도통 그냥 넘어갈 생각이 안 드는군.”
“하하하,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주인이시여. 제가 무엇을 해야 화가 풀리실 거 같습니까?”
“딱히 화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단지 모처럼 누가 세계의 주인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지, 그 윗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가 온통 거짓말투성이라고 하니 허무할 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민혁의 눈빛에서 놀라움이 묻어 나왔다.
세계의 주인 자리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게다가 평범함에 머물고 있는 이우석이라는 남자의 통찰력은 민혁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게다가 민혁의 거짓말 재간에도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도 세계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배짱을 부리면, 분명 우석도 당황할 거라 생각했다.
하나 우석은 오히려 조목조목 질문으로 상대방의 빈틈을 파고들면서 결국 허점을 공략하는 데에 성공했다.
솔직히 민혁은 우석이 이 정도까지 능력이 뛰어난 남자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화염룡한테서 우석에 관한 칭찬을 여러 차례 들었을 뿐.
그때에도 사실은 화염룡이 우석에게 콩깍지가 쓰여서 그런 사탕발림성 발언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직접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우석은 진짜배기였다.
세계의 주인에 어울릴 만한 남자였음을 민혁은 직접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새로운 비서가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비서는 우석을 시험에 빠지게끔 만든 괘씸죄를 지니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새로운 비서도 들어왔으니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민혁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하자마자 릴리아나가 다시 멘탈을 회복시켰다.
그러면서 우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도중, 비서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릴리아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우석의 말을 결코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었다.
두통에 머리가 지끈지끈한 아이티조차도 우석이 무슨 말을 할지 신경을 기울일 정도이니, 비서들에게 있어서 이우석이란 존재가 얼마나 영향력이 큰가를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이런 비서들을 향해 우석이 폭탄선언과도 같은 발언을 들려줬다.
“비서들끼리의 서열을 정할까 한다.”
서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비서들이 제각기 상반된 표정을 지으며 반응을 보였다.
서열 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하는 입장인 릴리아나로서는 기쁨이 묻어 나오는 얼굴을.
그리고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는 죄다 썩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우석이 누구인가. 이들의 주인이자 동시에 이들의 절대 갑이기도 했다.
“불만은 받지 않겠다.”
이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종결시켜 버리는 우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