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75화
22. 코믹 카니발(Comic carnival)(3)
11시가 반 정도가 되고 나서부터 행사장의 분위기는 거의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회지, 기타 팬시를 사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일반 참가자들.
진행 스태프들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사건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난리도 아니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건 실로 오랜만에 보는 우석이었다.
게다가 연령층도 상당히 낮다.
방금 전, 우석을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은 초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나이를 지닌 애들이었다.
판무협 소설을 읽는 독자층들이 대게 30~40대에 집중되어 있다면, 서브 컬쳐에 취미를 들이고 있는 이들은 10~20대가 가장 많은 셈이다.
콘텐츠 사업이란 자고로 소비자들의 다양한 입맛을 공략해야 하는…… 소위 말해서 음식점과도 같다.
매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느끼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중들의 다양한 입맛을 공략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양한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일이다.
오늘 코믹 카니발에 참가함으로 인해 여러 가지를 배워가는 우석.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새로운 사업 구상이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직 마저 돌지 못한 부스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운이 좋게도 필수적으로 들려야 할 부스 10개 중 3군데가 전부 이곳, A관에 모여있다.
“우선…… 가장 가까운 B열 쪽으로 가볼까.”
위치는 B 13. 네이민의 부스와 그다지 멀지 않다.
그러나 거리가 가깝다고 금방 도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걸어서 채 30초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무수한 인파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가는 게 쉽지 않다.
그래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 B 13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한 우석이 디스플레이 봉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바라본다.
확실히 잘 그린다.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시각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여타 다른 부스들에 비해 퀄리티 차이가 확연하게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도 꽤나 많다.
‘이런…….’
우석으로선 난감한 상황이다.
부스를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쉽사리 말을 걸기가 애매하다.
물론 말을 못 붙이는 건 아니다. 한두 마디 정도는 쉽게 말을 섞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바쁜 상황에서 구태여 대화를 시도하는 건 상대방에게 민폐가 될 수 있다.
첫 만남인데, 괜히 바쁜 사람 붙잡아놓고 용무를 해결하려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두게 된다면 상대방은 결코 우석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계약 건수도 무산으로 돌아간다.
‘우선 타이밍을 볼까.’
계속해서 사람들이 부스에 머물진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석이 이들의 행동 패턴을 보아온 결과, 이들은 한 부스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거나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는 걸 깨달았다.
일반 참가자들의 주된 목적은 바로 이들이 원하는 상품들을 구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스 참가자들이 들고 온 개인 상품, 굿즈, 혹은 회지 등은 수량이 무제한으로 있지 않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가져온 물건들이 많은 터라 많은 양을 들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수량 또한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빠른 곳은 일반 입장이 시작된 지 1시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전부 다 매진이 되었다는 소식도 접했다.
매진되기 전에 목표한 타깃들을 빠르게 사야 한다!
그 강박관념이 일반 참가자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물건만 바로 사고 자리를 뜨는 이들이 대다수다.
잠시 타이밍을 지켜보는 사이에, 드디어 틈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한 우석이 걸음을 빠르게 옮긴다.
“안녕하세요. 혹시 고투 작가님 계십니까.”
“아…… 전데요?”
뿔테 안경을 쓴 젊은 남성이 우석을 바라보며 자신이 고투라는 닉네임을 쓰는 작가임을 알린다.
그러자 우석이 빠르게 안쪽 주머니로 손을 뻗어 명함을 꺼낸다.
“안녕하세요. 반드 미디어 대표, 이우석이라고 합니다. 고투 작가님을 만나 뵙고 싶어 이렇게 직접 코믹 카니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이쿠…… 굳이 이런 곳까지 오시다니. 아, 우선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그럼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고투의 배려로 인해 부스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른 부스와는 다르게 고투의 부스는 1 부스가 아닌 2 부스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자리가 비교적 많이 남는 편이기도 하다.
“행사장이 참 복잡하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여긴 처음 오시나 보네요?”
“네. 아는 작가님께서 부스를 내신다고 하시길래 잠깐 와봤습니다. 네이민 작가님이라고 해서……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네이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고투의 표정이 금세 바뀐다.
“물론 알지요! 제가 엄청 좋아하는 작가님 중 한 명이니까요! 혹시 네이민 작가님하고 아시는 사이입니까?”
“네. 저랑 같이 작품 하나를 기획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서비스는 되지 않았지만, 곧 저희도 웹툰 쪽에 진출을 할 예정이니까요.”
“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짓는 이우석.
아이티의 정보를 통해 고투가 네이민의 팬이란 사실은 이미 접수한 지 오래다.
그래서 일부러 네이민과의 관계를 들먹인 것이다.
“네이민 작가님……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지요. K 로지 쪽에서 웹툰하고 계시는 것도 잘 보고 있고요.”
“조만간 그 웹툰은 완결을 짓고, 차기작은 저희 반드 미디어를 통해서 네이민 작가님의 작품을 유통시킬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고투 작가님도 혹시 괜찮다면 저희랑 같이 일해볼 생각이 없는지요.”
