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60화
17. 슬럼프(3)
수능이 끝난 덕분에 학교에서 일찍 하교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이른 하교가 좋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다.
“…….”
어느 한 건물을 올려다보는 여고생, 이연주.
그녀는 오늘…….
친오빠이기도 한 우석의 호출을 받고 반드 미디어라는 회사에 직접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오는 회사이기도 하지만, 지도 어플을 통해서 그래도 어찌어찌 여기까지 잘 찾아왔다.
하지만 찾아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막상 오니 들어가기가 싫다.
그녀가 우석에게 호출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원고를 마감일에 주지 못한 점 때문이다.
물론 우석의 말대로라면 회사 구경도 시켜줄 겸, 그리고 사람들 인사도 서로 해줄 겸해서 오라고 호출을 하긴 했지만, 아마도 마감을 어긴 것에 대한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보통 우석은 마감 한 번 어겼다고 출판사에 오라는 호출을 하거나 그러진 않다.
그러나 연주는 자신의 친동생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단계에 불과해서 최대한 주의해 관리를 하고자 연주를 이곳까지 부르게 되었다.
“오빠는…… 있겠지?”
오기 전에 전화라도 한번 해볼걸, 이란 후회를 뒤늦게나마 해보는 연주였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계단을 올라 도착한 3층 입구.
그곳에는 ‘반드 미디어’라는 상호명이 적힌 작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꿀꺽!
침을 한 번 크게 삼킨 연주가 입구에 있는 벨을 누른다.
띵동!
사무실 안에 울려 퍼지는 벨 소리.
그와 동시에 인터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 누구세요?
우석의 친구이기도 한 철수의 목소리다.
금방 철수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연주가 반가운 기색을 담아 말한다.
“저, 연주인데요.”
-연주? ……아! 오늘 오기로 했었지! 잠깐만 기다려라. 문 바로 열어줄게.
“네.”
철컹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자 철수가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다, 연주야. 그동안 잘 지냈고?”
“그럭저럭요.”
“수능은?”
“괜찮게 나왔어요. 부모님들도 나름 만족하시고요.”
“그래. 네 오빠도 그렇고 부모님들도 그렇고 너 하나만 보고 열심히 일하시니까. 그래도 네가 착하게 자라는 거 같아 나도 기쁘구나.”
“……네.”
우석과의 의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철수이기에 연주도 그에게 많은 고마움을 품고 있다.
덕립인쇄소에서 일할 당시에도 고지식과 마찰이 생겨 일을 관뒀을 때, 철수도 자진해서 회사를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직장을 관둘 정도로 우석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 있는 남자가 바로 철수다.
“우석이가 너한테 뭐 귀찮게 하거나 그러진 않지?”
“잘 대해주고 있어요.”
“짜식, 여동생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다니…… 역시 예전의 우석이와는 많이 달라졌단 말이야.”
철수도 은연중에 연주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예전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연주의 고민도 잘 상담해 줬다.
일단 우석의 제안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물론 아직까지 대학교 합격 발표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점수라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자, 어서 들어와라.”
“네.”
연주를 바깥에서 계속 세워두기도 좀 그런 모양인지 철수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식으로 손짓을 한다.
이곳이 바로…….
“우석 오빠가 일하는 사무실…….”
생각보다 그리 크진 않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가정집의 느낌이 상당히 많이 묻어나온다.
그녀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때마침 그곳에서 일을 보고 있던 오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먼저 건넨다.
“안녕하세요. 오태준이라고 합니다.”
“……이연주예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대표님의 여동생분이라고 하시던데, 듣던 대로 예쁘시군요.”
“고, 고맙습니다…….”
착한 사람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주의 성격상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친한 척을 하기도 힘들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은 오태준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그나마 안면이 좀 있는 사람과 인사할 차례가 돌아온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아가씨.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우석 님을 모시고 있는 릴리아나라고 합니다.”
“저번에 그 금발 언니……?”
“네, 맞습니다.”
우석이 반드 미디어라는 회사를 차리기 전…… 아니, 콘텐츠 재활용 사업을 하기 전에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금발 미인.
릴리아나와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경우는 그때 이후로 처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랜만에 만난다.
서로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일지 모르지만, 사실 전화상으로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왜냐하면 릴리아나가 연주의 담당이기 때문이다.
“마, 마감 못 지켜서 죄송해요!”
갑자기 대뜸 사과하기 시작하는 연주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릴리아나였다.
“괜찮습니다. 마감 정도야 어차피 스케줄 조정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니…….”
“그래도…….”
연주는 신인 작가다.
습작의 개수조차도 그리 많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마감을 어긴다는 죄책감의 무게가 상당한 편이다.
그러나 릴리아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연주의 사과를 만류한다.
“너무 그렇게 죄책감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그것보다 이런 태도를 보이시면 오히려 제가 우석 님을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주세요.”
“…….”
지금까지 릴리아나와 나름 오랫동안 일을 해온 철수였으나, 그녀가 이렇게까지 당황해하는 건 처음 본다.
아무래도 연주가 우석의 여동생이기 때문일까.
비록 릴리아나가 모시고 있는 주인이 우석, 단 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친족 역시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당혹감에 물든 눈빛을 하고 있는 릴리아나.
그리고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연주.
두 여성의 미묘한 상황을 지켜보던 철수가 결국 중재를 나선다.
