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92화
31. 경쟁(1)
화염룡의 제안은 우석에게 있어서 사실 약간 놀랄 만한 여지를 남겨 두게 했다.
비록 화염룡이 이 콘텐츠 사업 분야에서 우석을 도와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일에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화염룡의 건의를 받은 우석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합숙의 취지가 뭐지?”
“뭐긴. 원활한 웹툰 작업의 진행 아니겠어?”
“은지 양과 같이 합숙하면서 작업하면 일의 진행이 좀 더 쉬워진다는 뜻인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또 다른 나와 이야기도 해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
외부로 나올 때…… 다시 말하자면 오늘처럼 미팅이 있거나, 아니면 저번에 우석과 같이 참고 자료를 사기 위해 서점을 나갈 때 등등.
외향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소봉예화가 아닌 화염룡의 인격이 그녀의 몸을 차지했다.
기획 회의에는 화염룡이 참가를 했지만…….
사실 눈물 비를 집필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봉예화였다.
화염룡과는 이미 여러 차례 만남을 가져 본 은지였으나, 소봉예화와 만난 적은 사실상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화염룡 씨의 또 다른 인격이라는 그분이시죠?”
은지가 릴리아나를 통해 들은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네, 맞아요.”
“어떤 분이세요?”
호기심에 가득 찬 눈동자로 화염룡에게 물어왔다.
하나, 들려줄 대답이라고는 단 한마디밖에 없었다.
“중2병 괴짜예요.”
“중2병……?”
“직접 만나보면 알아요. 그리고 아마 원작자와 대면하며 이야기를 나눠 보는 편이 은지 씨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
오리지널이 아닌 원작을 가지고 웹툰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원작자와의 이야기도 분명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기도 했다.
화염룡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지 씨만 괜찮다면…… 나쁘진 않겠군.”
소봉예화의 성격이 괴팍하긴 하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화염룡의 말대로 정말 의외의 면에서 은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우석의 여동생인 연주도 소봉예화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녀가 뭔가 실마리 역할을 할 수 있을 터.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은지 쪽으로 향했다.
은지 역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화염룡 씨라든지 소봉예화 씨만 괜찮다면야…… 오히려 제 쪽에서 먼저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렇다면 결정이군요. 릴리아나, 일정을 다시 짜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눈물 비 웹툰화팀의 본격적인 작업 준비가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 * *
여기저기 업체들과 바쁘게 미팅을 하고 다니기 시작하는 우석.
눈물 비 작업도 작업이지만, 또 다른 일거리를 해결해야 했었다.
“우석아, 저번에 올린 구인 공고 있잖아. 그거 이력서들 도착했는데 한번 볼래?”
때마침 우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철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점점 사업을 확장함과 동시에 반드 미디어 또한 자연스럽게 인력을 충원해야 했다.
저번에 릴리아나가 공고를 올렸던 게 기간이 끝난 모양인지, 철수의 손에 다수의 이력서들이 출력된 채로 우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겠지.”
“바쁘면 나하고 오 팀장님이 대신하고.”
“아니, 이건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넌 오 팀장하고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매진해.”
“그래, 알았다.”
혹시나 우석이 너무 바빠서 이력서를 다 못 볼까 봐 나름 배려를 해 본 철수였으나.
우석은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철수의 친절을 거절했다.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돈, 그리고 사람이다.
우석의 밑에서 일할 사람은 우석의 손으로 직접 뽑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참된 인재를 뽑아야 사업을 함에 있어서 보다 편하게 일을 진행하는 게 가능하다.
“으음…….”
책상 위에 다수의 이력서들을 올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200여 장이 넘어갔다.
이제 막 자리를 잡은 신생 중소기업치고는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지원율이기도 했다.
하기야, 우석이 내건 연봉 조건 자체도 나름 괜찮았다. 아마도 이 지원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구인 광고에 걸린 연봉이 아닐까 싶었다.
샐러리맨에게 있어서 월급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어디 보자…….”
하나하나씩 이력서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하는 우석.
오늘도 집에 일찍 들어가기는 다 틀린 듯했다.
* * *
웹툰 연재 플랫폼 중 하나인 한루.
그곳의 기획팀에서 부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이임전은 오늘도 담배에 불을 붙이며 깊은 한숨을 토로하고 있었다.
“거참…… 세상 살기 참으로 빡세네.”
옥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담배 연기를 싣고서 이동했다.
때마침 흡연을 위해 올라온 타 부서 직원이 이임전을 바라보자마자 대화를 시도해 왔다.
“이 부장님, 괜찮으십니까?”
“뭐가.”
“듣자 하니 오늘 대표님한테 엄청 깨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냐.”
임전의 얼굴에 썩은 웃음이 새겨졌다.
“그래, 잔뜩 깨지고 왔지. 괜찮은 콘텐츠 좀 가져오라고 대표님께서 하도 난리를 피우시니…… 내 입장에서는 뭐라 할 말이 있겠냐.”
“하하…… 그렇긴 하네요.”
최근 웹툰을 비롯해 웹소설 등 콘텐츠 사업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덕분에 회사 대표를 비롯해 위에서 원하는 이상향은 한없이 다급하고 높아졌다.
간부들의 재촉이 많을수록 괴로워지는 건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었다.
“나도 좋은 건수 찾아내고 싶지. 하지만 안 보이는 걸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하하, 요즘은 웬만한 그림 작가들은 다른 업체들이 싹 쓸어가고 있는 추세니까요.”
