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80화
24. 응수(2)
오랜만에 반드 미디어 사무실에서 업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는 우석.
사실 그동안 코믹 카니발 이후에 은지를 포함해 최소 10명 이의 그림 작가들과 미팅 약속이 잡혀져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시간을 외부에서 보내야 했다.
그 일정이 좀 정리되는 터라 오늘만큼은 사무실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사무실 전경을 응시해보던 우석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대략 이러했다.
뭔가 휑해 보인다.
한지혜 한 명이 나갔을 뿐인데도 사무실의 공간이 많이 남는 듯한 기분을 선사해 준다.
“릴리아나.”
“예, 우석 님.”
때마침 사원들에게 따스한 커피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주방에서 준비 중이던 릴리아나가 즉각적으로 우석에게 다가온다.
“저번에 지시했던 인력 충원 공고에 대해선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현재 아이티한테 각종 인력 사이트에 게시물을 업로드해 달라고 요청을 해둔 상태입니다. 아마 이번주 주말 내로 웬만한 구인 사이트에 다 올라갈 겁니다.”
“그렇군…….”
인력 충원도 서둘러야 하는 작업 중 하나다.
그림 작가들과의 미팅을 통해서 반드 미디어와 뜻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인물은 자그마치 8명이나 된다.
기존에 계약을 한 네이민 같은 작가들을 포함시킨다면 10명이 넘어가는 숫자가 달성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은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석의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 은지를 반드 미디어 측에 끌어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우석아.”
릴리아나와의 대화를 주고받고 있던 도중에 철수가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좀 뜬금없는 말이긴 한데. 그…… 네가 계약 맺으려고 하는 그림 작가 중에서 이은지라는 작가 있지 않냐.”
“어, 있지.”
“웹툰 기획자하고 이상한 소문이 얽혀서 별로 안 좋은 이야기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데…… 그 그림 작가 말고 다른 작가를 구하면 안 되냐? 그쪽 그림 작가 신변 보호해 준다고 우리 측 인력을 거기에 집중하는 것도 손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아니, 이은지 작가는 꼭 데려와야 한다.”
“이유가 뭔데.”
“간단해. 그 사람이 눈물 비의 웹툰 작업을 맡을 예정이거든.”
“……진짜냐.”
그 소리는 처음 듣는다.
눈물 비는 로맨스 계에서 가히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더라도 모자를 만큼 엄청난 파급 효과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원안인 소설 단계에 그치고 있지만, 조만간 2차 창작으로 눈물 비를 널리 알릴 예정이다.
소봉예화가 쓴 로맨스 소설은 반드 미디어에게 있어서 킬러 타이틀이기도 하다. 실제로 눈물 비 덕분에 M 컬쳐의 매출뿐만이 아니라 플랫폼 이용자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었다.
대박 콘텐츠 하나가 특정 사이트의 품격을 한층 높게 상승시켜준 셈이다.
워낙 유명세를 탄 작품이기 때문에 웹툰화를 진행함에 있어서 그림 작가 역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눈물 비 정도면 프로 웹툰 작가를 기용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소봉예화가 이은지 양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거든.”
“……그렇다면 얄짤없네.”
작가가 콕 찍어서 특정 웹툰 작가의 그림체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매니지먼트사 입장에서도 크게 만류할 수가 없다.
작가의 의사는 대단히 중하다.
심지어 일반 작가도 아니고 회사 하나를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하고 있는 작가라면, 더더욱 영향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물론 우석은 딱히 소봉예화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어차피 우석은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 갑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봉예화의 주장을 따라주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우석 역시 이은지의 그림체가 눈물 비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은지는 신인이다. 그러나 신인답지 않게 화풍 자체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은지의 그림체는 눈물 비라는 작품과 잘 어울린다.
관습과 풍습을 관장하는 비서, 화염룡의 안목으로도 이은지의 그림체가 눈물 비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검증을 받았다.
더 이상의 의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는 셈이다.
어떻게 보자면 고민조라는 사람의 보는 안목 또한 상당히 괜찮았던 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좋은 신인 작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한 가지 이유도 더 있지.”
“그게 뭔데?”
우석의 머릿속에는 은지를 일부러 도와주는 이유가 하나 더 숨겨져 있었다.
작품 내적인 요소가 아닌 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웹툰 플랫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그리 작가들을 찾는 업체들이 상당히 많지. 수요가 많은 탓에 중간에 안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려오고.”
중간에 잠시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는 손을 뗀 오태준이 우석의 말에 공감을 표한다.
“저도 그에 관한 소문은 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웹툰 작가로 데뷔시켜 준다고 하고서 계약을 맺어버리고 1~2년 동안 계속해서 피드백 과정만 주고받고 작가 묶어두기 식으로 잡아두는 업체도 있고…… 계약 내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들 속여서 노예 계약식으로 맺어버린 업체도 다수 존재하지요.”
“어설픈 갑질이 낳은 폐해입니다.”
“그 덕분에 작가들한테 잘해주려는 업체만 괜히 같이 묶여서 욕먹고 있지요. 사람의 욕심이란 참……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태준도 아무래도 콘텐츠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관계자이다 보니 그런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그의 지인 중에서도 그런 일을 겪어본 피해자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다.
“태준 씨 말처럼 여러모로 피해 사례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우리 반드 미디어가 이런 피해자를 위해 뭔가를 해줬다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준다면…… 그만큼 회사의 이미지가 올라가지 않을까요.”
“오…….”
“그런 방법이……!”
우석이 생각하고 있던 게 바로 이 점이다.
은지를 향해 친절을 베푼다고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나 우석도 나름의 이익을 계산하고 난 뒤에 그녀를 도와주고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반드 미디어의 이미지도 높이고, 은지로부터 호감을 사 그녀와의 계약을 추진하는 데에 성공하고.
