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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68화 (68/201)

갑질의 신 68화

20. 감정이입(3)

타닥, 타닥.

SNS를 통해서 이제 막 홍보 문구를 키보드로 입력한 20대의 젊은 여성, 이은지가 캄캄한 방 안에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옅은 한숨을 자아낸다.

“이것으로…… 행사 준비 완료구나.”

1년 동안 동인 행사에 참가해 왔던 그녀지만, 여러모로 커다란 사건이 있던 탓에 한동안 참가하지 못했었다.

근 6개월만의 복귀.

그녀의 동인행사 부스 참가 소식이 올라가자마자 여기저기서 그녀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던 축하 메시지와 함께 그녀가 올린 홍보 게시물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XX님이 소식을 공유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마구 새겨진다.

올린 지 채 1분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공유 메시지가 50개를 돌파한다.

상당히 기쁜 일이다.

이은지라는 만화가를 잊지 않고 지금까지 기다려준 사람들이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팬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이은지의 마음속에 새겨진 깊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는 없다.

“……설마 다시 펜을 잡게 될 줄은 몰랐어.”

그래도 은지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이렇게 만화를 그리는 것뿐이다.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만화가가 꿈이다.

그러나 이 꿈을 계속 간직해도 되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은지의 만화가로서의 생명을 억압하는 듯이 스마트폰이 계속적으로 울리기 시작한다.

통화를 걸어온 상대방을 확인하자마자 은지가 자신도 모르기 폰을 침대 쪽으로 던져 버린다.

이윽고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봤다는 식으로 외면을 한다.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일이……!”

* * *

“저기…… 스승님.”

“왜 그러지? 나의 사랑스러운 제자여.”

“정말 스승님이 글을 쓰는 모습을 지켜만 봐도 되나요?”

“그렇게만 하면 된다……. 크큭.”

확인 차원에서 다시 한번 물어보는 연주.

얼마 전, 글을 잘 쓸 수 있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던 연주였지만, 소봉예화가 들려준 대답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이 글을 쓰는 장면을 관찰하라.

그것도 1~2분 정도가 아니다.

기간의 제한이 없다.

이 관찰 행위의 끝은 소봉예화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끝이 나게 된다.

즉, 깨닫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이런 과정이 반복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연주는 스스로 이 과정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글도 잘 안 써진다.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다시 펜을 쥐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며 재충전을 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만약 소봉예화가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녀도 글을 잘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단 소봉예화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이게 다다.

그러나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소봉예화의 경우에는 심각한 중2병이다. 소주와 맥주를 혼합한 알코올 음료, 소맥을 가지고 천사의 눈물과 악마의 목소리가 합쳐진 성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여하튼 그녀의 중2병 콘셉트는 연주와 사실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다.

처음에는 소봉예화와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지 못할 거라 예상했던 연주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찌 저찌 그녀와 잘 어울리고 있는 중이다.

하나, 이번만큼은 납득하기 힘들다.

‘글을 쓰는 모습을 본다고 뭔가 달라질 거 같진 않은데…….’

차라리 직접적으로 이건 이런 기법을 사용하면 되고, 현재의 트렌드는 이것이니까 요런 소재를 사용해서 쓰면 된다라는 식의 이론적인 설명을 듣는 편이 더 속 시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내놓은 소봉예화의 답안은 상당히 추상적이다.

남이 글을 쓰는 걸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도 스승이 하라는데, 문하생의 신분으로서 대들기에는 모양새가 안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 모양인지 일단 얌전히 따르기로 한 연주였다.

“그럼 상상의 나라로 출발하기 위한 기차에 올라볼까……!”

“슬슬 글을 써보겠다는 말이지요?”

“……그렇다.”

나름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다 보니 이제는 알게 모르게 소봉예화의 말을 해석할 수 있는 단계까지 들어섰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글을 적어가기 시작하는 소봉예화.

