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71화
21. 동인 문화(2)
문태현에게서 걸려온 전화.
가급적이면 스케줄이 한가할 때인 오늘 전화를 주면 고맙겠단 말을 전해달라고 철수에게 부탁했지만, 설마 이렇게 바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보아하니 문태현 개인 폰 번호로 전화를 걸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녕하세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문 대표님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기다니 영광이군요.”
-하하, 영광까지야…… 그보다 좋은 소문만 들으셨다면 좋겠군요.
“좋은 쪽으로만 걸러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능수능란하게 문태현의 말을 잘 받아주며 대화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이야기나 나누려고 일부러 전화까지 걸어오진 않았을 터.
-식사는 다 하셨습니까?
“아니요. 이제 막 사원들과 같이 밥 먹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타이밍이 안 좋았군요. 그럼 용무를 좀 빨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석이 원하는 바다.
목표가 명확한데, 구태여 대화로 구구절절 시간을 끌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한 번 했으면 합니다만.
“저와 말입니까?”
-예. 요즘 반드 미디어가 잘 나간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와서요. 이 대표님한테 그 노하우 좀 듣고자 해서 만나 뵙고 싶습니다.
“노하우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요. 그냥 전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물론 우석의 이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다.
운만으로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별다른 수고 없이 그저 운만 좋다면 금전까지 확 끌어올 수 있으니 말이다.
-하하, 겸손하신 분이군요. 그래도 따로 만나 뵐 수 있으면 합니다만…….
“예,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내심 거절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그럼 일정은 언제가 편하신가요?
“다다음 주 정도면 괜찮을 듯합니다. 제가 다음 주는 미팅 약속이 꽉 잡혀 있어서 곤란할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한 번 시간 확보하고 이 대표님에게 다시 연락드리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문태현과의 통화를 끝낸 우석.
스마트폰을 겉옷 주머니 안에 넣으면서 혼잣말을 내뱉어본다.
“M 컬쳐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한번 여기저기서 간을 볼 필요가 있겠군.”
* * *
우석으로부터 인력 충원 공고, 문태현과의 저녁 식사 약속 스케줄 확보 등 각종 업무를 부탁받은 릴리아나가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우석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아이티가 건네준 코믹 카니발에 관한 자료를 훑어본다.
우선 코믹 카니발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 우석이 원하던 실력을 지닌 그림 작가들의 후보 명단을 확인한다.
500개가 넘는 부스 중에서도 화염룡과 아이티의 협업을 통해 추스른 부스만 대략 10개.
코믹 카니발에 가서 기본적으로 이 10개의 부스는 무조건 들러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메일이나 전화 등의 연락처를 통해 노골적으로 작품 기획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는 형태가 아닌, 부스에 들러 타깃이 되는 그림 작가들의 개인 회지를 구입함과 동시에 명함을 건네는 형태로 첫 만남이 성사될 것이다.
신경 써야 하는 준비물은 한 가지.
바로 명함이다.
‘넉넉히 준비해 가야겠군.’
10개의 부스뿐만 아니라 우석이 마음에 드는 그림체를 지닌 부스도 분명 있을 터.
이것까지 고려한다면 그래도 최소 20~30장 정도의 명함을 준비하고 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코믹 카니발 행사 관련 일정이다.
‘9시부터 동아리 부스 입장…… 그리고 10시 반부터가 일반 입장 시작이군.’
코믹 카니발과 같은 동인 행사의 경우에는 일반 참가자와 부스 참가자의 입장 시간이 다르다.
동인 행사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개 부스 참가자는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반 정도 먼저 행사장 내부로 들여보내 부스의 디스플레이를 완성시킬 정도의 충분한 시간을 할당받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부스 참가자와 일반 참가자가 동시에 입장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입장 시간을 설명하는 구간에서 아이티가 한 가지 팁을 적어놓았다.
‘부스 입장으로 들어가는 게 좋단 말이지…….’
아이티의 의견이 옳다.
코믹 카니발과 같이 회지, 혹은 팬시라든지 캐릭터 상품, 기타 개인이 만든 굿즈를 파는 행사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우석도 관련 자료를 조사하다가 행사 내부 전경을 찍은 사진 자료들을 본 적이 있다.
처음 행사 당시 사진을 봤을 때 우석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대략 이러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놓여져 있는 돌멩이들보다 많다.
마치 출퇴근 시간 때의 신도림역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가장 먼저 와닿았다.
그러는 와중에 목표로 삼은 부스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림 작가들과 일일이 접선을 펼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려면 부스 입장 때 같이 맞춰서 들어가는 편이 좋다.
‘괜찮은 팁을 적어뒀군. 하지만 부스 입장은 어떻게 들어간다…….’
아이티는 정보를 제공해 줄 뿐이지,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않는다.
결국 부스 입장표를 구하기 위해서 우석이 나설 수밖에 없다.
“…….”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우석이 스마트폰을 든다.
어디론가 문자를 보낸 뒤.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스마트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여보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설마 곧바로 전화를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다름이 아니고…….”
누군가와 간단한 통화를 주고받은 뒤.
비교적 짧은 통화 시간을 마친 뒤 종료 버튼을 누른 우석이 옅은 한숨을 내쉰다.
‘부스 입장 문제는 해결됐군.’
우석이 방금 전 통화를 한 상대방은 부산 출장 때에도 직접 대면한 적이 있는 웹툰 작가, 네이민이었다.
그녀와 만났을 때 당시, 주기적으로 코믹 카니발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혹시 그녀를 통해서 부스 입장표를 구할 수 있는지 문의를 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부스 입장표도 구했으니, 이제 남은 건 이번 주 주말에 있을 코믹 카니발 행사 참가 준비만 하면 된다.
