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질의 신-74화 (74/201)

갑질의 신 74화

22. 코믹 카니발(Comic carnival)(2)

-따르르르릉!!

내부에 울려 퍼지는 전화 소리.

그 덕분에 이불 속에서 한참 꿈나라를 여행 중이던 화염룡이 부스스한 몰골로 겨우 눈을 뜬다.

“아 씨…… 도대체 누구야.”

늦은 시간까지 잠을 안 자고 있었던 모양인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녀지만, 계속해서 울리는 통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을 든다.

이윽고 통화 버튼 대신 거절 버튼을 과감하게 터치한 뒤.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묻는다.

하나 그것도 잠시.

-따르르릉!!

“…….”

그녀의 단잠을 그대로 방치할 생각이 없는지 재차 전화 소리가 울린다.

결국, 참다못한 화염룡이 통화 버튼을 꾸욱 누르며 불평불만을 내비친다.

“……누군데 아침부터 전화질이야…….”

-나다, 릴리아나.

“……뭔데…….”

그녀의 반응을 통해 소봉예화가 아니라 화염룡의 인격임을 깨달은 릴리아나가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말을 이어간다.

-여기 학여울역 근처인데, 네가 와줬으면 해서 전화한 거다.

“내가? 거길 왜 가.”

-잊고 있었나? 코믹 카니발의 날짜가 오늘이라는 걸.

“…….”

물론 잊을 리가 없다.

문화, 관습 등을 관장하는 비서가 바로 소봉예화, 화염룡 콤비 아니겠는가.

동인 문화에 대해서도 이미 꿰차고 있는 그녀가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동인 행사인 코믹 카니발의 정체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석 님이 네가 언제쯤 행사장에 올 수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네게 일정을 묻고자 전화를 걸었지.

“나 없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잖아.”

-잘할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할 수는 없어.

“…….”

화염룡의 직접 보고 작품을 고른 것들은 99% 대박을 터뜨릴 만한 요소를 가진 콘텐츠들이다.

그녀의 ‘콘텐츠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게다가 코믹 카니발과 같은 대규모 아마추어 행사라면 더더욱 그녀의 능력이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프로 작가들은 애초에 검증이 된 인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누구를 데려온다 하더라도 기본 프로 이상의 능력은 보여준다.

물론 아주 가끔 프로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프로의 세계에서 데려온 작가들은 꽝보다 당첨이 더 많다.

그러나 아마추어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콘텐츠를 볼 줄 아는 시각을 지닌 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화염룡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가면 되잖아.”

결국 릴리아나의 재촉에 못 이겨 이불의 손길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절로 나오는 한숨.

그러나 세계의 주인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진짜…… 비서란 것도 극한직업이란 말이야.”

그녀 나름의 불만을 토로하며 천천히 나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 * *

일반 입장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수한 인파들이 행사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이미 일반 입장이 개시되기 전, 처음에 눈여겨보던 10곳의 부스 중 과반수 이상을 둘러보고 인사를 주고받은 우석과 릴리아나.

이제 남은 곳은 3곳 정도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더 필요한 인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려면 화염룡의 존재가 필요하다.

코믹 카니발에 참가하는 모든 부스 참가자들이 SNS, 각종 커뮤니티에 자신들의 부스 정보를 홍보하거나 하는 편은 아니다.

아무런 홍보도, 알림도 없던 부스들이 코믹 카니발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 또한 빈번하게 발생한다.

SNS나 커뮤니티 사이트에 홍보를 올린 부스 참가자들의 경우에는 아이티의 정보 조사로 인해 이미 반드 미디어 측에서 전부 다 검토를 한 상태다.

그중에서 화염룡의 의견까지 보태 10곳의 부스 명단을 작성했다.

하지만 홍보를 하지 않은 부스 참가자들까지 고려한다면, 온라인만으로 정보를 취합하는 것과는 별개로 직접 현장에 한 번 와서 부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혹시 또 모른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보물 같은 인재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지도.

“우석 님.”

방금 화염룡과 통화를 마친 릴리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결과를 보고한다.

“오후 한 시 정도에는 도착할 거 같다고 합니다.”

“한 시라…….”

행사는 5시에 종료된다.

그러나 대개 부스 참가자들은 4시 정도면 서서히 부스를 접는다는 말을 아이티의 정보와 네이티의 입을 통해서 들은 적이 있다.

더 빠른 곳은 3시에도 부스를 접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좀 더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이제 막 일어났다고 친다면 더 이상 재촉할 수도 없겠군.”

화염룡은 외출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타입이다.

소봉예화의 경우에는 그냥 후줄근한 옷차림이라 하더라도 그런 상태로 외부에 자주 돌아다니곤 한다.

그러나 화염룡은 미용을 상당히 따지기 때문에 본인이 만족할 만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바깥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시간을 아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 우석이 머리를 조금 굴려본다.

‘어쩔 수 없군.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서 릴리아나아게 손짓을 한다.

우석의 의사를 파악한 릴리아나가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귀를 가져간다.

“네 능력을 사용해도 좋으니, 화염룡한테서 외출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순간이동으로 바로 데려오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이럴 때 릴리아나의 능력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그녀의 순간이동 능력은 부산 출장을 갈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그만큼 많은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

그 때문에 릴리아나의 순간이동 능력은 우석에게 있어서 정말 편리한 능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편, 둘이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네이민의 부스 앞에는 순식간에 10여 명의 사람들의 몰려든다.