“얼마 전에 코믹 카니발까지 갔다 왔었는데…… 괜찮은 사람들은 전부 다 어디 한 곳이랑 계약해서 웹툰 준비하고 있더라.”
“우와…… 빠르네요.”
주말에 혹시나 해서 코믹 카니발까지 들러 봤던 이임전.
사실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러 주말이라는 황금 휴식 시간까지 소비해 가며 가 봤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하아, 나도 조만간 잘리는 거 아닐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 부장님 안 계시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나요.”
“뭐…… 알아서 잘 돌아가겠지.”
“사모님하고 애들은 어떻게 하고요?”
“…….”
이임전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퇴사라는 선택지 자체를 고르기가 힘들었다.
“……내가 그림 작가로서 대박을 쳤다면…… 이렇게 체질에도 맞지 않는 영업을 뛰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때 이임전의 꿈이기도 했던 그림 작가.
그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동화를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생계 때문에 샐러리맨이 되었다.
꿈을 버리고 현실을 선택한 그.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매번 그렇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지만…….
‘아니, 이제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어차피 이제 와서 동화 작가가 될 수도 없을 테니까.’
이미 너무 많이 왔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꾹 참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대한민국 가장의 현실이니까.
* * *
빠르게 이력서를 훑어보던 우석이 20여 개의 이력서를 따로 책상 구석에 올려놓았다.
때마침 기획 회의를 마치고 방에서 나오는 릴리아나를 목격한 우석이 그녀를 호출했다.
“릴리아나.”
“예, 우석 님. 무슨 일이신가요?”
곧장 우석에게 다가가 용무를 물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지만, 릴리아나는 우석을 딱히 꺼려 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어제 우석에게 고백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우석은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재차 말을 이어 갔다.
“여기에 있는 이 지원자들에게 연락 돌리도록.”
“서류 전형 합격자들인가요?”
“그래.”
“네,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석의 결정이라면 군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세계의 주인이니까.
누가 감이 우석에게 대든단 말인가.
이력서를 들고서 자신의 책상 앞으로 향하는 릴리아나.
그녀의 뒤를 따라 회의실에서 나온 화염룡이 은지와 함께 우석에게 다가왔다.
“그럼 우석 오빠, 바로 합숙 준비 들어갈게.”
“오늘부터 시작할 건가?”
“응. 빠르면 빠를수록 좋잖아? 아, 물론 결혼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고 하던데.”
“이상한 소리 말고, 짐 옮길 거리면 남서진을 데리고 가라.”
“남서진?”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오자 화염룡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갑자기 남서진은 왜 언급하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표정까지 함께 묻자, 우석이 곧장 그 해답을 들려줬다.
“짐꾼으로라도 써먹어야지.”
“아하…….”
어떻게든 남서진이라는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선 다방면으로 그를 써먹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운전면허도 가지고 있으니, 굳이 개인 이삿짐센터를 부를 필요 없이 회사 공용 차량을 가지고도 은지의 짐을 옮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끝나고 난 이후에 연락하도록.”
“오케이~”
상큼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은지와 함께 사무실을 벗어나는 화염룡이었다.
릴리아나에게는 주기적으로 소봉예화의 집을 들락날락거리며 원고 진행 상황도 체크해 달라는 말을 전해 뒀다.
이제 남은 것은 눈물 비 웹툰 작업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최근 웹툰 독점관을 유치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중인 도한수.
신발이 다 낡아 떨어질 정도로 고생에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한수의 일에 대한 열정은 그칠 줄 몰랐다.
오늘도 미팅이 있어서 잠시 홍대입구역 근처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다.
평일 오후인지라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한적한 카페를 잡아 미팅을 진행하는 중인 도한수를 향해 2명의 남자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도 이사님만 믿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저희 회사를 위해 힘 좀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책상에 올라오는 흰색의 봉투.
딱 봐도 두툼해 보이는 것이…… 안 좋은 물건이 들어 있을 법한 냄새를 자아냈다.
“이건…….”
“성의를 담아 좀 챙겨 넣었습니다.”
도한수와 미팅을 가지게 된 작은 콘텐츠 회사의 대표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면서 그들만의 성의를 표현했다.
도한수도 눈치가 전혀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소위 말해서 뒷돈이었다.
“이건 좀…….”
“하하, 그냥 저희의 자그마한 성의일 뿐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
“자자,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얼른 챙기시지요.”
남자가 도한수의 호주머니 안으로 봉투를 찔러 넣어 주려고 했지만.
도한수는 정중하게 그의 성의를 거절했다.
“미안합니다. 사내 분위기가 최대한 이런 뒷돈 같은 건 받지 말라는 식으로 워낙 강조를 하다 보니…… 괜히 돈 한 번 잘못 받았다가 모가지가 되긴 싫군요.”
“……그,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성의는 잘 알았으니, 일단 넣어두세요.”
“…….”
일순간 당황한 나머지 두 남자의 이마에 식은 땀방울이 맺혔다. 설마 한수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도한수도 살짝 흔들리긴 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최근 이런 식으로 뒷돈을 받아 챙긴 덕분에 부서 한 팀이 깡그리 다 물갈이가 된 사건이 벌어졌던 적이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자제를 하는 편이었다.
어떻게 차지하게 된 이사직인데 푼돈 한 번 받았다고 잘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이런 식으로 기분 좋은 청탁이 들어오는 건 갑으로서 느낄 수 있는 고유 권한이긴 하지만…….
‘……회사의 노예인 내가 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만.’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을 삼키는 도한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