사실 연주는 다른 이들이 집필하는 모습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알고 지내는 동료 작가도 없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 한 공간에 머물며 같이 글을 쓴 적도 없다.

거의 소봉예화가 유일하다 해도 무방하다.

타다닥!!

거침없이 키보드를 눌러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연주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온다.

그간 연주가 소봉예화의 집필 습관을 본 결과, 그녀는 대략 3~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해서 키보드를 눌러댄다.

유료 연재 기준으로 한 편수 당 글자 수는 대략 5천 자 정도가 된다. 소봉예화의 경우에는 이 5천 자를 쓰는 데에 넉넉잡아 1시간이 소요된다.

결국 3~4시간을 쉬지 않고 쓴다는 의미는, 15,000자에서 이만 자 정도의 글이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작업 시간과 작업량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다른 쪽과 비교를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판무협의 경우에는 한 권당 기준이 12만 5천 자 정도가 된다.

물론 로맨스라든지 다른 일반서 장르의 경우에는 이 기준선보다도 높은 상한선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한 권당 12만 5천 자라는 기준을 적용시킨다면, 소봉예화는 4시간을 투자해서 책의 6분의 1가량을 쓰는 셈이 된다.

이것을 하루에 3번 정도만 반복한다면 총 완성될 수 있는 분량은 6만 자. 다시 말해서, 하루 만에 책 반 권 분량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론적으로 따진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집필 속도라 할 수 있다.

연주가 소봉예화와 같이 작업을 하면서 가장 부럽다고 느낀 것이 바로 ‘빠른 집필 속도’였다.

글을 빠르게 쓰면서도 동시에 퀄리티가 유지된다. 가장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봉예화는 이 일을 막힘없이 소화해 내는 재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 우연히 알아낸 사실이지만, 최근 소봉예화는 웹툰 쪽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글뿐만이 아니라 그림 쪽에도 상당한 퀄리티를 낼 수 있는 손과 머리를 가진 여자.

그녀가 바로 소봉예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음침한 아우라만 느껴지는 언니 같아 보이는데, 작품 활동을 하게 될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거 같단 말이야.’

소봉예화가 말했던 그대로 그녀의 모습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대략 몇 시간…… 아니, 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기간 동안 지켜봐야 한다니.

벌써부터 장기 레이스의 조짐을 보이는 소봉예화식 슬럼프 극복 교육 방법에 연주가 혼자서 몰래 한숨을 내쉰다.

* * *

연주가 소봉예화로부터 특이한 교육 방식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반드 미디어의 영업 활동은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 명성을 장르문학 업계에 떨쳐가고 있었다.

최근에는 웹툰 사업까지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덕분에 여러 업체에서 다양한 반응을 접하는 중이다.

민아 출판사와 같이 장르문학 소설에만 치중하는 곳과는 다르게 SCN이라든지 K 로지 등 플랫폼을 지니고 있는 회사의 경우에는 반드 미디어가 웹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반드 미디어가 또 손을 건든단 말이지…….”

K 로지의 문태현 대표가 작은 목소리를 자아낸다.

아직까지 K 로지와 반드 미디어는 밀접한 관련이 없다.

현재 반드 미디어에서 제공하고 있는 콘텐츠들은 SCN의 M 컬쳐에 선연재가 걸려 있기 때문에 다른 플랫폼들과 딱히 크게 작업을 하고 있진 않다.

물론 선연재 기간이 끝난 이후에 다른 플랫폼들에서도 연재가 시작될 예정이며, 그때 플랫폼마다 본격적으로 프로모션을 걸어주겠다는 이야기 정도는 오간 적이 있다.

K 로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M 컬쳐에서 소봉예화가 연재하고 있는 눈물 비를 비롯해 윤단순의 충신학도 등 다양한 콘텐츠들이 K 로지에서도 똑같이 연재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태현은 반드 미디어의 수장인 이우석과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의 산하에서 일 처리를 끝내고, 배너 관련 일정이라든지 스케줄, 그리고 콘텐츠 수급 등 계약으로 체결된 부분을 보고상으로 들은 바가 전부였기 때문에 우석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없었다.

