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질의 신-65화 (65/201)

갑질의 신 65화

19. 문하생(門下生)(3)

우석과 릴리아나가 자리를 비웠을 때.

“……하아, 이 녀석…… 하필이면 이렇게 바쁠 때 출장이나 가고 말이야.”

늦은 밤까지 자리에 남아 PDF 확인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철수가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다음 달이면 소봉예화가 집필한 로맨스 소설이 1, 2권 동시에 출간이 될 예정이다.

일반적인 판무협 종이책도 아니고 양장본과 한정판 책을 따로 제작 중이기 때문에 제작에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이 더 필요하다.

심지어 한정판의 경우에는 일러스트집이 특전으로 포함되어 있어 작업하는 데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종이책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던 오태준도 소봉예화의 책을 출간 작업하는 데에 혼자서 도저히 소화할 자신이 없는 탓에 지원 요청을 하게 되었다.

그 지원 요청으로 투입된 인물이 바로 철수다.

사실 아르바이트생으로 있는 지혜에게 종이책 업무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어차피 반드 미디어 또한 종이책 업무 역시 동시에 소화를 할 예정이었다.

철수의 경우에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터라 가급적이면 종이책 출판 작업 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오태준에게만 종이책 업무를 전담으로 맡겨 버리면, 훗날 태준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회사에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출간일이 늦어지게 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사수가 있으면 부사수도 있어야 하는 법.

철수는 우석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오태준의 부사수를 자청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철수가 그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자신도 반드 미디어에 소속되어 있는 일원이기도 하고, 우석을 도와 회사를 번창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이번 업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재미도 있다.

지금까지 유료연재 업로드와 작가 관리만 주구장창 해오던 철수였으나, 종이책 출판 과정을 직접 배움으로 인해 전문적인 기술을 배웠다는 자부심도 생긴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을 소화하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

“피곤하시죠? 커피 좀 마시면서 하세요.”

“아…… 고맙습니다.”

어느새 커피까지 타온 태준이 자신을 도와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잔업을 처리하고 있는 철수를 위로해준다.

“괜히 저 때문에 오늘도 야근을 하시게 되었군요.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것보다 여기, 틀린 부분이 하나 있어서요. 포스트잇으로 따로 표기해 뒀습니다.”

“이런…… 감사합니다.”

종이책의 경우에는 유료연재와 다르게 들어가는 노력이 좀 더 많아진다.

1차적으로 작가 수정 원고를 보낼 파일을 작성한 뒤 작가에게 교정 확인을 받기 위해 다시 원고를 보낸다.

이어서 작가가 작가수정 원고를 검수한 뒤, 확인한 파일을 도로 편집자에게 보낸다.

편집자는 수급한 원고를 조판 양식에 따라 문서의 틀을 맞추고 마지막에 실제 종이책으로 나가는 것과 동일하게 PDF로 뽑아서 최종적으로 확인을 마친다.

표지와 함께 원고를 인쇄소에 넘기게 되면, 그대로 종이책이 출간이 되어 최종적으로 완성본이 탄생된다.

말은 간단할지 모르지만, 이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편집자는 틀을 맞추는 데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익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하는 스킬과 더불어서 교정을 볼 수 있게끔 표준어, 맞춤법 등등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종이책 업무를 소화할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철수의 경우에는 이제 막 교정교열을 배우는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제가 준 교정교열 정리 파일은 계속 보고 계시는 게 좋습니다. 하루에 최소 3번 이상만 정독하셔도 교정교열 실력이 급속도로 늘어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공부에 유독 자신이 없는 철수이기에 사실 교정교열을 배울 때 자신감보다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그러나 수학 공식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암기만 하면 되는 일인지라 지금까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태준의 교육을 잘 소화하고 있는 중이다.

“PDF 수정 보내고 난 뒤에 다시 확인하면 될 거 같습니다. 어차피 틀린 것도 하나밖에 안 나왔으니까 2차 수정 선에서 끝날 거 같군요.”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요…….”

지금만 하더라도 벌써 자정에 가까운 오후 11시 53분이다.

자정 시간에 퇴근하는 것이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벌써 3일째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늦은 퇴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중간에 우석과 릴리아나가 2교, 3교를 보면서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반드 미디어가 처음으로 출간하는 종이책이기 때문에 작업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신중함을 곁들이느라 속도가 많이 늦어지긴 했다.

그래도 만족할 만한 퀄리티의 책이 나온다면,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무슨 일을 하든 간에 항상 처음이 중요하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지 않는다면 그다음에 이어질 단추들 역시 잘못 잠기게 되기 때문이다.

PDF 수정 파일을 다시 보낸 뒤, 타온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며 자리에 앉는 태준.

그의 모습에서 뭔가 달인의 아우라가 풍겨져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쪽 분야에서 근 5년을 일해온 남자다. 이미 오태준에게 있어서 이런 일 정도는 일상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출판사에서 근무하면서 이런 식으로 야근을 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하죠.”

“힘들진 않나요?”