일반 입장이 시작된지 채 1분도 안 돼서 발생한 일이다.

“저기, 이번에 새로 나온 신간 한 권 주세요!”

“예, 5천원입니다.”

“저도요!”

“2권 주세요!”

“네, 잠시만요!”

네이민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는 터라 혼자서 감당이 안 될 정도.

낌새를 눈치챈 릴리아나가 스스로 자원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회지 건네주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작가님께서는 계산을 서둘러주세요.”

“아…… 네!”

릴리아나의 말을 곧장 받아든 네이민이 거스름돈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동안 릴리아나는 각각 찾는 권수에 맞게 회지를 챙겨 부스를 들른 손님들에게 건네준다.

“여기 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금발 미인이 손님들을 맞이하자, 순간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회지를 챙기고 곁눈질로 그녀를 응시한다.

머리가 금발이기에 처음에는 코스프레를 위한 염색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천연 금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더더욱 릴리아나 쪽으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릴리아나 씨가 판매 역할을 맡아주니까 다른 부스에 비해서 뭔가 확 눈에 띄는 거 같네요.”

“제가…… 말입니까?”

네이민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자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릴리아나.

그녀의 압도적인 미모에 사람들은 더더욱 네이민의 부스를 찾기 시작한다.

한편,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을 지켜보던 우석은 괜히 장사에 방해를 놓지 않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난다.

“전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겠습니다. 괜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 그래도 어느 정도 공간을 비워두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으니까요.”

“아, 우석 님이 가시면 저도…….”

“괜찮다. 넌 여기 남아서 작가님 판매를 도와드려라. 어차피 사람도 많으니까 나 혼자서 이동하는 게 더 편해.”

“……알겠습니다.”

본래는 부스에 와서 판매 일을 전담으로 맡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네이민의 부스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터라 자리를 뜨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릴리아나에게 재차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하면서 부스 바깥을 나서는 우석.

그러나 밖으로 나오는 순간.

“…….”

무수한 인파의 물결이 우석을 급습한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새도 없이 앞 사람과 옆 사람, 그리고 뒷 사람에게 이끌려 절로 앞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

“괜한 곳을 온 거 같군.”

이미 후회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 * *

수많은 사람들.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줄 사이로 팻말을 든 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한 남자가 무료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얼마 전, 시비를 걸어오던 다수의 남자들을 한 방에 때려눕힌 장본인, 후드티 남성이 오늘은 이곳 학여울역 근처 코믹 카니발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저번과 차이가 있다면, 그가 애용하는 후드티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태프들은 기본적으로 코믹 카니발 측에서 제공한 유니폼을 착용하게 되어 있다.

그 덕분에 오늘만큼은 후드티를 벗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이 일도 지긋지긋하군.”

그래도 아르바이트는 해야 한다.

요즘 돈벌이 수단이 영 없는 터라 본의 아니게 생계를 유지하고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던 도중, 코믹 카니발 스태프 공고 모집을 보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은지 금방 연락이 오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오늘 이렇게 팻말을 들고 대기 줄을 세우는 일을 도맡게 되었다.

목에는 스태프 명찰과 함께 그의 이름으로 보이는 ‘남서진’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다 있을까…….”

싸움과 투쟁의 역사를 함께 해온 남서진의 입장에서 보기엔 오늘과 같은 이런 동인 행사는 평화 그 자체다.

매번 주먹질만 하고,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다반사로 있었다.

뒷골목의 세계에서 살아온 남서진이 설마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 줄이야.

만약 그를 알고 있는 지인과 마주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수치심마저 들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창피하다든지 그런 감정의 문제를 앞세울 여유마저 없다.

오늘 당장 밥 사 먹을 돈도 없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세계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인지, 때마침 서진에게 다가온 젊은 여성 스태프가 의아함을 드러낸다.

“세계의 주인이라니요? 무슨 뜻인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진과 같이 대기 줄 정렬 일을 맡게 된 젊은 여성이 키득키득 웃음을 토해낸다.

“서진 씨도 재미있는 설정 놀이를 하시네요. 저도 예전에 그런 설정 놀이 같은 거 많이 했었는데…… 아, 저 같은 경우에는 예전에 마법이 진짜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말이죠. 그때는…….”

자신의 경험담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기 시작하는 여성.

그러나 서진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서진이 말한 세계의 주인은 설정 놀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갑(甲).

그를 만나야 서진 또한 자신의 능력을 결재받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도통 새로 바뀐 세계의 주인이라는 자를 만날 길이 없으니…….

서진의 입장에선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애초에 다른 비서들과도 잘 어울려 다니는 그런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연락이 유지되는 비서 또한 없다.

그래서 세계의 주인이 새로 바뀌었을 당시, 어디 연락을 취할 곳도 없어 그 혼자 홀로 거리를 서성이며 세계의 주인을 찾아다니는 여정길을 나서곤 했다.

물론 중간에 주먹을 써야 하는 일이 좀 많았지만 말이다.

“언제쯤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만.”

옆에서 쫑알거리는 여성의 말을 무시한 채.

하루라도 빨리 새로 바뀌게 된 세계의 주인과 만나기를 기원하는 남서진의 한마디가 오늘따라 유독 씁쓸한 감정을 진하게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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