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77화
23. 하수(2)
벽 쪽으로 자리를 옮긴 네이민의 부스에 도착한 릴리아나와 화염룡.
“갔다 오셨……??”
네이민의 시선이 릴리아나의 옆에 서 있는 화염룡 쪽으로 향한다.
처음 보는 미인의 출연에 네이민의 궁금증이 더욱 증폭된다.
“릴리아나 씨, 이분은…….”
“제 지인입니다.”
“안녕하세요, 화염룡이라고 해요.”
“화, 화염룡…… 이요?”
“네.”
“…….”
이름이 화염룡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네이민.
아니면 그녀처럼 이름에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어서 화염룡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네이민이 다시 표정관리를 하면서 화염룡의 인사를 마주 받아준다.
“네이민이라고 해요.”
“저의 소중한 친구, 릴리아나와 같이 일하시는 분이라고 하던데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하하…….”
유독 ‘소중한 친구’라는 단어를 힘주며 말하는 화염룡이었다.
사실 반드 미디어 측에게 네이민을 끌어오라는 의견을 제시한 건 다름 아닌 화염룡이다.
직접 그녀가 연락을 취한 게 아니기 때문에 네이민은 아마 화염룡의 존재 자체를 모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염룡 또한 굳이 자신이 네이민을 소개했다는 부연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벽부스라니. 인기 많으신가 봐요.”
화염룡도 벽부스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화두를 이끌어간다.
릴리아나와 다른 화려한 의상으로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염룡의 존재에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던 네이민이 퍼뜩 정신을 차린다.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일 뿐이에요.”
“어머, 겸손까지 하시고…… 좋으신 분이네요.”
그렇게 네이민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부스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A관 근처에 사건 하나 터졌다고 하던데.”
“싸움 났다며?”
“진짜? 대박이다. 구경 가자!”
싸움이라는 단어에 귀를 기울인다.
코믹 카니발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일뿐더러 대다수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게다가 SNS,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건 하나만 터져도 온라인상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가게 된다.
그래서 동인 쪽에 활동을 하고 있는 네이민으로선 이런 말에 민감히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뭔가 또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터졌나 보네요.”
“오, 그래요?”
화염룡의 귀가 쫑긋 움직이는 듯한 낌새를 보인다.
“무슨 사건인지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겠네요.”
강한 의욕을 선보이며 자리를 뜨려고 하는 화염룡.
그러던 찰나에, 릴리아나가 화염룡의 손목을 붙잡는다.
“어디 가려고.”
“방금 말했잖아.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확인하러 간다고.”
“네가 할 일은 사건 구경이 아니라 우석 님과 같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그림 작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일 텐데?”
“혹시 또 모르잖아? 우석 오빠가 그 사건에 휘말렸을지도.”
“……!”
우석의 이야기가 나오자 릴리아나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말이 맞다.
혹여나 화염룡의 말대로 우석이 사건에 휘말려 있다면 큰일이다.
“갈 거지?”
“…….”
화염룡의 말에 대답할 틈도 없이 곧장 걸음을 재촉한다.
릴리아나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먼저 가버린 탓에 화염룡은 여유롭게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그렇게 해서 네이민 혼자 또다시 홀로 부스에 남게 된다.
“……재미있는 사람들이네.”
* * *
“세계의 주인…….”
그 말에 우석의 시선이 달라진다.
뭔가 의욕이 없어 보이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남자.
우석은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부천역 근처에서 덩치 큰 다수의 남자들을 단순히 살기 하나만으로 제압했던 바로 그 후드티 남성이다.
비범한 실력을 지닌 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비서일 줄이야.
“이 녀석은 또 뭐…… 아야야야야야!!!”
고민조의 얼굴이 서서히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의 손목에 점점 가해지는 악력.
그러나 남서인의 표정에는 힘 하나 들지 않는지 계속해서 무표정을 유지한다.
“너도 비서인가?”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석의 말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하는 남자.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고민조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편, 싸움이 붙었다는 신고를 듣고 황급하게 다가오는 스태프들.
“무슨 일인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분이 여기 부스 참가자분에게 시비를 걸고 있길래 잠시 중재 중입니다.”
우석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중재보다는 오히려 제압 쪽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다.
“아, 알았습니다. 일단은 폭력을 사용하는 건 최대한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폭력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스태프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면서 말한다.
그러자 우석이 시선을 보내자, 서진이 알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놓아준다.
“헉…… 헉…….”
오른손이 부러지진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고민조였으나, 서진은 여전히 의욕 없는 표정으로 고민조를 향해 한마디를 던진다.
“꺼져라.”
“……미친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했다.”
“…….”
남자에게서 풍겨오는 살기가 고민조의 본능을 자극한다.