모처럼 태준과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자 먼저 철수가 질문을 꺼낸다.

다시 한번 커피를 들이켠 태준이 묘한 미소와 함께 답변을 들려준다.

“힘들긴 하지요. 박봉이기도 하고…… 그리고 사실, 편집자라는 직업이 그리 좋은 직업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이런 힘든 길을 택하셨나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다른 편집자들도 저와 같은 말을 들려줄 거라 확신합니다.”

잠시 커피잔을 내려놓은 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미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태준의 표정에서 단호한 결의가 풍겨져 나온다.

“책이 좋아서요. 단지 그뿐입니다.”

“책이 좋아서…….”

“네. 그 이외의 이유는 없어요.”

“…….”

태준의 말에는 거짓이 담겨져 있지 않다.

편집자는 어려운 직종이다. 가만히 앉아서 마우스와 키보드만 사용해 문서 작업만 하면 되는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작가들을 상대하는 일과 더불어 같이 작품을 기획하는 창작의 고통과 장르문학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꾸준히 책들을 접해야 하는 사명감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끔은 작가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종종 발생한다.

“책이 좋아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가끔 제가 담당하는 작가한테 몹쓸 짓도 해야 하는…… 참으로 안 좋은 직업이기도 하지요.”

“몹쓸 짓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책이 잘 팔리지 않으니 빠르게 완결을 치자는 식의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작가가 쓰고 싶은 글을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는 경우도 있지요. 참으로 씁쓸한 일이지요.”

“…….”

편집자인 이상, 담당 작가에게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정을 무시하고 쓴소리를 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닐 터.

“정신적인 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상당하지요. 그 점만 빼놓는다면, 편집자도 할 만합니다.”

“거의 못할 만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 셈이지요.”

5년에 불과하지만, 태준은 그간 못 볼 꼴 죄다 보면서 편집자 생활을 연이어 보내왔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에 철수 씨도 이 업계에서 계속 종사를 할 용의가 있다면, 그런 점을 충분히 숙지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주 잠시나마 출판업계를 얕봤던 철수였지만, 그게 잘못된 마음가짐이었음을 깨닫고 바로 고쳐먹기로 한다.

그 일이 할 만한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듣기 위해선 현업에 종사하는 자의 진실 어린 경험담을 듣는 것이 최고다.

철수는 오늘,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 * *

“…….”

“…….”

눈앞에 펼쳐져 있는 더블 침대.

순간 릴리아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우석과 릴리아나가 같은 이불을 사용한다.

그 생각을 품는 순간.

‘아니, 절대로 그럴 수 없어! 주인님과 같은 이불을 사용한다니…… 비서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야!’

속으로 그런 결심을 품은 릴리아나가 우석에게 정중히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먼저 입을 연다.

“우석 님. 제가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우석 님께서는 침대 위에서 주무심이…….”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네?”

갑자기 릴리아나의 말을 부정하는 우석.

그의 말에 오히려 릴리아나가 벙찐 표정을 짓는다.

“내가 바닥에서 잘 터이니 네가 침대에서 자라.”

“우, 우석 님! 절대로 그럴 순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건 제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양보 안 할 텐가?”

“설령 제 목숨이 다하는 날이 있더라도 우석 님을 바닥에서 재우고 제가 침대 위에서 자는 걸 방관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정되었군. 두 사람이서 같이 침대를 사용한다.”

“……?!”

릴리아나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의 연속이다.

두 사람이서 같은 침대를 사용한다는 것은…….

“설마…… 우석 님과 제가 가가가가가같은 이불 속에서……!”

“내가 바닥에서 자는 것도 싫다고 하지 않았나. 나 또한 멀쩡히 침대가 있는데 너 혼자서 바닥에 자는 건 원치 않는다. 괜히 바닥에서 잤다가 네 컨디션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치만…….”

릴리아나는 부산으로 오기 전, 차량을 동반한 텔레포트 능력을 발동한 적이 있다.

덕분에 꽤나 많은 기력이 소진된 탓에 우석은 그녀에게 호텔에 먼저 들어가 쉴 것을 제안했다.

컨디션 조절을 잘못하게 된다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릴리아나의 텔레포트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 분명 너에게 호텔로 돌아가서 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때는 네가 고집을 부렸지. 내가 너의 고집을 한 번 받아줬으니, 너 또한 나의 말을 받아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

“할 말이 없다면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우석의 말이 맞다.

이미 우석은 그녀의 고집에 한 번 크게 수긍을 해줬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석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건 균등한 처사가 아니다.

게다가.

우석은 그녀에게 있어서 철저한 갑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우석이 ‘같이 잔다’라는 명령을 내리기만 해도 릴리아나는 딱히 그에게 뭐라 반론을 가할 순 없는 입장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은 그녀를 일부러 납득시키기 위해 간접적으로 침대를 두 사람이서 사용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아마 우석 나름대로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결국 우석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릴리아나.

하지만…….

‘우석 님과 같은 이불을 사용한다니…….’

릴리아나의 심장이 알게 모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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