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98화
33. 날개를 펼치다(2)
한루 대표 사무실 안.
그곳에서 오성태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눈앞에 있는 이임전에게 재차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회사를 관두려고 합니다.”
“뭐어?”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발언이 새어 나왔다.
회사를 관둔다니.
성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퇴사 의사였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임전이 먼저 관두겠다는 말을 할 줄이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서 하는 거냐?”
“예.”
“너를 받아줄 회사가 있다고 생각해서 관둔다는 건 아니겠지?”
“공교롭게도 이런 무능한 저라 하더라도 받아줄 회사가 있더군요.”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 가는 이임전.
그는 더 이상…….
오성태가 깔보는 최약체의 을이 아니었다.
“회사? 거기가 어디냐.”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모양인지 이임전의 입에서 곧장 자신이 이직할 회사의 상호명이 언급되었다.
“반드 미디어입니다.”
“반드 미디어? 웹툰 기획자가 거길 가서 뭐하려는 거냐. 네가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거기 이 대표님은 이런 저라 하더라도 많은 쓸모가 있을 거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
예전의 이임전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퇴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고 알아서 저자세로 기던 그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당당함을 선보이고 있었다.
반드 미디어.
확실히 최근에 주가를 올리기 시작하고 있는 업체라 들었지만, 웹툰 사업 진출은 그리 쉽지 않을 터.
그렇게 생각한 오성태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이 이임전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보기도 싫으니까 당장 꺼져라!”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미련 없이 대표 사무실을 나왔다.
이임전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퇴사를 선언하고 난 동안에도 여태 오성태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분풀이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많은 분통을 터뜨렸어도, 그동안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게끔 직장이란 이름의 보금자리를 지원해 주지 않았는가.
그것에 대한 고마움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짐을 싸기 시작하는 이임전.
그의 주변으로 사원들이 몰려들었다.
“부장님 가시면 여긴 망합니다!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겁니까?”
“부장님답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이임전이 한루를 떠나면, 사실상 이 회사는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임전보다도 더 뛰어난 인물을 데려오던가 하지 않는 이상은 한루의 앞길은 어두웠다.
잠시 짐을 꾸리던 손길을 멈춘 이임전이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퇴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말해줬다.
“더 이상 착하기만 한 을로 남고 싶지 않으니까.”
“…….”
사원들은 이임전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조만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깨닫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이임전은 한루를 관두게 되었다.
* * *
“그,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장 차림을 갖춘 젊은 여성이 눈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우석과 릴리아나에게 긴장 어린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녀를 향해 우석이 대표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줬다.
“고생 많았습니다. 합격 여부는 따로 문자를 통해 통보될 예정이니 3일 후 정도에 확인해 보시면 될 듯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단발의 여성이 다시 한번 우석과 릴리아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면접자를 현관문까지 안내하기 위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선 릴리아나가 그녀를 배웅해 줬다.
그러는 사이에, 철수가 작은 웃음을 토해 내며 우석을 바라봤다.
“방금 그 여자는 괜찮아 보였냐?”
“네 소견은 어떻지?”
“글쎄…… 긴장을 한 티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면접을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똑 부러진 거 같던데.”
“그렇군.”
펜을 굴리면서 뭔가 메모를 시작하는 우석이었다.
현재 반드 미디어는 서류 전형에 통과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면접을 치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대표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회의실로 사용되는 공간만이 있을 뿐인지라 면접 환경 여건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은 최대한 지원자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위해 아이티의 정보 지원을 받으며 면접에 임했다.
그 결과.
“얼추 윤곽이 보이긴 하는군…….”
역시 사람은 종이 쪼가리가 아닌 직접 대면을 하면서 말을 섞어 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그래도 인력 충원이라는 장기간 프로젝트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면접을 통해서 충원하는 인재뿐만이 아니라 한루에서 스카우트를 해 온 이임전도 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각 분야마다 전문가를 배치해 보다 퀄리티 있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 전에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존재했다.
“릴리아나.”
“예, 우석 님.”
우석의 지명에 곧장 반응을 보이는 릴리아나였다.
그녀에게 손짓을 하며 잠깐 따라오라는 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말없이 얌전히 우석의 뒤를 따라 잠시 바깥으로 나간 사이, 태준과 둘만 남게 된 철수가 작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혹시 말입니다.”
“……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기에 이리도 목소리를 낮추는 것일까.
오태준이 귀를 쫑긋 세우며 철수의 말에 집중했다.
“우석이하고 릴리아나 씨말입니다. 그렇고 그런 관계 아닐까요?”
“…….”
뭔가 중요한 일인가 싶었더니만, 대표와 젊은 여사원의 스캔들을 의심하는 견해에 불과했다.
“오 팀장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저야 크게 관심은 없습니다만…….”
“관심이 없다니요. 우리 회사 대표가 여사원과 노닥거리는데도요?”
