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질의 신-96화 (96/201)

갑질의 신 96화

32. 을의 갈등(2)

“…….”

말없이 어느 한 건물을 올려다보는 이임전.

그의 양어깨가 오늘따라 유독 무거워 보였다.

부담감이란 이름의 보이지 않는 짐이 그를 짓누르는 듯했지만, 이임전은 굴하지 않고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목표로 삼을 곳은 바로…….

반드 미디어 사무실!

평수가 넓은 일반 주택 건물을 사무실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회사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가정집 주택 같은 느낌이 가장 먼저 와 닿았다.

‘하긴…… 돈 많이 버는 소규모 회사들은 대부분 이런 식의 보금자리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지.’

기획팀 부장으로서 여기저기 영업을 뛰어다니다 보니 그간 많은 업체들과 접선을 펼칠 기회도 잦았다.

그래서 이임전은 회사 건물의 겉모습만 보고 업체를 판단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었다.

소규모 출판사라고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웬만한 중견급 출판사보다도 더 많은 매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터라 계단을 통해서 사무실이 있는 위치까지 올라갔다.

몇 층 안 올라갔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거친 호흡이 입에서 절로 새어 나왔다.

‘평소 운동 좀 해둘걸……!’

설마 업체 미팅을 하러 가는 데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어쨌든 겨우겨우 부족한 체력을 이끌고 도착한 반드 미디어 사무실 앞.

“후!”

짧은 숨을 내쉰 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전체적으로 옷차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넥타이는 제대로 조여져 있는지.

단추는 제대로 잠가져 있는지.

전신 거울이 없는 탓에 일일이 직접 눈으로 다 확인을 한 뒤에서야 반드 미디어 사무실 현관문 근처에 놓인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짧고 경쾌한 벨소리가 내부에서부터 들려 나왔다.

그와 동시에 안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연락드렸습니다만…… 한루에서 온 기획팀 부장, 이임전이라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윽고 안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그사이에 이임전은 다시 한번 자신의 복장을 체크했다. 중요한 미팅 건수인 만큼 세심한 곳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번 건수를 놓친다면…… 아마 이임전은 더 이상 한루에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동화 작가로서의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선택한 이 분야에서 실패만 거듭하게 될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물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따내야 한다!’

물론 여건 자체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자는 일념을 가지며 천천히 열리는 현관문을 응시했다.

그 순간.

“……!”

이임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사람은…….

동양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동떨어진 외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 금발과 푸른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에 모델 체형을 지닌 아리따운 여성이 이임전 앞에 강림한 것이다.

처음에는 천사가 아닐까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성의 다음 이어지는 목소리에 이내 정신을 번뜩 차리게 되었다.

“이임전 부장님이라고 하셨죠?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오세요.”

“예!”

드디어 소문만 무성하던 젊은 사장, 이우석과의 대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반드 미디어 사무실 내부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한 이임전.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맞이해 주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교적 평범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남자.

그러나.

그에게서 풍겨 오는 아우라는 평범 이상의 것이었다.

‘이 사람이 그 이우석이란 남자인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바로 최근 웹툰 업계를 들끓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 이우석 대표였다.

* * *

이임전과 대면한 순간, 그의 첫인상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을 선보이고 있었다.

조급하고, 그리고 평정심이 흐트러져 있는 감정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과연…….’

우석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이임전의 현재 심정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뜨거운 감자라 불리고 있는 눈물 비.

아마도 이임전은 윗선으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살릴 방도를 찾아오라는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활로를 뚫기 위해 선택한 게 바로 우석과 반드 미디어였다.

그가 불쌍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우석은 결코 동정심만으로 그에게 눈물 비 연재 권한을 넘겨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예.”

회의실로 사용되는 방으로 향하던 도중, 이임전이 슬며시 반드 미디어 내부 사무실을 눈으로 훑어봤다.

직원이라고 해봤자 철수와 태준, 그리고 릴리아나. 세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빈 책상이 하나 있긴 했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아서는 최근 어느 한 인물이 퇴사를 했거나 아니면 새로운 직원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게 아닐까 추정되었다.

회의실에 놓여 있는 의자를 가리킨 우석이 착석을 제안했다.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딱딱한 표정을 최대한 풀기 위해 노력하며 우석의 말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첫인상에서부터 엄청난 위압감을 선보였던 릴리아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음료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간단하게 물 한 잔이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릴리아나가 바깥으로 나간 사이에, 이임전이 먼저 입을 열며 대화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무실이 비교적 번잡하지 않고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별로 하고 있는 게 없어서 그렇게 보일 뿐이겠지요.”

“하하하,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듣자 하니 웹소설 분야에서는 거의 매출 1, 2위를 다투고 계신다던데…… 최근에는 웹툰 쪽에도 진출을 꾀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렇긴 하지요.”

무덤덤하게 이임전의 말을 받아 줬다.

이런 사소한 대화 한 마디 한 마디에도 미묘한 심리전이 오고 갔다.

