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70화
21. 동인 문화(1)
매섭게 키보드를 두들기던 아이티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우석과 릴리아나를 바라본다.
“굳이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깨워놓고 일을 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그렇게 불만을 내뱉는다면, 근처에 있는 모니터 하나를 본보기로 부숴버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라, 아이티.”
“……알고 있다니까.”
릴리아나의 협박에 결국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아이티였다.
때는 30분 전.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나서 이제 슬슬 잠을 자볼까 하는 생각으로 침대 위에 몸을 날리려고 했던 그였으나, 갑작스럽게 아이티의 귓가에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려오게 된다.
방문자를 알리는 초인종 소리.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이티는 많은 심적 고민에 빠져야 했다.
누가 찾아오게 되었는지는 굳이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도 없다.
보나 마나 뻔하다. 이우석 아니면 릴리아나. 둘 중 한 명일 확률이 거의 100%에 한없이 가깝다.
“하필이면 이 시간에…….”
오전 9시.
보통 샐러리맨들의 출근 시간이기도 하다.
즉, 출근 시간에 딱 맞춰서 아이티의 집에 방문한 셈이다.
어차피 지금 이 시각에 찾아온 불청객의 방문을 무시한다면, 아이티의 소중한 수집품들이 단순한 고철 덩어리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그걸 염두에 둔다면, 무시한다는 선택지는 결코 고를 수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현관문을 열어준 아이티.
그의 시야에 역시나 예상했던 두 명의 인물이 한꺼번에 포착된다.
“저번에 부탁했던 걸 확인하려고 왔다. 어떻게 되었지?”
우석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아이티는 이런 말을 들려주게 된다.
“……지금 당장 하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30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아이티가 우석과 릴리아나에게 프린트물을 나눠준다.
“코믹 카니발에 관한 일정 사항과 기타 참가하는 부스 명단을 정리한 파일입니다.”
“음…….”
저번에 부산으로 출장을 갔을 당시 만났던 웹툰 작가, 네이민으로부터 얻은 정보 중 동인 행사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
그 때문에 얼마 전, 아이티한테 동인 행사에 관한 자료 조사를 의뢰했던 우석.
그의 앞에 아이티가 저번에 말했던 동인 행사 중 하나인 코믹 카니발(Comic carnival)에 관한 자료들이 손에 쥐어진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인 행사로서, 아마추어뿐만이 아니라 프로들도 자주 참가하는 동인 행사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세계의 주인님이 원하는 프로급 이상의 퀄리티를 지니고 있는 부스들의 명단도 거기에 적혀 있으니 그 프린트물을 보시면 될 겁니다.”
“알았다. 이거와는 별개로 나중에 문서 파일로 정리해서 따로 회사 메일로 보내도록.”
“네. 그렇게 합지요.”
건성으로 대답하는 아이티의 말에서 ‘빨리 자고 싶다’라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의 모습에 우석이 피식 웃음을 토로하며 가볍게 아이티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고생했다. 이제 수면 좀 취해라.”
“릴리아나를 데리고 나가주신다면 좀 더 편안한 수면을 취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만…….”
“그러도록 하지.”
아이티가 릴리아나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건 우석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정보원으로서 많은 고생을 해주고 있는 아이티에게 적어도 수면권 정도는 보장해준다는 듯이 릴리아나를 데리고 집 바깥으로 나서는 우석.
이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그대로 침대 위로 누워보지만…….
“……젠장, 잠 다 깼네.”
꿈나라로 향하는 기차를 한 번 놓치게 되었으니, 그다음 차를 기다려야 할 듯하다.
* * *
아이티가 살고 있는 원룸을 잠시 거쳐 릴리아나와 함께 출근길을 서두르게 된 우석은 오자마자 두 가지 소식을 한꺼번에 접하게 되었다.
“우석아.”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철수가 우석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아까 K 로지 쪽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K 로지?”
“어.”
외부 업체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는 건 철수와 릴리아나가 번갈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릴리아나는 주로 우석과 같이 작가를 만나러 나가거나 혹은 타 업체와의 미팅이 있을 때 보좌 개념으로 거의 항시 동행을 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론 철수가 주로 그녀의 업무까지 소화하는 편이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자잘한 문제의 경우에는 웬만해선 철수와 K 로지 쪽 담당자가 서로 연락을 취해 해결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석에게 보고를 할 정도이니, 철수의 선에서 해결하기에는 뭔가 큰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닐까 예상한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쪽 대표님이 너와 만나고 싶다는데.”
“문태현 대표인가.”
“그러겠지.”
“음…….”
조만간 K 로지 쪽에서도 접선이 올 거란 예상은 했다.
이미 이런 요청은 우석의 계산 하에 들어가 있는 터라 별다른 고민 없이 답변을 들려준다.
“알았어. 나중에 너랑 연락하는 담당자 통해서 내 개인 전화번호 알려주고, 시간 될 때 언제든지 연락하라고그래. 가급적이면 오늘이 좋겠다는 말도 해주고.”
“오케이.”
스케줄상으로는 그나마 오늘이 가장 한가한 편이다.
