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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67화 (67/201)

갑질의 신 67화

20. 감정이입(2)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우석과 릴리아나가 향한 곳은 바로 해운대 인근에 위치한 어느 작은 카페였다.

가게 안에서 자리를 잡은 채 따스한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고 있을 무렵.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뜸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과의 말부터 먼저 전하는 젊은 여성의 반응에 우석은 그저 느긋한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네이민 작가님 맞으신지요?”

“네, 네!”

“그렇군요. 전화상으로 들었을 때, 그래도 한 서른 살에 가까우신 분인 줄 알았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젊으신 거 같아서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하하.”

“그…… 런가요?”

우석은 이번에 새로 벌일 콘텐츠 사업, 웹툰 연재를 위해 일부러 부산까지 내려와 실력 있는 그림 작가와의 미팅을 주선하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네이민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젊은 여성 작가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SNS를 비롯해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맛깔나는 스토리와 더불어 경력이 오래된 프로와 견주어봐도 전혀 뒤처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는 신흥 웹툰 강자로 손꼽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화염룡의 제보에 의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아이티로부터 연락처 등 정보를 입수한 끝에 이렇게 접촉을 하는 데에 성공하게 되었다.

“드시고 싶으신 음료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제 비서에게 따로 주문을 하게끔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전 바닐라라떼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우석이 슬쩍 눈짓을 보내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릴리아나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 커피 가게 카운터로 향한다.

미팅 때에는 이렇게 자잘한 심부름을 하는 것이 릴리아나의 전담 일이기도 하다.

릴리아나가 주문을 하는 사이, 우석이 먼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K 로지에서 연재하고 있는 웹툰, ‘그 사람과’ 잘 보고 있습니다. 그림에 대해선…… 전문적인 교육을 수료하신 이후에 웹툰 작가의 길로 들어서신 건가요?”

“아니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냥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좋은 기회를 얻게 되어서 웹툰 작가로 들어선 경우에요. 요즘 들어서 특히나 저처럼 이런 식으로 웹툰을 연재하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기회라는 말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까?”

“다른 건 아니고요…… 동인 행사 같은 거에 자주 참가하다 보니 업계 관계자 눈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동인 행사?”

“예.”

우석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간다.

서브컬쳐(Subculture).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만, 네이민이 의도하고자 하는 뜻과 부합하게 된다면 오타쿠 문화에 근접한 의미를 지닌 단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보여진다.

동인 업계라 불리는 분야에선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들이 자신의 그림 실력을 뽐내면서 타인과 활발하게 교류를 펼치곤 한다.

그림을 그리는 자들에겐 열린 마당과도 같은 곳이다.

‘생각을 해보면…… 인재들이 무궁무진하게 포진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지.’

서브컬쳐 문화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직접적으로 작가를 컨텍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우석이기에 네이민의 말은 그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편, 동인 쪽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모양인지 네이민의 입이 슬슬 풀리기 시작한다.

“나중에 한 번 행사 같은 곳도 와보세요. 가보시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행사가 열리는 주기 같은 게 정해져 있나요?”

“예. 두 달 간격으로 열리는 때도 있긴 한데…… 매달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행사도 있고요. 그리고 다른 행사들도 많이 있으니까 자주 접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또 한 가지 일이 늘어나게 된 셈이다.

* * *

“동인 행사?”

키보드를 두드리던 철수가 우석의 말에 되묻듯 묻는다.

“그래. 동인 행사라고 하는데…… 들어본 적 없나.”

“나야 그런 건 전혀 모르니까. 그런 게 뭔데?”

동인 행사의 의미 자체를 잘 알지 못하는 듯한 반응을 선보인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업무를 진행하고 있던 지혜가 철수를 대신해서 우석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다.

“그거…… 혹시 그런 거 아닌가요? 오타쿠 문화 같은 거요.”

“지혜 씨는 그래도 들어본 적은 있나 보군요.”

“네. 학창 시절 때…… 이렇게 말하니까 좀 나이 들어 보이긴 하는데, 아무튼 고등학교 시절 때 옆 짝꿍 친구가 그런 쪽을 많이 좋아했거든요. 만화책 같은 거 많이 보고, 그…… 애니메이션도 자주 보고 그랬어요.”

지혜의 설명이 도움이 된 걸까.

철수도 이제야 얼추 알게 된 모양인지 대화에 재차 참여한다.

“그런 거라면 나도 대략은 알지. 그런데 그건 왜?”

“서울 쪽에 열리는 동인 행사의 종류라든지 기간 같은 걸 좀 알아볼까 해서.”

“그걸 뭣 하러?”

“한번 참가해 보게.”

“뭐어?!”

예상하지 못한 우석의 말 덕분에 철수가 놀라움을 토로한다.

물론 지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소설 콘텐츠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회사다. 그런데 서브컬쳐 업계에 발을 들여놔서 무슨 이득을 취하겠는가.

그러나 우석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부산에 내려가서 네이민 작가와 미팅을 하는 도중에 깨달은 사실인데…… 우리가 원하는 ‘신인이면서도 실력이 되는 인재’가 동인 쪽 행사에 많이 참가한다고 하더군.”

“그런 쪽에서 많이 활동을 하고 있을 줄이야…… 몰랐네.”

새로운 분야에 접한 듯 계속해서 말을 되새기기 시작하는 철수였지만, 우석의 말은 끊길 줄 모르는 듯이 계속 이어진다.

“한 번 돌아봐서 괜찮은 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미팅 들어가는 편이 좋을 거 같다.”

