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97화
33. 날개를 펼치다(1)
짧고 강한 우석의 한마디.
제법 충격적인 말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임전은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한 곳에 또다시 독점을 주시려는 겁니까?”
“그건 비밀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
굳이 비밀이라고 할 게 어디 있겠는가.
여러 플랫폼 사이트에 뿌리거나 아니면 독점으로 주거나 둘 중 한 가지 방식일 게 뻔한데.
여기서 우석이 다른 플랫폼 사이트에 뿌리는 형식으로 하지 않겠다는 건 곧 어느 특정 사이트에 독점으로 또 한 번 연재를 할 생각이라는 것을 뜻했다.
아니면…….
“혹시 저희 측에는 연재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한루라는 사이트는 우석에게 딱히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미팅 자체도 오늘 이임전이 이곳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처음이었다.
악감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굳이 웹툰 플랫폼 연재 사이트 중 한루를 빼놓고 다른 사이트들에게 뿌리는 형식으로 연재를 할 필요가 있을까.
결국 독점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과연 어디에 독점으로 줄 것인가가 신경 쓰였다.
‘윈터테일인가? 아니면 넘버툰?’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후보안들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전부 다 매출이 쟁쟁한 플랫폼들이었다. 아마 그쪽에 2차 독점을 주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 봤다.
혹은 K 로지 같은 웹소설과 웹툰을 동시에 연재하는 플랫폼 사이트일지도 몰랐다.
여하튼 중요한 건 우석이 한루 사이트에서 눈물 비를 연재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낭패구만…….’
눈물 비를 독점으로 가져올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워낙 단가가 비싼 웹툰이다 보니 그럴 만한 여력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M 컬쳐와의 선독점 계약이 풀리고 나서 다른 플랫폼들에 뿌릴 때, 그 뿌리는 명단에 한루도 넣어 주기를 기원하며 우석을 직접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 찾아왔는데, 건진 건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 우석에게 무릎을 꿇고서 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우석과 같은 타입은 절대로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기계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힘없이 실소를 토해 내는 이임전.
그러면서 릴리아나가 가져다 준 맹물을 들이켰다.
“……알겠습니다. 이 대표님도 분명 뭔가 생각이 있으실 테니 더 이상 구차하게 조르거나 하지 않겠습니다.”
“현명하시군요.”
“현명이라기보다는…… 저의 고집 때문에 괜히 이 대표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라도 하면 민폐니까요. 그리고 눈물 비 그림 작가가 이은지 양이지요?”
“잘 아시는군요.”
“SNS를 통해서 자주 은지 양이 그린 그림을 봤었거든요. 분명 실력이 있고 특색 있는 젊은 유망주입니다. 크게 성장할 그림 작가가 될 테니 아무쪼록 이 대표님께서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럼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져온 참고 자료들을 주섬주섬 서류 가방에 주워 담고 나갈 채비를 갖추는 순간.
“아직도 동화 작가에 대한 미련이 남아 계십니까?”
“……!”
우석의 말이 이임전을 옭아맸다.
이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가.
놀란 눈동자로 우석을 바라보던 이임전이 쓴웃음을 지었다.
“철저하신 분이시군요. 저에 대해서 조사를 하셨습니까?”
“예.”
“역시…….”
일부러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이력을 조사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가 동화 작가로 활동했다는 과거의 경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한루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에 관해서 굳이 조사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런 점에 대해서 궁금증이 들긴 했다.
그래도 우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는 게 예의상 맞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서서히 입을 열었다.
“미련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눈물 비 연재권을 따내지 못했을 테니 아마 사내에서 이 부장님에 대한 평가와 입지는 더욱 좁아지지 않을까요.”
“허허…… 설마 그런 것까지 조사하신 겁니까?”
“제 정보원은 여러 가지 친 정보들을 조사하는 게 특기거든요.”
“…….”
비록 우석이 이임전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재의 입장 차이는 명확하게 고수되고 있었다.
우석은 갑이고…….
이임전은 을이었다.
상대방이 먼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면,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자가 을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가 갑이 된다.
그것이 갑과 을의 법칙이었다.
여기서 우석이 눈물 비 웹툰 연재 권한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쌀쌀맞게 대한다면,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르는 훗날의 기회를 날려 먹을 가능성도 매우 컸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반드 미디어는 웹툰화를 하기 좋은 원작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웹툰 플랫폼 업체들 측에서 보자면 블루 오션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반드 미디어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달려드는 업체들이 하이에나처럼 많았다.
우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웹툰 업체들 사이에서도 갑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이임전.
모든 게 우석의 말대로였다.