“제, 제가요?!”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고투는 아직 프로 경험이 없는 그림 작가다. 물론 웹툰을 하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연이 닿지 않았기에 당분간은 그 생각을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웹툰 기획 이야기가 들어오니, 고투의 입장에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린 것이다.
“전 아직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부족한 만큼 저희가 그 빈틈을 채워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고투 작가님께서 정말 웹툰을 노리고 계시다면,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
“지금 당장 결정하기 어려우시다면 제가 드린 명함으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작가님께서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할 테니까요.”
“그럼…… 일단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바로 결정을 내릴 만한 건 아닌 거 같으니까요.”
“예.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분명 고투는 이번 안건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볼 것이다.
아직 그에게 직접적으로 웹툰 연재를 제시하며 연락이 온 업체는 없다.
반드 미디어가 첫 번째인 셈이다.
동인계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을 조금만 더 모니터링하고 조사해 보면 고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우석이 이번 접선 기회를 놓쳤다면, 머지않아 한 달 이내에 많은 웹툰 플랫폼들이 고투에게 연락을 해올 가능성이 크다.
그전에 우석은 먼저 그를 선점할 생각을 지니고 있다.
‘네이민 작가가 우리 측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알려줬으니…… 머지않아 긍정적인 대답이 오겠지.’
아이티가 제공해 준 정보 덕분에 대화를 쉽게 진행하는 데에 성공한 우석의 눈이 이제 남은 두 곳 중 한 부스의 위치를 쫓는다.
* * *
우석이 그림 작가들을 섭외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는 동안.
네이민의 부스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부스를 좀 이동해야 할 거 같은데요.”
진행요원이 다가와 네이민에게 부스 이동을 제안한다.
때마침 네이민 역시 안 그래도 주변 통행에 방해가 될 만큼 많은 인파들이 자신의 부스 앞에서 대기 중이란 사실을 깨닫고 스태프를 부르려고 했던 찰나였다.
“네,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4~5명의 현장 요원들이 투입되며 그녀의 책상을 통째로 든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를 하던 릴리아나가 네이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달라는 식으로 묻는다.
“갑자기 왜 책상을 옮기는 겁니까?”
“제 부스에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그래요. 괜히 인접 부스에도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에 벽부스 쪽으로 책상을 빼는 거죠.”
“벽부스…….”
우석에게 대충 코믹 카니발에 관한 설명을 들었을 당시, 벽부스라는 단어가 나온 적이 있다.
벽부스라 함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부스를 주로 벽에 배치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다.
즉, 다시 말해서…….
“벽부스라는 건, 인기가 많다는 뜻 아닙니까? 역시 네이민 작가님이시군요.”
“아하하…… 저도 오랜만에 벽부스가 된 거 같아서 좀 낯설긴 하네요.”
아마도 K 로지에서 연재하고 있는 웹툰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웹 연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그림을 접하게 되고, 그만큼 많은 팬층이 생긴 탓에 벽부스라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우석 님에게 벽부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전해야겠군요.”
릴리아나가 그녀의 주인인 우석에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스마트폰을 든다.
그 순간, 확인하지 못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화염룡이 나갈 채비를 다 갖췄으니 데리러 오라는 문자였다.
“…….”
문자 내용을 확인한 릴리아나가 네이민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을 붙인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될까요.”
“아, 네. 다녀오세요.”
시간이 많이 늦었다.
지금쯤이면 화염룡이 온갖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좀 더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는 릴리아나.
하나 예상외의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은 덕분에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기가 여긴 쉽지 않다.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마지못해 특정 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그녀가 선택한 장소는 바로 화장실.
비어 있는 칸 하나에 들어간 뒤, 곧바로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밝은 빛과 함께 그녀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 * *
집에서 대기 중이던 화염룡의 시야에 밝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화염룡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빛을 응시한다.
서서히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릴리아나의 외형이 화염룡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 기다렸나.”
“무진장 오래 기다렸지.”
“미안하군.”
“그건 됐고…… 후딱 가자. 시간 없잖아?”
“알았다. 하지만 이동하기 전에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는데…….”
“주의사항?”
“도착할 장소에 대한 거다. 이동하고 난 이후에 가급적이면 목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문을 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가면 된다. 잘 알아들었지?”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화염룡이었으나.
“자, 바로 가자.”
화염룡의 손을 잡고 곧장 순간이동 능력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
왜 릴리아나가 처음에 그런 경고 발언을 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저기 말이야.”
“……왜 그러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아까 말한 경고를 잊었나.”
“경고고 나발이고……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장소에서 ‘화장실’로 이동한 거야?”
“…….”
그 점에 대해선 뭐라 딱히 할 말이 없다.
인적이 드문 곳이 여자 화장실 빈칸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휴, 정말.”
작은 불만을 토로하며 여자화장실 칸 하나에서 나오는 화염룡.
뒤이어 릴리아나 역시 그녀를 따라 나온다.
두 명의 여자가 화장실 한 칸에서 같이 나오자, 주변에 있던 다른 여성들이 흠칫하며 두 사람들을 바라본다.
대다수 이상한 시선이 섞여 있음을 확인한 화염룡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를 던진다.
“둘이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행동은 안 했어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