“그거야 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 사람들이 우리의 말에 응해줄까? 아마추어일수록 유명 플랫폼, 혹은 유명 업체 아니면 신생 기업은 가급적 피하려고 하잖아.”

대한민국은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머리가 좋은 부류에 속한다는 건 상당히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좋은 머리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꽤나 된다.

웹툰 업계에도 이런 사기 행각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자신이 데뷔를 시켜주겠다는 사탕발림으로 아마추어들에게 접근을 한다. 이윽고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들이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신인을 그 회사의 종으로 만들다시피 해버린다.

그 덕분에 상당히 많은 피해를 본 아마추어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신인들은 신생 업체랑 잘 계약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실제로 우석이 신인 작가들과 계약을 할 때 당시만 하더라도 신뢰도가 상당히 낮은 눈빛으로 이들을 대한 적이 빈번하게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우석이기에 철수의 이런 지적이 결코 가볍게 흘려넘겨선 안 될 문제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는 중이다.

“그 경계를 풀고 계약을 따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뭐…… 너라면 별로 걱정할 건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알아둬라. 한 번 닫힌 마음의 문은 쉽게 열 수 없다는 점을.”

철수답지 않게 진지한 말을 들려준다.

그의 말이 맞다.

이미 타인에게 한 번 배신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혹은 그에 관한 일을 접한 적이 있는 자의 마음을 열게 만들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우석이라는 인간으로 환생하기 전에, 라울 더 그레이너는 그런 식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접해왔다.

그중에는…….

가난으로 인해 상처받은 자신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좋은 말 하나 들려주마.”

나갈 채비를 갖추기 위해 겉옷을 집어 든 우석이 흘리듯 가볍게 말을 내뱉는다.

“마음의 문이라는 것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문의 잠금장치에 걸맞은 열쇠를 찾아내는 평화적인 수단도 있고, 혹은 문을 부수고 강제적으로 열게 만드는 폭력적인 수단도 있지. 하지만 두 방식보다도 가장 효율적으로 문을 여는 방법이 뭔지 아나?”

“……글쎄.”

“바로 ‘문을 걸어 잠근 사람이 스스로 문을 열게끔 만드는 것’이다.”

사람에게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문 바깥의 세상이 결코 더럽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우석은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왔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 *

사무실을 나선 뒤 아이티가 머물고 있는 원룸으로 향한 우석.

그의 뒤를 따라 릴리아나 역시 빠르게 걸음을 재촉한다.

부산에서 돌아오고 나서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릴리아나의 입장에선 1박 2일의 출장까지 갔다 왔으니 조금은 쉬는 게 어떻냐고 휴식을 제안하고 싶지만, 이미 우석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해 들려줬을 뿐이다.

우석의 의지를 꺾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미 전부터 잘 인지해온 릴리아나이기에 그저 우석에게 보다 더 많은 피로가 쌓이지 않게끔 자신도 열심히 움직이자는 마음가짐으로 그의 뒤를 쫓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아이티의 원룸 현관문.

“문 열도록.”

“예, 알겠습니다.”

우석의 명령을 받은 릴리아나가 빠르게 숫자 버튼을 꾹꾹 눌러가기 시작한다.

초인종조차 누르지 않고 대뜸 잠금장치 비밀번호부터 입력한다.

띠링!

문이 열리자마자 우석과 릴리아나가 실내로 들이닥친다.

때마침 모니터를 통해서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아이티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강력하게 항의한다.

“용무가 있어서 찾아올 거라면 하다못해 초인종이라도 누…….”

“의뢰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지금 당장 정보 좀 모아줬으면 하는데.”

“…….”

우석의 말에는 찍소리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거절했다간 결재를 받지 못할뿐더러, 뒤에 무시무시한 여성 악마, 릴리아나가 언제 아이티의 소중한 컬렉션들을 박살 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신지요.”

결국 다시 본업으로 돌아온 아이티가 무거운 한숨을 속으로 삼킨다.

세계의 주인이 해달라는데, 어찌 감히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두 가지 정도만 조사해주면 된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주로 활동하는 그림 업로드 플랫폼 사이트 목록을 정리해서 나에게 보낼 것, 그리고 오늘을 기준으로 향후 두 달 이내에 열릴 동인 행사 스케줄을 조사할 것.”

“동인 행사?”

“알고 있나?”

반드 미디어에서 철수와 지혜에게 했던 질문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개념조차 전혀 모르던 철수와 그나마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지혜와는 다르게 아이티는 빠삭한 지식을 자랑한다.

“서브컬쳐 관련 행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역시 정보의 신이군.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지.”

소설 작가 모집과는 다르게 그림이란 분야는 좀 더 다른 시선과 접근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

웹소설보다도 더욱 많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는 콘텐츠가 바로 웹툰(Webtoon)이다.

반드 미디어는 소설 콘텐츠만 공급하는 형태의 매니지먼트 업체가 아니다.

웹소설뿐만이 아니라 웹툰,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영상 콘텐츠까지 노리고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사업 확장을 위해서라도 다양한 인재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다.

웹툰 작가 모집을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을 다수 보유한다면, 훗날 반드 미디어가 연재하고 있는 소설들도 웹툰화를 시킬 수 있게 된다.

결국 그림에 무궁한 재능을 지닌 인재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를 향한 교두보 같은 역할을 담당해 낼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다른 업체들이 가능성 있는 웹툰 작가들을 포섭하기 전에 미리 계약을 맺어야 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자가 콘텐츠 사업을 독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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