말 그대로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우석의 의도는 충분히 듣긴 했지만, 그래도 철수는 그녀의 신세가 불쌍하게 느껴진 모양인지 작은 한탄을 들려준다.
“그 이은지라는 여자도 참…… 뭐라고 할까. 기구한 인생이구만. 하필이면 그런 인간말종을 만나서 고생이라니.”
철수의 말대로다.
은지는 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 미디어와 만나게 됨으로 인해 해결될 것이다.
만약 그녀가 반드 미디어와 손을 잡게 된다면.
은지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걷게 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실무 작업하고 인원충원에 관한 문제를…….”
우석의 말이 이어지려던 찰나에.
사무실 전화기가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한다.
“제가 받겠습니다.”
빠르게 움직이며 수화기를 들은 릴리아나가 고정된 인사말을 들려준다.
“네. 반드 미디어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잠시 내려놓은 뒤.
릴리아나의 시선이 우석에게로 향한다.
“M 컬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 *
K 로지 회사 건물 내부로 들어선 고민조가 곧장 실무진과의 미팅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저희 측에 웹툰 작품을 제공하겠다 이거죠?”
“예.”
“으음…….”
K 로지 기획팀 부장직을 맡고 있는 차태수가 고민에 휩싸인 듯한 반응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K 로지는 사실 웹툰에 대해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플랫폼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웹툰 작가들과 계약을 맺어 웹툰을 연재해봤지만, 아무래도 웹소설 전문 플랫폼에 소속되어 일을 하던 직원들이기에 웹툰 연재에 관한 노하우가 전무했다.
그 결과가 지금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 셈이다.
과거의 실패 덕분에 차태수는 차라리 웹툰 전문 유통사를 통해서 웹툰을 들여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K 로지 내부에서 기획, 편집, 콘티 작업 등등을 해봤지만 이미 한번 실패를 했기 때문에 두 번의 도전을 하기에는 사실 많은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던 와중에 고민조가 이들에게 접선을 시도해온 것이다.
게다가 고민조는 M 컬쳐에서 스토리 작가를 역임하던 사람이다.
지금은 1인 매니지먼트를 차리고 다수의 웹툰 작가들을 영입해 웹툰을 공급하는 형태의 콘텐츠 사업을 펼치고 있다 들었다.
‘스토리 작가를 직접 해봤던 사람이니…… 분명 웹툰에 관한 노하우를 많이 가지고 있을 거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차태수는 고민조가 가지고 있는 웹툰 노하우가 탐난다.
사실 작품의 퀄리티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중소 매니지먼트도 아니고 1인 유통사다. 그런데 여기에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요구한다는 건 사실 지나친 기대감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고민조와 함께 가는 편이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는 차태수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 혼자서 결정할 이야기가 아니니 회의를 거치고 나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고민조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지기 시작한다.
그는 사실 웹툰 연재 플랫폼을 더 이상 뚫을 만한 기력이 없다.
웹툰을 전문적으로 연재하고자 하는 플랫폼들이기 때문에 고민조보다 전문적인 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맺어 주기적으로 콘텐츠를 공급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차태수가 고려했던 퀄리티도 사실은 조금 부족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이미 웹툰 플랫폼 쪽에서 계약을 따내는 건 여타 다른 매니지먼트사와 경쟁이 붙어도 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이제 점차적으로 포기를 하는 상태다.
그 와중에 웹소설 플랫폼들이 웹툰을 바라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틈타 K 로지와 접촉하는 데에 성공한 고민조는 아직 확정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차태수에게 긍정적으로 보겠다는 답변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크크큭…… 장사는 이렇게 하는 거지.’
이제 또다시 은지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그림 작가들을 몇 명 포섭하기만 하면 된다.
계속적으로 굴릴 수 있는 콘텐츠만 공장처럼 찍어내면 된다.
그림 작가가 기력이 다했다 싶으면 고민조는 과감하게 그들을 버릴 예정이다.
이게 그동안 고민조가 해왔던 방식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집할 방식이기도 하다.
* * *
똑똑.
K 로지 대표 사무실 문을 가볍게 노크한 차태수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대표님. 차태수 부장입니다.”
“들어오도록.”
“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때마침 컴퓨터를 보면서 사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문태현이 차태수에게 손짓을 하며 말한다.
“앉게.”
“예, 대표님.”
차태수의 맞은편 소파에 같이 앉은 문태현이 그를 지그시 응시한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했지?”
“다름이 아니라…… 웹툰에 관해서 상의를 드릴 게 있습니다만.”
“웹툰?”
“예. 저희 K 로지가 자체적으로 시도했다가 별다른 성과가 없이 끝난 거 같아서 이번에는 외부 유통사를 통해서 웹툰 콘텐츠를 공급받고자 합니다만, 대표님의 의견을 묻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하긴…… 우리 회사가 웹툰 성적이 안 좋긴 했지.”
M 컬쳐는 사실 같은 계열사인 포털 사이트, 미논 내부에 자체적으로 웹툰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미논의 웹툰관은 웹툰의 메카라 불릴 만큼 엄청난 지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에 비해 K 로지는 웹툰에 있어서 M 컬쳐에 많이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다.
웹소설과 웹툰.
두 분야를 지배하는 자가 웹 콘텐츠를 차지하게 된다.
웹툰 욕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문태현이기에 태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래, 그 외부 유통사가 어디지?”
“한때 스토리 작가로 일했던 고민조라는 사람이 만든 유통사입니다.”
“고민조?”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문태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태수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윽고 머지않아 더더욱 태수를 당황스럽게 만들 법한 발언이 문태현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자와 함께 일하는 건 내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