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85화
26. 본보기(3)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M 컬쳐 콘텐츠 기획팀 사무실.
그리 큰 공간을 지닌 회의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3명의 남자들만 차지하기에는 공간이 많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휑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3명의 열의 때문에 꽉 찬 아우라를 선사해 주기 시작한다.
도한수의 말에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구민조.
‘메인 연재관을 첫 타자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만큼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 아직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일단 첫 스타트는 무조건 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지고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지.’
그걸 위해서라도 이번 첫 메인 연재관 자리는 결코 양보해선 안 된다.
게다가 상대는 햇병아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우석이다.
그에게 이번 경합에서 패하게 된다면, 그간 장르문학 내에서 10년 이상 구르던 자신의 이력에 손상이 가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민조는 아직 우석이 어떤 자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반드 미디어는 웹툰 준비를 하고 있는 회사일 뿐이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웹툰 분야에 진출하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구민조는 반드 미디어라는 회사를 잘 들어보지 못했다.
처음 우석이 ‘반드 미디어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당시, 구민조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회사를 만들고 나서 대표라는 직함을 달고 있으니…….
구민조에게는 그런 행동이 너무나도 하찮게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은 침착하게 한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사실 우석은 이미 한 번 설명을 들었던 적이 있는 내용들이다.
그래도 최대한 구민조가 우석이 만든 이 특별 몰래카메라 현장을 눈치채지 못하게끔 일부러 연기 상태를 유지한다.
한편, 모든 할 말이 끝난 모양인지 한수가 드디어 두 사람에게 발언권을 넘겨준다.
“우선은…… 각자 어떤 콘텐츠를 저희에게 주실 수 있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만.”
계약금이라든지 금액적인 부분은 이들의 콘텐츠를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겠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콘텐츠의 퀄리티보다 오로지 계약금에만 신경을 쓰는 구민조로선 그다지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구민조는 을이고 도한수는 갑이다.
선택권이 있는 건 을이 아닌 갑이기에 그의 말에 우선적으로 따르고자 먼저 입을 연다.
“저희는…… 최근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신인 작가를 한 명 보유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누구지요?”
“아인트라고 해서, 온라인 상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그림 작가이기도 합니다. 각종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그림도 자주 올리기도 하고, 실제로 반응 또한 좋지요. 한 번 그림을 올렸다 하면 기본 조회수 5만 이상은 늘 찍습니다.”
“5만이라…….”
물론 어디까지나 정식 연재 형태의 웹툰이 아닌, 그저 낙서 형식으로 올린 거기 때문에 사실 조회수로 놀랄 만한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아인트는 도한수도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 작가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겁니까?”
계약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도한수.
그러자 구민조가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서면으로 작성하진 않았지만, 일단 구두로는 저와 같이 작품 하나를 기획해 보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구두라고요?”
“네.”
“…….”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석이 자연스럽게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계약서에 도장이나 사인을 한 것도 아니고, 구두만으로 이야기가 오고 간 것뿐인데 그걸 마치 계약을 맺은 것처럼 부풀려 이야기를 하다니…… 나중에 계약상의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뭐야?!”
구민조의 얼굴이 대놓고 일그러진다.
대뜸 화를 내는 그에게 도한수가 다시금 낮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한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상호간의 예의 정도는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크흠…….”
“그리고 저 또한 이 대표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구두상으로만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으로 계약을 맺었다고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작가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니 계약 정도야 금방…….”
“그렇다면 구두가 아닌 서면상의 계약서를 만들어 와주세요.”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아인트라는 카드를 꺼내 기선을 제압하려 했지만, 되려 반격만 진탕 허용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우석이 드디어 첫 타자를 꺼내는 순간이다.
“저희는 네이민 작가의 차기작을 일단 넣어볼 생각입니다.”
“네이민이라면……!”
구민조가 모를 리가 없다.
K 로지에서 웹툰을 연재하고 있는 작가다.
전반적으로 K 로지의 웹툰관 자체가 좋지 않은 조회수를 자랑하고 있긴 하지만, 그 와중에 유독 단 한 작품만이 압도적인 조회수를 선보이며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게 바로 네이민 작가의 ‘그 사람과’라는 웹툰이다.
첫 웹툰작임에도 불구하고 K 로지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웹툰 불모지라는 K 로지에서 그만한 성과를 거뒀다는 건 다시 말해서 그녀의 스토리 구상 능력이라든지 연출, 그림체 등이 일반 대중들에게 제대로 먹힐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과 같다.
덕분에 다수의 웹툰 연재 플랫폼 사이트에서 그녀와 접선을 펼치기 위해 사방에서 노력을 해왔지만.
최근에 그녀가 어느 알려지지 않은 신생 매니지먼트와 계약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다.
‘설마 그곳이 반드 미디어일 줄이야……!’
구민조의 표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첫 웹툰 작가 후보진부터 강력한 존재가 언급된 것이다.
게다가 아마추어도 아닌 프로다!
‘반드 미디어, 반드 미디어라…….’
머릿속으로 반드 미디어에 관한 정보를 추슬러 본다.