태현의 일정도 바빴을뿐더러, 신생 매니지먼트라고 했기에 K 로지의 대표인 그가 직접 그 매니지먼트의 대표와 정상회담을 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신생 업체라고 직접 상대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뼈저린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M 컬쳐의 상위 연재 랭킹은 전부 다 반드 미디어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들이 차지하고 있다.

무료 연재뿐만이 아니라 유료 연재까지.

아마 권수가 좀 더 쌓이고 전자책이 나온다면, E북 판매 쪽에서도 반드 미디어가 M 컬쳐의 소설 파트 랭킹을 전부 다 휩쓸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설마 그런 거물이 이 업계에 있을 줄이야…….’

가끔 영업쪽이라든지 아니면 창작활동 쪽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 인재들이 간혹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석의 경우는 뭔가 다르다.

출판업계에 전혀 종사하지 않았던 자가 갑자기 이 장르문학 업계를 싹 쓸다시피 하고 있는 중이다.

문태현이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을 것이다.

“…….”

스마트폰을 들어 특정 인물의 전화번호를 찾는다.

통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상대방은 바로 민아 출판사의 이인정 대표.

짧은 신호음이 들려온 직후, 이인정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태현의 귓가에 들려온다.

-아니, 자네가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하하, 별건 아니고요…… 대표님한테 한 가지 여쭙고자 하는 게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나한테?

“예. 혹시…… 이우석이라는 남자에 대한 정보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반드 미디어 이야기로군.

그쪽 이야기가 나오자, 이인정 대표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빠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최근, 민아 출판사는 반드 미디어로부터 괜찮은 인재 한 명을 거의 빼앗기다시피 하게 되었다.

우석의 스카우트 제의 덕분에 이직을 선택하게 된 오태준에 관한 건수 때문이다.

얼마 전, 오태준은 민아 출판사에 직접 방문을 해 이인정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전화상으로 관두겠다고 말을 하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민아 출판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처음 그의 사표를 받았을 당시, 이인정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패닉 상태였다.

오태준은 나름 준수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인재다.

게다가 이 업계가 본래 항상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분야 중 하나다.

요즘 사람 구하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종이책 출판사에서 근 5년 동안 일을 해온 중견 사원이 갑자기 사퇴를 내민다는 건 회사 대표의 입장에서 섭섭해할 만한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태준의 발목을 잡을 방법이 없다.

그가 정확하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인정은 틀림없이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반드 미디어 측에서 분명 민아 출판사가 주고 있는 연봉보다 훨씬 웃도는 연봉 금액을 제안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샐러리맨이 이직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근무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아니면 월급이 적거나.

두 가지만 따져 봐도 금세 답이 나온다.

결국 반드 미디어를 선택한 오태준은 민아 출판사라는 둥지를 떠나게 되었다.

그래도 대놓고 우석에게 섭섭함을 표시할 수도 없다.

반드 미디어에서 제공되는 종이책 출판 작업 중 일부는 민아 출판사에게 의뢰를 맡기고 있다.

그게 끊기게 된다면, 제법 난감한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웹상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인데, 그 소설의 종이책 작업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섭섭한 감정은 감정대로 남고, 겉으로는 여전히 을의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이 민아 출판사의 입장이다.

-이우석 대표라…….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인정이 재차 말을 이어간다.

-전화상으로 할 말은 아닌 거 같구나. 나중에 한번 얼굴 보면서 이야기해 주마.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성사된 이인정과의 만남.

과연 이우석이란 남자가 어떤 자이길래 이인정을 이렇게 난감한 상황까지 몰아붙인 것일까.

태현의 머릿속에는 궁금증만 감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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