미팅하다가 도중에 전화가 오기라도 하면 난감하기 때문에 일부러 오늘 연락을 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철수가 K 로지 쪽에 연락을 취하는 동안.
“좋은 아침이에요, 우석 씨.”
“안녕하세요. 지혜 씨도 좋은 아침입니다.”
“네. 저기…….”
잠시 뜸을 들이는 그녀의 모습.
뭔가 눈치챈 우석이 슬쩍 회의실을 가리킨다.
“긴히 할 말이 있다면 회의실 안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까요.”
“예, 우선은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녀의 동의를 구한 뒤, 두 사람이 나란히 회의실에 자리를 잡는다.
굳이 회의실로 장소를 이동했다는 건, 릴리아나나 철수, 그리고 오태준에게 들려주기에는 민감한 이야기가 될 것이리라 예상된다.
“뭔지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실은 말이죠…….”
지혜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흐른다.
그러기를 잠시 후.
“얼마 전에 봤던 오디션에서 합격했어요.”
“오, 정말입니까.”
“네. 어제저녁에 연락이 왔더라고요. 빠르면 다음 주부터 연습실이 나와줬으면 한다는데…….”
“잘 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아하하…….”
그러나 지혜는 솔직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왜 이런 어중간한 반응을 보이는지 우석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오디션에 합격해 연습실을 오가며 연예계 데뷔를 준비한다는 말은, 곧 반드 미디어에서 일을 하는 게 힘들어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우석 씨.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아닙니다. 그보다 지혜 씨의 미래가 더 중요하지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일단 기간을 조정해야겠군요. 다음 주라고 하셨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릴리아나와 함께 상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원들에게 들려줘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만.”
“아, 그럼 점심식사 같이할 때 이야기하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이런 기쁜 소식은 타인의 입이 아닌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들려주는 게 좋다.
한편, 지혜가 오디션에 합격함으로 인해 반드 미디어는 인원 확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우석은 반드 미디어의 규모를 좀 더 키워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왕 뽑는 거, 우수한 인재를 다수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 * *
“축하드려요. 지혜 씨.”
“축하드립니다!”
철수를 비롯해 오태준, 그리고 릴리아나까지.
반드 미디어 사원들이 지혜의 오디션 합격을 축하해 주기 시작한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이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고맙다는 제스처를 선보이는 그녀.
그 와중에 철수가 목소리를 높여 우석을 향해 외친다.
“야, 우석아. 지혜 씨 오디션 합격 기념으로 오늘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회식이라…….”
졸지에 회식 제안을 받게 된 우석이 잠시 고민을 해본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친다.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오늘 당장은 이르고, 어차피 이번 주까지는 지혜 씨도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해야 하니 이번 주 금요일 저녁으로 잡자. 어차피 그때가 지혜 씨의 마지막 출근일이기도 하니까.”
“마지막 출근이라…… 그렇게 들으니까 막상 섭섭하기도 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철수도, 태준도, 그리고 릴리아나도 사람인 이상 섭섭한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회사에서 가족같이 지내며 함께 일해온 사이 아니겠는가.
분위기가 축 처질 거 같은 낌새를 보이자, 우석이 먼저 입을 열며 말을 꺼낸다.
“그 이야기는 일단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은 지혜 씨가 잘되기를 기원해 주자.”
“그래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오디션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이게 끝은 아니다.
겨우 이제 시작이다.
프로 가수로서 무대 위를 밟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구슬땀을 흘려야 할 일만 남은 셈이다.
남겨진 자들은 최대한 지혜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혜 씨, 나중에 잘되더라도 우리 잊으면 안 돼요!”
“물론이죠.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철수의 말에 지혜가 빙그레 웃어 보인다.
그녀 역시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활동하는 분야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이들과 연락을 끊고 지낼 생각은 없다.
물론 예전만큼 자주 얼굴을 마주하거나 할 일은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인연들 아니겠는가.
특히나 이우석은 자신을 구원해 준 사람이다.
이성적으로도 많은 호감을 지니고 있는 우석과 멀어진다는 사실이 지혜에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훗날, 자신이 좀 더 멋진 여자가 되어 우석의 앞에 서면 된다.
그럼 우석도 조금은 그녀를 돌아봐주지 않을까.
“자, 그럼 식사들 합시다.”
지혜의 깜짝 발표는 이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우석의 말과 함께 점심에 열중하기 시작하는 반드 미디어 식구들.
그때, 우석의 스마트폰이 테이블 위에서 통화 알림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모르는 번호군.”
저장이 되어 있지 않은 번호가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 위에 새겨진다.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도 아니고, 일반 휴대폰 번호임으로 보아선 스펨 전화일 확률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네.”
“갔다 와.”
사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홀로 가게 바깥을 나온 우석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반드 미디어 대표 이우석입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치자, 스마트폰 너머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번호가 맞군요. 아닌 줄 알고 긴장했습니다.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행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우석이 처음 듣는 목소리에 재차 그의 정체를 묻는다.
“누구십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소개가 늦었군요.
상대편 남자가 미안하다는 뉘앙스로 먼저 사과를 건네준 뒤.
침착하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K 로지 대표, 문태현이라고 합니다. 이우석 대표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