주말을 반납하고 일하러 가야 한다는 게 불만이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드 미디어의 덩치를 더욱 키우기 위해선 실력 좋은 웹툰 작가진을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시선을 많이 끌어오는 건 사실 웹소설보다는 웹툰이다.
파급력이나 조회수로 따져 봐도 웹툰이 웹소설에 비해 높은 성적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각종 플랫폼 업체나 매니지먼트사가 웹툰을 끌고 가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온다.
웹툰을 찾는 사람이 많다면 당연히 웹툰을 하는 게 좋다.
소비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공급한다.
그것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정석의 길이다.
‘동인 행사라…….’
어떠한 행사인지에 대해선 이론적으로 알고는 있다.
그러나 직접 참가해 본 적은 없기에 더더욱 호기심과 궁금증은 커져 가기 시작한다.
* * *
일요일 오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캐리어를 이끌고 전철에 탑승하는 이은지.
스마트폰을 통해 SNS로 자신의 부스 광고글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 밑에 달려 있는 수많은 댓글들은 대다수가 이은지의 공백을 잊고 그녀를 반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 그중에는 더러 웹툰 데뷔 때문에 동인 쪽을 접는다고 했었던 그녀의 과거 발언을 들먹이며 비난을 펼치는 댓글 또한 중간중간에 섞여 있었다.
물론 은지의 잘못이다.
웹툰 작가가 되고 싶다는 목표 하나만을 이루기 위해 근 2년을 쉬지도 않고 달려 왔으니 말이다.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뿐만 아니라 그림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올려 전 세계 사람들과 그림을 공유하는 그런 형태의 플랫폼에도 계속해서 그림을 투고해왔다.
그러던 도중 은지의 그림을 좋게 본 한 시나리오 작가가 먼저 연락을 취해왔을 때, 은지는 웹툰 작가로 데뷔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감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휴우…….”
벌써 몇 번째 한숨인지 모른다.
본래는 동인계를 완전히 떠나려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돌아올 장소는 이곳밖에 없다.
다시 한번 노력하고 싶다.
그러한 열망으로 코믹 카니발에 참가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 부스를 할당받는 데에 성공했다.
내심 신청 시간이 조금 지나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하늘이 그녀를 도와줬는지 부스 참가자로서 코믹 카니발 막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이번 역은 학여울, 학여울역입니다. 내리실 곳은…….
‘드디어구나.’
큰 규모의 동인 행사가 자주 열리는 장소, 학여울역에 도착했다는 전철의 안내음에 따라 은지의 시선이 주변을 향한다.
동인 행사에 관심을 가질 법한 외형을 지닌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선다.
소위 말해서 ‘오타쿠’라 불리는 그들의 눈은 조금이라도 빨리 전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르르르!!!
갑자기 냅다 뛰어가는 게 아닌가!
이제는 이런 현상이 너무나도 익숙한 은지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면서 천천히 캐리어를 이끌고 간다.
그녀도 마음 같아선 뛰어가고 싶지만, 개인 회지가 들어 있는 캐리어 덕분에 뛰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리고 일반 참가가 아닌 부스 참가의 경우에는 대기줄이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일찍 왔다 하더라도 10~20분 정도만 잠시 줄을 서 있으면 금방 행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비해 제법 많은 여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읏차!”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 위를 올라간다.
가녀린 여자의 힘으로 큰 캐리어를 든 채 계단을 올라가는 건 중노동이다.
그래도 이런 과정을 예전부터 계속 반복해 왔기 때문에 힘들어도 꾹 참아낸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것보다 더한 힘듦을 겪었는데, 고작 무거운 캐리어 들고 거리도 짧은 계단을 못 올라가겠는가.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부터는 그래도 에스컬레이터가 있기 때문에 위로 향하는데 한결 수월해진다.
그러나 다시 계단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재차 캐리어를 든다.
겨우겨우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자, 은지의 시야에 행사장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매번 올 때마다 똑같구나.”
무수한 사람들.
그리고 또 사람들.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 대기줄에 은지가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이런 현상은 이미 많이 봐왔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 그 자체다.
‘일반 참가가 아닌 게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남들보다 빠르고 편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단점도 있다.
바로 가격의 차이다.
부스 입장표를 얻기 위해선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부스 신청을 해야 한다. 부스 참가비의 경우에는 6만 원으로 고정이 되어 있다.
즉, 은지가 가지고 있는 부스 입장은 다시 말해서 6만 원짜리 입장표인 셈이다.
참고로 일반 입장은 3천 원이다. 가격 차이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저 빨리 입장을 하고 싶다는 목적 하나만을 두고 부스 입장을 신청하기에는 일반 입장과 가격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난다. 5만 7천 원을 더 내야 하는데, 그 돈으로 차라리 다른 개인 회지들을 더 사들이는 게 이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브 컬쳐에 취미를 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연령대가 낮은 편이다.
대개 학생인 경우가 많은데, 사치를 부리기에는 아직 여러모로 여유가 없다.
은지도 처음에는 일반 참가자로 코믹 카니발에 자주 오가고 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웹툰 작가 지망생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부스 참가자로 전향을 하게 되었다.
부스를 내면 그래도 나름 잘 팔리는 축에 속하기 때문에 적어도 부스 입장에 투자한 돈 이상은 벌어들일 수 있다.
‘그래, 오랜만에 온 행사인데 기분 좋게 해보자!’
속으로 다시 텐션을 끌어올리며 캐리어를 이끌고 거침없이 행사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아까와는 다르게 경쾌한 리듬을 띄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