“연애는 어차피 사생활의 일부인데, 굳이 저희가 신경 써서 관여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으음…….”
태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기야 우석과 릴리아나가 사귀는 관계든 아니든 간에 철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우석이 릴리아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하더라도 그게 회사 매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장르문학 시장에 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철수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요소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술을 왕창 먹이고서라도 진실을 들어야겠습니다.”
“하하하, 철수 씨는 이런 면에선 오지랖이 넓은 편인 거 같습니다.”
“예전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지요.”
물론 100퍼센트 좋은 의미로만 이뤄진 말은 아니리라.
* * *
바깥을 나오자마자 우석이 릴리아나를 별도로 호출한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잠깐 소봉예화의 집에 들르도록 하지.”
“지금……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릴리아나가 지니고 있는 능력인 순간 이동을 활용하기만 하면, 전철이라든지 개인 차량을 통한 이동 시간을 통째로 아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우석은 일부러 릴리아나를 따로 불렀다.
“예, 알겠습니다.”
릴리아나가 주기적으로 두 사람의 작업 환경을 체크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보는 시점과 우석이 보는 시점은 다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소봉예화의 은지, 두 사람의 손에 반드 미디어 웹툰 진출 여부가 달려 있는데 어찌 소홀하게 관리할 수 있겠는가.
회사 대표인 우석도 빈번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얼굴을 비추러 가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우석이 릴리아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는 이들이 순간 이동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 만한 시선이 없었다.
“그럼…….”
릴리아나가 우석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
손을 잡을 때, 릴리아나의 표정이 기하급수적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미 이성적으로 우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남자의 손을 잡았으니…… 그녀의 심장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그녀는 연애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감정에 대해 어떻게 대처를 해야 좋을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왜 그러지?”
우석이 멀뚱히 서 있기만 한 릴리아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릴리아나가 당황해하는 표정을 애써 지우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아, 아닙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음.”
밑바닥에서 동그란 원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빛의 입자들이 우석과 릴리아나를 감쌌다.
번쩍이는 효과와 함께 잠시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는 우석.
이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바로 소봉예화의 집 옥상이었다.
“이쪽입니다.”
릴리아나가 손수 앞장서서 우석을 안내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우석.
이윽고 소봉예화의 집 문 앞에 도착하자, 릴리아나가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인터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봉예화의 목소리.
그러자 릴리아나가 자신의 이름을 들려줬다.
“릴리아나다. 우석 님을 모시고 왔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리는 현관문.
두꺼운 현관문을 열고 여자들만 살고 있는 금남 지역에 들어섰다.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이란 창문에는 전부 다 커튼이 쳐져 있어서 대낮이라는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도 거의 다 꺼져 있었다.
탁자용 스탠드를 제외하고는 빛이란 존재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가정환경 속에서 우석이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환경이 너무 어두운데 어떻게 작업을 할 수 있지?”
“……뭘 모르는군, 세계의 주인이여. 본래 창작 작업이라 함은 어두운 환경에서 해야 더 잘되는 법…… 기억해 두라고. 크크큭…….”
“…….”
소봉예화와 화염룡,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마다 이 상반된 태도 때문에 영 적응이 안 됐다.
화염룡은 그래도 상대하기가 편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대인 관계용 인격이라 그런지 말도 잘하고 그다지 쑥스러움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소봉예화는 달랐다.
히키코모리 인격이라 그런지 말도 이상하게 한다.
게다가 중2병이라 뭔가 쉽게 와 닿지 못하는 말들을 많이 내뱉곤 했다.
소봉예화의 이런 점은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찌 되었든 그건 둘째 치고.
“은지 씨는?”
소봉예화의 또 다른 파트너이기도 한 은지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자 소봉예화가 손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자고 있다만.”
“과연…… 그렇군.”
빠른 작업 준비 탓에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연속으로 철야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탄생한 눈물 비 웹툰 5화 편수.
프롤로그를 포함해 4화까지 완성된 연재분이 드디어 반드 미디어 측에 전달되었다.
그렇다고 작화를 은지 혼자서 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봉예화가 누구인가. 문화와 풍습을 관장하는 비서다.
그녀가 단순히 글만 쓸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콘티 작업은 기본이요, 은지와 더불어 웹툰 작화까지 소화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지녔다.
실제로도 은지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 덕분에 그녀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사실 소봉예화가 스스로 눈물 비 웹툰 작화까지 전부 다 소화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눈물 비 작가로서 이미 충분히 많은 명성을 획득한 그녀 아니겠는가.
소봉예화만 원톱으로 키우는 방향이 아닌 다수의 작가진들을 동시에 키워 가는 게 반드 미디어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은지라는 웹툰계의 유망주를 발굴해 키워가고 있었다.
은지뿐만이 아니었다.
웹소설, 웹툰을 불문하고 소봉예화 이외의 작가들을 같이 키워낼 예정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작가들이 우석을 다시 한번 돈의 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