“자자, 그쯤 해둡시다. 연주야, 일단 넌 가방부터 먼저 내려놓고. 그리고 릴리아나 씨는 우석이 좀 불러와 주세요. 연주가 왔는데 이 녀석,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네, 알겠습니다.”
릴리아나가 도망치듯 사무실 바깥을 나선다.
현재 우석은 근처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중개사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아마 연주가 왔다고 하면 바로 올 것이다.
릴리아나가 사무실에서 나가자, 연주가 무거운 한숨을 푸욱 내쉰다.
“저 때문에 많이 고생하실 텐데…… 볼 면목이 없네요.”
“그런 사고방식이 오히려 릴리아나 씨를 당황하게 만든다니까 그러네. 한숨 그만 쉬고 저쪽 방에 들어가 있어라.”
“저 방은 뭔가요?”
단촐하게 큰 테이블 하나와 대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져 있을 뿐인 공간이다.
“회의실이지.”
“그렇군요.”
“미리 들어가 있으면, 우석이 오자마자 회의실로 들여보낼 테니 거기 가서 이야기 좀 많이 나눠봐라. 요즘 글도 잘 안 써진다며?”
“……들으셨어요?”
“물론. 나도 작가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철수가 딱히 연주까지 담당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작가 관리 일을 하면서 얼추 담당자가 어떠한 일들을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고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공감대 정도는 형성할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창작 활동인데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면 일이 진행이 안 되니까. 차라리 노가다라면 시키는 것만 그대로 하면 될 텐데, 집필이라는 게 또 그런 건 아니잖냐?”
“……네.”
“그러니까 너무 주눅 들지 마. 그리고 넌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니까 부담 없이 생각하고.”
철수답지 않게 의외로 믿음직스러운 발언들을 들려준다.
그도 우석과 같이 일을 하면서 여러모로 성장했다.
물론 앞으로도 우석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수준까지 더 성장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 * *
우석을 데리러 가기 위해 잠시 사무실을 나선 릴리아나.
그때, 갑자기 그녀의 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선보인다.
“……?”
폰을 꺼내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을 확인하는 순간, 의아함이라는 감정이 먼저 든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은 반드 미디어에서 최고의 수익을 창출해 내고 있는 원동력, 소봉예화이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아, 릴리아나? 잠깐 통화 가능해?
말투로 보아선 소봉예화 쪽이 아닌 화염룡의 인격으로 판명된다.
“무슨 일이지?”
-간단한 부탁 좀 할까 해서.
“말해보도록.”
-아이티한테 연락해서 LC 엔터테인먼트라는 곳 좀 조사해달라고 말 좀 전해줘.
“출판사인가? 아니지…… 엔터테인먼트라고 한다면, 연예계 쪽이라고 알고 있는데.”
-응 맞아.
“무슨 일이 있길래 연예계 관련 회사를 조사하려는 거지?”
화염룡과 소봉예화.
한 몸에 두 인격을 지닌 이 인물은 반드 미디어 내에서도 특수 관리 대상이다.
혼자만으로 작가 10명 정도의 수익을 내는 것과 맞먹는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우석을 포함해서 릴리아나까지 2명이나 전담이 붙을 정도다.
특히나 우석이 직접 관리하는 작가는 소봉예화밖에 없다.
다른 작가들은 철수와 릴리아나가 나뉘어 관리를 하지만, 소봉예화만큼은 우석이 관리를 하고 있다.
그만큼 소봉예화라는 작가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시사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다른 건 아니고…… 지혜 씨가 이번에 회사 하루 쉬었잖아.
“그렇게 되었지.”
-공원에서 조깅하다가 지혜 씨를 만났거든. 들어보니까 오늘이 오디션 보는 날이라 하더라고.
“오디션이라…….”
회사에서는 오늘 오디션을 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우석과 릴리아나, 그리고 다른 직원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한 자기 나름대로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한솥밥을 먹고 지내는 같은 식구인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 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릴리아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동감을 하고 있다.
우석이 세계의 주인 자리에 오르기 전에도 릴리아나는 가급적이면 자신과 같이 세계의 주인을 모시는 비서들에게 최대한 많이 챙겨주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중에는 아이티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 릴리아나가 아이티에게 주기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아이티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티를 좀 험하게 다루는 면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전달 정도야 해줄 수 있지만…… 네가 직접 아이티에게 말하면 될 텐데 구태여 나를 거치고 부탁하는 이유가 뭐지?”
비서들끼리는 연락처를 공유하고 있다.
아이티가 실질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은 릴리아나와 우석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소봉예화 합세를 한 탓에 아이티의 전화번호 목록에 소봉예화의 전화번호도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봉예화의 전화번호 목록에도 아이티의 전화번호가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봉예화는 릴리아나를 통해 아이티에게 부탁을 하고자 한다.
-난 청결하지 못한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게 이유인가?”
-응.
“…….”
뭐라 할 말이 없어진 릴리아나였다.
화염룡의 말에도 공감은 간다.
릴리아나도 사실 아이티에게 먹을 것을 배달하러 갈 때마다 발로 한 번 차주고 싶은 욕망이 마구마구 샘솟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본능을 억제해 왔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시원스런 성격을 지닌 화염룡이라면 릴리아나와 같은 인내심을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알았다. 그렇게 전해두도록 하지.”
-응. 그리고 우석 오빠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꼭 전해주고.
“아니, 그 말은 잊도록 하마.”
-아! 치사…….
화염룡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를 뚝 끊어버린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나오는 처사였지만…….
릴리아나는 이러한 행동들이 일종의 ‘질투’라는 감정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