그렇기 때문에 우석은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편, 이야기를 먼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던 이임전이 속으로 작은 탄식을 토해 냈다.

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도통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대단하군…….’

이임전이 비록 윗선에서 무능력하다는 욕을 매번 먹고 있지만, 그래도 영업 분야에선 10여 년 가까이 일해 왔다.

베테랑 축에 속하는 그였지만, 우석처럼 초반부터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는 남자는 보기 드물었다.

게다가 그의 나이가 20대라는 것을 가정한다면……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면모가 아닐까 싶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어.’

나름 각오는 하고 왔지만, 그래도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 줄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반드 미디어 사무실의 인테리어 여부가 아니었다.

똑똑.

회의실 문을 열고 쟁반을 든 채 다시 등장한 릴리아나가 가져온 음료들을 각각 앞에 놓아줬다.

이임전 앞에는 맹물을.

그리고 우석의 앞에는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회의실 바깥을 나서는 릴리아나.

한동안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임전이 사소한 질문을 들려줬다.

“방금 그분은…… 외국인이십니까?”

“그런 셈이지요.”

“한국말을 굉장히 잘하시는군요. 놀랐습니다.”

“저도 가끔 놀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냥 무성의하게 이임전의 말을 받아 줬을 뿐.

시답지 않은 전초전을 오래 끄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임전이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물론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간단한 일입니다. 눈물 비 웹툰의 연재 여부지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일 듯하군요.”

“하하,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M 컬쳐의 선독점 기간이 끝나고 난 이후, 한루에서도 눈물 비를 연재해 달라는 말을 하고자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독점으로 달라는 말까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저희 사이트 측에 연재하게끔만 해주셔도 됩니다.”

“독점을 노리지 않는다라……. 의외군요. 전 필히 독점을 내걸고 미팅을 진행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저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잠시 말을 멈춘 이임전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희 회사 조건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닙니다. 혹시 이 대표님께서도 저희 한루가 어떤 플랫폼인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업계 내에서도 소위 말해서 ‘짜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 업체 중 한 곳이기도 하죠.”

“그렇군요.”

우석은 이 미팅이 성사되기 전, 아이티로부터 한루에 관한 정보란 정보는 깡그리 다 긁어모아 자료로 정리해서 보내 달라는 지시를 내려 뒀었다.

그리고 이틀 전 아이티가 조사한 자료들을 건네받은 뒤, 그 자료들을 살펴보는 동안 우석은 절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계약 조건이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명성을 잃은 이유가 있었군.’

만약 우석이 한루의 대표였다면, 우선적으로 웹툰의 재미와 퀄리티를 올리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을 것이다.

콘텐츠 싸움은 결국 해당 콘텐츠의 양과 질이 가장 중요한 무기로 작용한다.

제대로 무기를 갖추지 못한 채 좁디좁은 대한민국 시장을 노리게 된다면, 경쟁자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너덜너덜해질 뿐이다.

싸움을 하려면 튼튼한 무기와 방어구 정도는 갖춰야 그래도 할 만한 싸움을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루는 그러지 않았다.

매출 하락의 본질적인 부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것이다.

“웹툰 작가들에게 좀 더 투자를 한다면 분명 나아질 텐데요.”

우석이 은근슬쩍 대안을 제시해 봤다.

실제로 한루가 보유하고 있었던 굵직한 웹툰 작가들은 이미 거의 한루를 떠나 지금은 다른 플랫폼에서 웹툰 연재를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한루는 작가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은 반면, 타 플랫폼들은 웹툰 작가들의 명성에 어울리게끔 제대로 된 대접을 해줬다.

사람과 사람의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 아니겠는가.

출판사는 믿지 못하지만, 출판사가 주는 돈은 믿는다.

결국 돈이라는 형태로 신뢰의 증거를 보여 준다면, 작가들은 대부분 받은 대우만큼 보상을 해주는 편이었다.

한루가 최근 많은 약세를 보이고 있는 게 이 부분에 관한 문제 때문이었다.

우석의 말을 듣자마자 이임전이 짧은 시간 동안 약한 소리를 들려줬다.

“기획팀 부장직을 달고 있지만, 제 발언권은 많이 약한 편이거든요.”

“영업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 발언권이 약하다니…… 의외로군요.”

“저희 대표님이 고집이 좀 많이 셉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독불장군 스타일의 사업주도 많이 있는 편이었다.

물론 그런 스타일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강점도 많았다. 하지만 동시에 단점도 치명적이다.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한루의 대표인 오성태는 딱 그런 타입이었다.

그래도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더 이상의 약한 소리는 접어 두기로 결심한 이임전이 우석을 응시했다.

“저희가 계약 조건 자체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대표님께 어필해서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희 플랫폼에도 눈물 비를 연재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직설적인 이임전의 제안.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그였으나.

우석이 그에게 들려줄 대답은 딱 한 마디뿐이었다.

“그건 안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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