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66화
20. 감정이입(1)
쏴아아!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따스한 물줄기.
샤워기의 밑에서 얌전히 물의 감촉을 느끼고 있던 릴리아나가 젖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본다.
“…….”
현재 그녀는 지금, 해운대 근처에 위치한 어느 호텔 방 안에 들어와 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그녀가 모시고 있는 주인, 이우석과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아아…….”
“깊은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그대로 새어나온다.
비서는 때에 따라 성적인 의미로 세계의 주인을 위로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교육을 받은 적도 있다.
세계의 주인이란 직책을 지닌 자는 함부로 소흘하게 대할 수 없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해 이 세계의 운명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혹여나 세계의 주인이라는 자가 급격하게 변심이 생겨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한 결정을 내린다면, 수십…… 아니,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할 것이다.
물론 릴리아나는 우석이 함부로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세계의 주인이라는 자의 존재 가치는 상당하다 할 수 있다.
비서들은 이 세계의 주인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한다.
릴리아나뿐만이 아니라 방구석 폐인인 아이티, 그리고 최근에 합류한 소봉예화까지.
세계의 주인이 결재를 내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다.
결국 제한이 걸려 있는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세계의 주인에게 절대 복종을 약속해야 한다.
능력 사용 제한에 관한 사실도 있지만, 릴리아나는 우석을 세계의 주인과 비서의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존경한다.
그리고…….
어쩌면 사모하는 감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감정이 맞는지 아닌지 릴리아나도 제대로 알 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석을 보면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고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점이다.
‘내가 우석 님에게 연애 감정을? ……아니, 있을 수 없어. 그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야. 어찌 감히 주인과 비서가 서로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릴리아나의 상식선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세계의 주인이 비서를 아내로 받아들인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같이 행동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이라는 것의 깊이가 더해지는 법이다.
그 정이 한없이 계속해서 무럭무럭 커지게 되면, 사랑이란 이름의 열매를 맺기도 한다.
실제로 릴리아나가 비서 소양 교육을 받으면서도 그러한 사례들을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결코 과거의 비서들과는 달리 자신은 주인을 다른 시선으로 인지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수도 없이 강조했던 마음가짐이거늘…….
‘인간이란 마음은 정말…… 빈틈투성이구나.’
아직도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샤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면, 침대 위에 우석이 누워있을 것이다.
몸을 섞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까지 섞을 수는 없는 법.
‘세계의 주인님에게 이상한 감정을 품지 말자…… 난 그저 비서에 불과해.’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을 품고 수도꼭지를 잠근다.
큰 타월로 몸을 닦은 뒤 속옷과 티, 그리고 짧은 팬츠를 입은 채 호텔방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때마침 TV를 보고 있던 우석이 릴리아나의 등장을 눈치챈다.
“샤워 끝났나?”
“……예.”
차마 우석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녀의 이런 반응의 원인이 무엇인지 얼추 알고 있는 우석이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한테 알몸을 보여도 아무런 리액션조차 보이지 않던 네가 이제 와서 고작 같은 호텔방 한번 쓴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하다니. 뭔가 상황이 잘 안 맞는군.”
“그건…….”
그때 당시에는 우석을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포인트가 미묘하게 어긋난 여자.
그게 바로 릴리아나다.
“내일부터 또 일찍 나가봐야 하니까 슬슬 자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잔다는 말은, 우석과 릴리아나가 같은 침대 위에 누운 채 같은 이불을 공유하자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호텔 불을 끈 뒤 오른쪽에 눕는 우석.
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동작을 선보이며 바로 옆에 누운 릴리아나가 가급적이면 최대한 거리를 벌리기 위해 구석 쪽으로 향한다.
그러던 찰나에.
“앗?!”
순간적으로 릴리아나가 균형을 잡으면서 겨우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무마시킨다.
우석과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에서 인식하며 슬금슬금 반대편으로 이동을 하다가 발생한 창피스러운 사건이었다.
“좀 더 이쪽으로 와라. 그러다가 떨어진다.”
“그치만 제가 어찌 감히 우석 님과…….”
“몸을 섞자는 말도 아니고, 그저 같이 나란히 눕자는 말인데도 그렇게나 부끄러움을 타야 할 이유가 있나?”
“…….”
우석의 말대로다.
그리고 이대로 계속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우석에게 괜히 민폐를 끼칠 수 있다.
자신이 모시는 세계의 주인님에게 폐를 끼치는 것만큼 용서받지 못할 일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릴리아나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우석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그러던 과정에서 릴리아나의 손끝이 우석의 손과 마주 닿는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 그보다 슬슬 잠이나 자자.”
“……예.”
그나마 방 안의 불이 꺼져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품는 릴리아나였다.
만약 불이 환한 채로 켜져 있다면…….
사과보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우석에게 들통났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잠시 손이 맞닿은 것에 불과한데, 릴리아나 치고는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내가 정말 우석 님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기라도 하는 건가.’
마음 같으면 정보의 신이라 불리는 아이티에게 의뢰해서 ‘이 감정이 정말 사랑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싶지만,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올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는다.
아이티는 정보의 신이다.
정보의 신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감정까지 알아낼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단순하게 정보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
천천히 눈을 감아본다.
시각을 차단하자, 그 외적인 감각이 일시적으로 발달된다.
