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94화
31. 경쟁(3)
눈물 비 웹툰 연재를 노리고 전화를 걸어온 이임전.
그가 슬며시 통화를 시도한 목적에 대해 언급했다.
-최근 눈물 비 웹툰을 M 컬쳐에서 연재하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소문이 여기저기 퍼졌나 보군요.”
-요즘 거의 모든 웹툰 플랫폼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는 곳이 바로 반드 미디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물론 이임전이 말해 주지 않아도 우석 또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 비 웹툰 관련으로 전화가 수십 통씩 걸려 오는데,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있을까.
천만에.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웹툰 제작 외주라면 이미 저희가 자체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으니 굳이 따내려고 노력하실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만.”
-하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전화를 해왔다.
무엇을 노리는 걸까.
우석의 머릿속에서 이임전이 원하는 노림수가 무엇인지 그 후보를 추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머지않아…….
우석이 생각한 그것이 이임전의 입을 통해서 들려왔다.
-눈물 비 웹툰을 저희 한루 쪽에도 연재를 해주셨으면 하고 전화를 드려봤습니다.
역시나 우석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독점으로 M 컬쳐에서 연재될 예정인데…… 죄송합니다만, 다른 플랫폼에서는 연재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독점이라는 것까지도 풍문으로 들었거든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 생각입니다만…… 눈물 비가 M 컬쳐에 평생 독점으로 연재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
-선독점의 개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이렇게 전화를 드려봤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선독점 기간이 끝난 이후에 다른 플랫폼들에 웹툰을 뿌릴 때, 저희 한루를 우선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임전 부장의 말 때문일까.
우석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괜찮은 안목을 가졌군.’
반드 미디어가 웹소설 플랫폼을 서비스화할 때, 기본적으로 프로모션을 받기 위해서 주로 선독점을 내걸고 연재를 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눈물 비의 경우에는 굳이 선독점을 걸지 않았어도 M 컬쳐에서 어떻게 해서든 눈물 비를 데려오기 위해 해 줄 수 있는 프로모션은 죄다 걸어 주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이 M 컬쳐에게 선독점 계약을 제시한 건 다름이 아닌 앞으로의 사업적 관계 때문이었다.
도한수는 착실히 갑을 대하는 을로서 우석에게 많은 것을 제시하고 그만큼 대우를 해줬다.
그렇다면 갑 역시 을에게 그만한 보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구태여 선독점이 아니어도 된다는 도한수의 말에도 반드 미디어는 눈물 비 웹툰을 M 컬쳐에게 선독점으로 걸어 줬다.
물론 그때 당시, 도한수의 기뻐하는 표정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독점은 없는 법.
최종적으로 조율을 한 끝에 3개월 동안만 선독점으로 계약을 한 다음, 그 이후부터는 다른 플랫폼에도 연재를 할 수 있는 형태로 계약을 맺었다.
이임전이 노리고 있는 게 바로 그 점이었다.
“한루에 연재를 하게 될 경우, 저희가 가지게 되는 메리트가 뭐가 있을지 듣고 싶군요.”
-직접 만나서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시간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회사 쪽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라……. 그렇다면 이번 주 금요일이 어떻겠습니까?”
예상외로 이른 시일이 잡힌 탓일까.
수화기 너머로 작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너무 빠르십니까?”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이름하야 선점 효과라고 할까.
다른 업체들이 M 컬쳐 선독점 이후의 연재 권한을 놓고 달려들기 전에, 선점을 해두는 편이 좋았다. 경쟁이 붙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그럼 아무쪼록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 주소는 제가 따로 알려 드리도록 하지요.”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하겠습니다.
이임전과의 통화를 마친 뒤.
“…….”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경쟁이라…….”
한루의 입장에선 아마 피가 마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루에게 동정심이 발생해 그쪽에 눈물 비 추가 연재 권한을 독점으로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돈 앞에 동정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다 쓸모없는 감정에 불과했다.
우석은 그걸 잘 알고 있기에 한루 측에서 어떤 제안을 해 올지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 * *
하루 업무를 마쳐 가는 도중.
우석의 스마트폰을 통해 익숙한 번호가 통화를 걸어왔다.
액정 화면에 뜨는 그리운 이름.
“지혜 씨인가…….”
한창 LC 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으로 가수 준비를 하고 있을 지혜가 우석에게 전화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오랜만에 듣는 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우석 씨?
“네, 접니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거나 하는 건 아닐지 걱정했어요.
“하하하, 번호가 바뀌어도 연락처에 따로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한테는 연락을 주는 편이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것보다도 무슨 일이신지.”
단순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기보다는 뭔가 용무가 있다는 어투가 말 속에 묻어나왔다.
우석의 예상에 지혜가 전화를 건 목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실 수 있나 싶어서요.
“식사라…….”
-바쁘시다면 나중에 시간을 따로 내서 날을 잡으셔도 돼요…… 죄송해요.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갑작스럽죠?