왜소한 체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서진에게는 남을 제압할 수 있는 아우라가 있다.
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갖췄다.
그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제압을 당했던 고민조는 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여기서 한 번 감정에 욱해 주먹다짐을 한다고 해봤자 남서진을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어 보인다.
“……젠장!”
결국 혀를 차면서 행사장을 빠져나간다.
그 와중에도 은지를 노려보는 걸 빼놓지 않는다.
그가 완벽히 행사장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우석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많아서 탈이군.”
어느 정도 소동이 정리되는 듯싶자, 스태프들이 알아서 관중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우석은 은지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핀다.
“괜찮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치만…….”
“괜찮습니다. 일단 차후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행사 끝나고 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혹시 모르니 제 보디가드를 전담으로 붙여놓겠습니다.”
“보디가드…… 요?”
“예.”
우석의 시선이 서진에게로 향한다.
때마침 우석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태프 유니폼을 벗은 채 다시 사복으로 갈아입은 서진.
그의 모습을 흡족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여준 우석이 그에게 첫 명령을 내린다.
“여기 계신 레이디를 잘 모시고 있어라.”
“……예, 세계의 주인이시여.”
* * *
코믹 카니발 운영진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 쪽에 가서 어떤 식으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을 마친 우석.
사무실을 나오자, 때마침 기다리고 있던 릴리아나가 노골적으로 걱정 어린 감정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우석 님,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나야 괜찮다. 그보다…….”
우석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한다.
때마침 근처에서 팔짱을 낀 채 화염룡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서진에게로 고정된다.
“새로운 비서를 만났는데.”
“남서진이라고 해서, 경호 담당 비서입니다.”
“경호라…….”
세계의 주인은 중요한 인물이다.
비록 우석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실력 정도는 가졌다고 하지만, 확실히 우석의 신변을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가 버텨준다면 안심이 된다.
세계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뭔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결재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서들의 능력 자체를 자신의 능력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결재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서진이 우석 님의 곁에 있으시다면 저도 안심이 됩니다.”
“그 정도인가?”
“예. 비서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군.”
비서들의 활동 분야가 워낙 많은 탓에 분명 세계의 주인을 집중적으로 호위하는 비서가 있을 거란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과연 딱히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오자마자 서진이 활약해줘야 할 때가 오게 되었다.
* * *
코믹 카니발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졸지에 사건 하나와 휘말리게 된 우석은 네이민과의 뒷풀이도 제쳐놓고 아이티가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인터폰의 벨을 누른 뒤 짧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나다.”
“…….”
어차피 올 사람은 릴리아나 아니면 우석밖에 없다.
남자냐 여자냐 구분짓는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금방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일이 있어서 그것 좀 알아보고자 한다. 아마 너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이미 아이티도 코믹 카니발에서 발생한 사건을 접한 지 오래다.
반드 미디어가 노리고 있던 웹툰 작가 후보 중 한 명인 이은지.
그러나 그녀에게 이상한 남자가 꼬여 있었던 것이다.
“그 이은지라는 여자와 오늘 소란을 일으켰던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도록 해라. 얼마나 걸릴 거 같지?”
“내일 오전까지 가능합니다.”
“그렇군.”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이은지에 관한 일을 해결해야 한다.
다음 주부터 오늘 접선을 펼친 그림 작가들과 미팅을 주고받아야 할 마당에 이은지 일까지 터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은지는 포기할 수 없다.
화염룡이 지목한 그림 작가들은 차후 콘텐츠 사업에서 대박을 터뜨릴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 * *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온 은지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옷을 갖춰 입은 뒤, 슬며시 커튼을 걷어 바깥을 내려다본다.
4층 높이에서 보이는 주차장.
그곳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 하나에서 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잠시 몸을 풀기 시작한다.
우석이 붙여준 보디가드, 남서진이었다.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일까?’
그래도 신뢰가 가는 남자가 근처를 지켜주고 있다면 은지로선 믿음직하긴 하다.
하지만 남서진도 그렇고, 그를 은지에게 보디가드로 붙여준 우석도 오늘 처음 보는 사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하다 할 정도로 은지를 향해 친절을 베풀어주고 있었다.
의심이 가긴 하지만, 그래도 은지는 믿을 만한 곳이 없다.
괜히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일부러 고민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
할 말을 잃은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은지가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기분 전환 겸,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다시 살리기 위해 일부러 참가를 한 코믹 카니발.
그러나 도리어 그녀의 이런 결단이 독이 되어 돌아왔다.
설마 고민조가 그곳까지 직접 쫓아올지 몰랐다.
거기서 소란을 일으키기까지 하니…… 은지의 멘탈은 더더욱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도통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수동적으로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녀의 신세가 한탄스러웠을까.
은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