“아마도 잘릴지도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렇다고 이 대표님을 원망하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와 한루를 향해 괜한 동정심을 발휘해 눈물 비를 저희 한루 플랫폼에도 연재하게 된다면 이 대표님의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그것만큼 엄청난 민폐도 없을 겁니다.”
“…….”
동정심.
그건 을이 구사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임전은 굳이 동정심 유발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당당한 을로서 남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깔끔하게 미팅을 끝내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강제 퇴사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설사 눈물 비 웹툰 연재 권한을 따낸다 하더라도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탐욕에 물든 오성태는 분명 이임전에게 그 이상의 성과를 계속적으로 요구할 것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이임전은 그럴 만한 자신이 없었다.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좋은 계약 조건을 웹툰 작가들에게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짜디짠 조건으로 어떻게 해서든 웹툰 작가들을 꼬드겨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는 체계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건 웹툰 작가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좋지 않은 계약 형태였다.
비록 이임전이 웹툰 연재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슷한 분야에 종사했던 그림 작가로서 충분한 성장 가능성을 지닌 젊은 웹툰 작가들을 썩어 가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저…… 자신 혼자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미팅과는 별개로 제 한탄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표님은 분명 좋은 사장님이 되실 겁니다.”
이제는 정말로 작별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회의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우석이 다시 한번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임전 부장님, 혹시 우리 반드 미디어에서 일할 생각 없으십니까?”
“……예?”
순간 얼빠진 표정으로 되묻는 이임전이었다.
* * *
계속되는 미팅.
굳게 닫힌 회의실의 문을 바라보던 철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 미팅을 도대체 몇 시간 동안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임전과 같이 회의실로 들어간 지도 이제 근 2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거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석은 전혀 미팅을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안에서 계속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태준이 PDF 파일을 출력해 무수한 종이들을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뭔가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는 모양인가 보죠.”
“이상하네요…… 분명 우석이 녀석은 한루 쪽에 웹툰 연재를 제공할 생각이 없다고 그랬는데…….”
“대표님은 가끔 저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 이상을 보고 계시니까요. 이번에도 분명 엄청난 것을 구상하고 계실 겁니다.”
“하긴…… 고등학생 때는 안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성인이 되고 나서 이상한 놈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요.”
철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우석이 덕립 인쇄소 생산 공장 안에서 고지식에게 대들던 그 순간을.
그때, 처음 철수는 우석이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을이었다. 그저 주는 돈을 받으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철수뿐만이 아니라 덕립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던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전부 다 비슷한 처지였다.
그러나.
그 무리들 속에서 오로지 단 한 명만이 고지식을 상대로 을답지 않은 배짱을 부렸다.
그게 바로 이우석이었다.
대들기만 했을까. 오히려 고지식에게 갑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며 강한 언질을 늘어놓기까지 했었다.
그때 고지식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보다 더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우석과 고지식, 두 남자의 위치가 역전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우석은 고지식에게 갑으로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고지식이 우석과 철수의 말에 굽실거리며 지었던 그 비굴한 표정. 철수는 그 표정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을의 세계를 깨 버리고 나온 세상.
그곳에는 우석만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여튼 저 녀석을 따라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일 정말 많이 겪게 된다니까요.”
“하하하, 저도 일행이 되었으니 같은 처지가 된 셈인가요?”
“조심하세요, 오 팀장님. 조만간 별의별 일을 다 겪을 겁니다.”
“좋은 쪽의 일들만 생겼으면 좋겠군요.”
아무래도 가정이 있다 보니 직장 정도는 안정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발언이었다.
여하튼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드디어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회의실 밖을 나선 우석.
그를 향해 이임전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 이임전의 표정은 너무나도 판이하게 달랐다.
미팅을 가지기 전에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가축의 표정을 지었으나…….
끝나고 난 뒤에는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을 유지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무실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이임전을 배웅해 준 우석.
그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철수가 모든 사원들을 대표해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거냐.”
“별거 없었어.”
“설마…… 한루 측에 웹툰을 제공하기로 한 거야?”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M 컬쳐 선독점 이후의 계획은 저번 회의 때에도 말했듯이 변함없이 타 플랫폼에 뿌리지 않는 형식으로 갈 거야.”
“그렇다면…… 왜 저 사람이 마치 급한 용무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막 나온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냐?”
“그렇게 티가 많이 났냐.”
“아무래도.”
“흐음.”
이걸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하는 우석이었다.
사실은 이임전에게 반드 미디어 입사 제안을 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 결과를 철수와 태준, 릴리아나에게 당분간 숨기려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숨길 수도 없겠다고 판단한 나머지 직접 회의실에 있었던 내용을 짧게 압축해 들려줬다.
“이임전 부장이 조만간 우리 반드 미디어 식구로 합류하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