옆에서 들려오는 우석의 숨소리.
그의 움직임.
그리고…….
이우석이란 남자의 모든 것이 릴리아나의 심장을 자극한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 지 어언 1시간.
서서히 지쳐가는 그녀의 정신력이 수면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 * *
새벽 6시라는 비교적 이른 아침에 눈을 뜬 우석은 옆에서 곱게 잠이 든 릴리아나를 내려다본다.
아침에 빠른 기상을 취하는 릴리아나답지 않게 한참 잠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녀석도 고민이 많겠군.”
우석은 사실 릴리아나의 마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우석을 좋아한다.
사랑에 빠졌기에 낯선 감정에 동요를 하고 있다.
라울 더 그레이너라는 돈의 왕으로 살아가던 오랜 인생의 시간 동안 우석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남다른 안목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사랑에 빠진 여인이 어떤 모습과 행동을 보이는지도 제대로 인식되어 있다.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릴리아나이기 때문에 아마 스스로도 많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음 역시 가까워지는 법이지.”
릴리아나는 그 누구보다도 우석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며 생활해온 여인이다.
자연스럽게 이우석이라는 남자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을 터.
사실 릴리아나가 그에게 연애 감정을 품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석의 마음이다.
그녀의 감정을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솔직히 말해서 우석 역시 갈등하고 있다.
“사랑이란…… 참으로 어렵군.”
차라리 사랑도 돈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분야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석은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돈의 왕이라는 칭호를 차지할 만큼 부와 밀접한 인생을 보내왔기 때문에 돈의 단점과 약점 또한 잘 알고 있다.
“……못 말리는 비서로군.”
조심스럽게 릴리아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우석이 서서히 얼굴을 낮춘다.
이윽고…….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살짝 마주 댄다.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아주 짧게.
“불만족스럽겠지만…… 당분간은 이것으로 참거라. 나도 생각을 해볼 시간이 필요하니까.”
이마 위에 키스를 선사해준 우석이 최대한 행동에 유의하며 릴리아나가 깨지 않게 침대 밑으로 내려온다.
이윽고 갈아입을 옷을 챙긴 뒤 욕실로 향한다.
아침 샤워는 늘 그렇듯 사람의 기분을 개운하게 해준다.
이른 아침, 몸도 녹일 겸 해서 샤워를 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는 우석.
욕실로 들어간 뒤, 수도꼭지를 돌려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이하는 동안…….
“……!!”
눈을 번쩍 뜬 릴리아나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진다.
우석이 이마 키스를 할 때.
사실 그녀는 이미 잠에서 깬 상태였다.
우석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려고 타이밍을 보던 그녀였으나, 갑자기 우석의 예상치 못한 기습 이마 키스 덕분에 그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석 님이…… 나, 나에게……!!’
조심스럽게 이마를 매만지던 릴리아나가 자신의 오른 손가락들을 바라본다.
검지와 중지.
이 손가락의 끝에…… 우석의 채취가 남아 있다.
그의 입술.
사랑하는 이의 달콤한 향기가 릴리아나를 자극한다.
“…….”
조심스럽게.
혹여나 누가 눈치라도 챌까 봐 아주 신중하게…….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부드러운 입술 위에 올려놓는다.
그녀의 주인이 평생 눈치채지 못할 간접 키스.
이윽고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술 위에 놓여진 손가락을 뗀다.
그녀만의 소중한 비밀이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 * *
소봉예화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우석의 여동생, 이연주.
처음에는 그래도 첫 작품부터 당대 최고의 로맨스 작가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어마어마한 필력을 보유한 소봉예화이기에 분명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은 연주였으나.
현실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화염룡의 술주정과 더불어 소봉예화의 괴상한 판타지 설정이었다.
“잘 보거라, 나의 제자여. 이 흑색의 구슬이 꼴도 보기 싫은 백색으로 물들게 되는 순간……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악이 강림할 것이니라.”
“보통 악마의 컬러는 어둠이잖아요. 왜 백색이 악이랑 연결되는 건가요?”
“…….”
이제는 이런 식으로 소봉예화의 중2병 콘셉트 설정에 태클을 걸 만큼 이 상황에 익숙해져 버린 연주였다.
그녀의 질문에 예화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머리를 돌린다.
“어흠! 참고로 이 구슬의 정체는…….”
“그것보다도 스승님!”
연주가 오늘은 더 이상 그냥은 못 넘어가겠는지 예화의 말을 딱 자른다.
소봉예화의 문하생으로 들어온 지 어언 2주째.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배운 거라곤…… 전혀 없다.
그래서 오늘, 기어코 연주가 칼을 뽑아든다.
“이런 거 말고 글을 좀 더 잘 쓸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세요!”
“글을 잘 쓸 수 있는 비법?”
“네! 스승님이라면 분명 뭔가를 숨기고 계실 거예요!”
“…….”
연주를 지그시 바라보던 소봉예화가 옅은 한숨을 내쉰다.
무슨 의미가 담겨진 한숨일까.
“알았다. 특별히 제자에게 이 스승의 비결을 전수해주도록 하지.”
“저, 정말인가요?!”
“그래. 단, 각오하는 게 좋을 게야…… 크크큭…….”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자아내는 소봉예화였지만, 그녀가 지닌 필력의 비결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연주의 기대감은 벌써부터 하늘로 치솟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