얼핏 지나가면서 들었던 사실, 혹은 정보 등을 취합해 보지만…….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웹툰 쪽은 아직까지 반드 미디어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알고 있는 게 더 신기하다 할 정도다.
“네이민이라…… 확실히 인지도도 괜찮고 좋지요.”
도한수 또한 긍정적으로 우석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우석이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이 한마디를 더 보탠다.
“저희는 참고로 구두가 아닌 서면 계약을 합니다.”
“하하하. 예, 알고 있습니다.”
한수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계약이라는 분야에서만큼은 우석보다 철저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미 우석과 같이 일해오면서 지겹도록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다.
“구민조 씨 측은 다른 작가분 없습니까?”
“그럼…… 드리미오 작가는 어떻습니까.”
“드리미오?”
“예. 아직 온라인에선 별다른 활동을 하고 있진 않습니다만, 일본에서 만화학과에 다니면서 그림 실력을 키워온 유망주입니다. 그림체가 어떠하냐면…….”
패드를 꺼내서 도한수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순간.
우석이 이들 사이의 대화에 참전을 선언한다.
“그렇다면 저희는 네이민 작가의 차기작에 이어서 테인 작가까지 제안해보도록 하지요.”
“테인 작가라면…… 호, 혹시 일본에서 활동 중인 프로 작가분 아니십니까?!”
도한수의 동공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한다.
“잘 아시는군요.”
“세상에……!”
테인 작가는 일본 주간 만화 연재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로 작가다.
‘그들의 곁에서’라는 스포츠 만화를 연재하고 있으며, 역동적인 그림체뿐만 아니라 소년 만화의 정석적인 요소를 잘 깔고 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평타 이상의 성적은 꾸준히 내고 있다.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만화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도대체…… 어떻게 계약을 따낸 겁니까?”
“그냥 좀 아는 사람을 통해서 따냈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연재 플랫폼 입장에선 테인 작가가 웹툰을 연재해 준다면야 오히려 황송할 따름이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그의 만화가 애니메이션화가 된다는 발표까지 남으로 인해 더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다.
서브 컬쳐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미디어라고 한다면 바로 영상매체, 즉 애니매이션(Animation)이다.
만약 테인의 웹툰이 M 컬쳐에 연재된다면, 애니메이션 방영 시기와 딱 맞물리게 되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네이민 작가에 이어 테인 작가까지.
연타석 홈런을 쳐내는 우석의 말에 이미 도한수의 마음은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그 와중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저 새끼가 어떻게 그런 거물급들과……!’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결국 있는 카드, 없는 카드를 전부 다 쏟아붓기로 결심한 구민조가 마지막 필살기를 제시한다.
“그, 그렇다면 저희는 이은지 작가를…….”
“이은지 작가라면 구민조 씨로부터 성추행, 협박을 당하고 있는 피해자 아닙니까.”
“……!!!”
구민조가 놀란 눈으로 우석을 바라본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모르는 게 이상할지도…….’
구민조가 코믹 카니발에 직접 찾아가 행패를 부렸을 당시.
우석은 그녀의 부스에서 앉은 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지와 아는 사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근황을 모를 리가 없을 터.
‘젠장……!!’
제대로 걸려들었다.
함정수사에 걸린 범죄자가 이런 기분일까.
한편, 이은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우석의 말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웹툰 작가로 데뷔시켜 준다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순진한 그림 작가 꼬드겨서 성추행이나 일삼다니…… 그게 콘텐츠 기획자로서 할 일입니까?”
“그건…….”
“그 어떠한 말을 내뱉는다 하더라도 핑계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겁니다. 정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경찰서에 가서 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겨, 경찰서……?!”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단어가 나오고 말았다.
내심 구민조는 은지의 고발로 인해 체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우려가 들면 들수록 그의 협박 강도는 더더욱 높아졌다.
경찰에 신고하는 즉시 너를 죽여버릴 거라든지 하는 그런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다.
돈과 권력, 여자, 그리고 명예보다도 사람을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게끔 만드는 방법이 있다.
바로 공포다.
폭력이라든지 협박 등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겁을 먹게 만든다.
공포심을 심어주는 순간, 게임은 거기서 끝이 나게 된다.
특히나 은지처럼 심신이 약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공포심이 잘 들어맞게 된다.
그동안 은지에게 강한 협박을 함으로 인해 경찰에 신고하는 건 꿈도 못 꾸게 만들었지만…….
우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협박이라는 수단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구민조가 우석에게 역으로 협박을 당하는 꼴이 되고 있었다.
“최근에 왜 구민조 씨를 상대로 업체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불길함을 자아내는 우석의 한 마디에 구민조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설마……!”
구민조의 시선이 우석에게 고정된다.
어째서 그가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가?
구민조의 머릿속에는 그간 벌어졌던 일들이 마치 퍼즐 조각인 것처럼 하나둘씩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우석이라는 남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설픈 갑질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전혀 모르고 계시는군요, 구민조 씨. 아니면 제가 직접 본보기를 보여드릴까요?”
“마, 말도 안 돼……!”
“말이 왜 안 됩니까?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인데.”
“……!”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친다.
우석이 보여주는 지금의 미소는.
세상 그 어떠한 냉소보다도 차갑고, 섬뜩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