“아닙니다. 때마침 오늘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군요. 밥 먹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건너편에서 지혜의 작은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계신가요? 제가 마중 나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부천역으로 갈게요. 어차피 집도 그 근처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1시간 뒤에 부천역에서 뵙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다시 내려놓자, 의도치 않게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철수가 질문을 건네 왔다.
“지혜 씨 전화야?”
“어…… 그런 거 같다.”
“무슨 일로? 듣자 하니…… 저녁 약속 잡던 거 같던데.”
“네 말대로다. 1시간 뒤에 부천역에서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하더군.”
“이 자식…… 여복이 철철 넘쳐 흐르는구만.”
“여복이라…….”
레디너스 대륙에 있었을 당시, 우석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손에 쥔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미인이란 미인도 자연스럽게 그의 주변을 향해 몰려들었다.
남자는 곧 능력이다.
능력 있는 남자는 여자들이 몰리기 마련.
덕분에 우석은 레디너스 대륙 역사상 이성에게 가장 많은 호감을 산 남자로도 기록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와서도 적지 않은 여복을 누리는 중이었다.
대놓고 관심을 표명하는 화염룡뿐만이 아니라 릴리아나, 그리고 오늘 우석에게 저녁 약속을 신청한 지혜까지.
“주변에 여자가 널렸는데 여자 친구라도 한 명 만들어 두는 게 어떻냐?”
철수가 시기와 질투심, 그리고 부러움을 담은 발언을 그에게 들려줬다.
그러나 우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지금은 연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냐.”
“어쭈, 이것 봐라. 일하면서 연애도 할 수 있지. 안 그러냐?”
“…….”
이번에는 철수의 말이 맞았다.
사실 일 때문에 연애를 뒤로 미루는 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핵심을 정확하게 찌른 철수 때문에 우석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러나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우선 네 그 교정 교열 업무부터 신경 써서 봐라. 후에 들어올 신입 사원들한테 뒤처지거나 그러면 선배로서 체면이 구겨지지 않겠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는데…… 네가 아픈 곳을 찌르는구나.”
“괴롭히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경각심을 가지라는 뜻이지.”
“알았다, 알았다고.”
철수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내쉬어졌다.
사무실에는 철수와 우석뿐.
태준은 오늘 아내 생일이라는 이유로 칼퇴근을 하게 되었고, 릴리아나는 주기적으로 소봉예화와 은지가 작업을 잘하고 있는지 집까지 가서 확인을 해야 했기에 먼저 퇴근길을 서둘렀다.
“너도 후딱 하고 퇴근해라.”
“이봐, 친구. 설마 나 혼자 남겨 두고 퇴근할 생각이야?”
“그러고 싶지만, 지혜 씨 만나기까지 1시간이라는 잔여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같이 있어 주마.”
“매정하구만.”
지혜와의 약속이 없었다면 진작 집에 갔을 거란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우석의 말에 철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면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 *
[이번 역은 부천역, 부천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안내 방송에 따라 전철에서 내린 한 명의 아리따운 여성.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지혜가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거울을 꺼내 끊임없이 자신의 화장을 체크했다.
화장이 너무 붕 뜨지는 않았는지, 혹은 속눈썹이 빠지진 않았는지.
상세하고 세밀하게 상태를 체크하는 동안, 에스컬레이터가 그녀를 2층으로 바래다줬다.
“아앗?”
순간적으로 에스컬레이터 입구에서 넘어질 뻔했지만, 겨우 무게중심을 잡고 개찰구로 들어섰다.
매번 댄스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 반사 신경을 키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을 주게 되었다.
“위험했어…….”
자칫 잘못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아슬아슬한 상황을 모면한 탓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지혜.
약속한 시각까지 이제 채 5분이 남지 않았다.
“한 번 더 체크해야지…….”
이번에는 개찰구 근처 벽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 앞에 마주 섰다.
회사에서 샤워를 마치고 화장을 하는 데까지 꽤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그 덕분일까.
아마 지금의 화장이 지혜의 꾸미기 역사상 가장 완벽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그러나 여자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지혜의 눈에는 여전히 자신의 화장이 허술해 보였다.
그래도 이제 와서 화장을 다시 뜯어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곧 있으면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석과의 재회를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좋았어!”
전신 거울 앞에서 최종적으로 옷매무새까지 다듬은 뒤.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왼쪽 손목에 차여진 손목시계로 현재 시간까지 파악을 해 봤다.
약속 시각까지 1분을 앞둔 상황에서.
“지혜 씨, 여기입니다.”
그리운 목소리가 지혜의 귓가에 들려왔다.
이우석.
그녀의 은인임과 동시에…….
연모의 대상.
걸음을 재촉해 우석에게 다가간 지혜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저도 방금 시간 맞춰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약속 시각에 제때 맞춰 만난 두 사람이었지만, 지혜는 혹여 우석이 자신보다 먼저 나와 오랫동안 이곳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기다린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내심 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무수한 사람들의 향연.
그 속에서 우석이 자리 이동을 제안했다.
“일단 좀 걸어볼까요?”
“아…… 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지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석의 옆에 나란히 섰다.
오랜만에 즐기는 우석과의 데이트.
지금 이 순간, 지혜는 여느 때보다도 설렘에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