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59화
17. 슬럼프(2)
우석이 몰고 있는 차량의 바로 곁에서 몸을 실은 채 스마트폰을 매만지던 릴리아나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진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우석이 잠시 신호 대기로 차량이 정지해 있는 틈을 타 슬쩍 묻는다.
“무슨 일이지?”
“아, 그게…….”
순간적으로 크게 망설이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발생했기에 우석에게 말하기를 껄끄러워 하는 것일까.
“큰일이라도 터졌다면 오히려 나에게 빨리 말해주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
“말해보도록.”
우석의 말은 거역할 수 없다.
그를 모시는 비서로서 어찌 감히 우석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아이티 같은 반항기를 지니고 있는 비서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래 봤자 그 반항은 의미가 없는 행동이다.
세계의 주인과 비서는 절대적인 갑과 절대적인 을이다.
그 지위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다.
비서로서 몰래 돈을 수두룩하게 모아 이 세계를 웃돈 주고 다시 사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
현(現) 세계의 주인이 그가 담당하고 있는 세계를 매물로 내놓아야 세계를 사들일 수 있게 된다.
만약에 세계를 매물로 내놓지 않는다면,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이렇다.
제3자가 보기에는 필요 없는 책 한 권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래도 나름 추억과 의미가 있는 책이 된다.
그런데 제3자가 ‘그 책, 나한테 팔아라’라고 강요해도 책의 소유권이 제3자에게 넘어가거나 하지 않는다.
책의 소유자는 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의 주인이 세계 자체를 매물로 내놓아야 한다’라는 것과 ‘세계를 사들일 만큼의 자금을 갖춰야 한다’라는 두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 세계의 주인으로 등극할 수 있다.
우석은 비록 비서는 아니었지만, 그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켰다.
그래서 세계의 주인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타입인 릴리아나가 마지못해 방금 보인 표정 변화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원고가 수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야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오히려 평범한 거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우석은 직접 작가들을 관리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마감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물론 창작 활동이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작업을 속행할 수 없는 불편한 점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감일이 뒤로 미뤄지게 된다.
그래서 우석은 좀 다른 방식으로 스케줄을 짠다.
작가에게는 10일까지 마감이라고 말을 해두고, 15일 정도에 작업을 진행한다. 그렇게 되면 5일 정도의 여유 기간이 생긴다.
5일의 여유분을 가지고 마감 스케줄을 진행하게 되면, 설사 작가가 10일 당일에 마감을 맞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12일, 13일 등 마감 스케줄을 재조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물론 단점도 있다.
마감이 늦어진다는 건, 그만큼 인세 지급도 늦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5일의 여유 기간을 두게 되면, 만약 10일에 제대로 날짜를 엄수해 원고를 준 작가는 실제 마감일과 다르기 때문에 인세를 늦어지는 기간이 5일 뒤로 미뤄지게 된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가서 ‘사실 마감은 15일까지였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여기서 반드 미디어의 인세 지급 시스템이 빛을 발하게 된다.
반드 미디어는 초고 수령 이후 그다음 날에 바로 인세를 지급한다.
즉, 반드 미디어가 잡아놓은 마감일과는 전혀 무관하게 초고 수령을 기준으로 인세를 지급하기 때문에 작가에게 인세 기간이 밀려 지급될 일도 없게 된다.
인세 지급이 마감일 기준이 아닌 초고 수령일 기준으로 잡아둔 이유가 비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그 점 때문에 대다수의 반드 미디어 소속 작가들은 출판사에 수십 번 전화를 해 인세 독촉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작가는 인세에 상당히 민감하다. 인세는 곧 이들에게 있어서 월급과도 같기 때문이다.
샐러리맨이 월급에 예민하다시피, 작가들 역시 인세에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감을 준수하지 못한 작가가 누구지? 윤단순 작가인가?”
윤단순 작가는 반드 미디어가 보유하고 있는 소속 작가 중에서도 가장 마감일을 안 지키는 작가에 속한다.
덕분에 윤단순 작가를 관리하고 있는 릴리아나로선 고역이 아닐 수가 없다.
“아니요. 이번에는 다른 작가입니다.”
“그래?”
릴리아나가 관리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선 윤단순 이외에는 대다수 마감을 잘 지키는 작가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단순 이외의 작가가 마감일을 어기다니.
“별일이군.”
“아마…… 정체를 알고 나면 더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실 거라 생각합니다.”
“누구지?”
“그게…….”
릴리아나가 다시 한번 망설인다.
그러나 방금 전, 우석이 말을 했듯이 뭔가 트러블이 발생하면 바로 그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좋다.
그 말을 상기시키며 릴리아나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연다.
“레몬티입니다.”
“레몬티라면…….”
익숙한 필명이다.
우석이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 필명의 주인은…….
“연주에게 뭔가 일이 생겼나 보군.”
우석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 * *
“……어떤가요?”
졸지에 벤치에 앉은 상태로 지혜의 질문을 받게 된 화염룡이었다.
그녀가 물어본 것은 방금 들려준 지혜의 노래가 어떠한지에 대한 감상평이다.
조깅을 하다가 아는 사람이 보인다 싶어 접근했는데, 알고 보니 오늘 하루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출근을 하지 않은 지혜였다.
지혜와 마주침으로 인해 왜 오늘 회사를 쉬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아차리게 된다.
오늘은 지혜가 지원한 모 연예 기획사 오디션을 치르는 날이다.
“음…… 나쁘지 않네요.”
지혜의 노래를 감상하던 화염룡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오디션에서 선보일 노래를 먼저 감상하게 된 화염룡이었으나.
“하지만 뭔가 좀 부족해요.”
그녀는 문화를 관장하는 비서다.
장르문학뿐만이 아니라 음악이라든지 만화, 풍습 등 문화나 콘텐츠 사업에 정통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음악 역시 논외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또 소봉예화와 화염룡, 두 인격의 취향이 갈리게 된다.
소봉예화의 경우에는 웅장한 클래식이라든지 잔잔한 형태의 음악을 좋아한다.
그러나 화염룡은 다르다.
빠른 비트를 지니고 있는 댄스곡이라든지 EDM(Electronic dance music), 혹은 록 등 비교적 하드한 쪽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다.
지혜가 선보인 노래는 운이 좋게도 화염룡 취향 쪽에 속하는 댄스곡 부류였다.
가볍게 춤을 시전해 보이면서 노래를 해본 지혜였으나, 여전히 화염룡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안무와 춤을 동시에 소화할 때에는 가장 큰 단점이 있어요. 뭔지 알고 계시겠지요?”
“노래의 음정이 불안해진다…… 라는 건가요?”
“잘 알고 있군요. 해당 연예 기획사가 어떤 취향을 지니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음정이 흐트러지면 안 돼요. 격한 안무를 선보이는 것도 좋지만, 애초에 지혜 씨의 응시 분야는 댄서가 아니라 가수잖아요?”
“……그렇지요.”
“음정이 불안해지는 요소는 아주 간단해요. 지혜 씨가 고른 노래가 비교적 높은 고음 파트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안무가 없는 상태에서도 부르기 힘든 곡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제 와서 노래를 바꿀 수는…….”
오디션은 1시간 뒤에 시행될 예정이다.
그리고 노래를 바꾸게 되는 순간, 기껏 짜온 안무까지도 바꿔야 한다.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안무와 노래를 변경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물론 화염룡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잘 안다.
“음정 키를 한 단계 낮춰서 불러보세요. 그것만으로도 음정이 많이 안정될 거예요.”
“키를 낮춘다라…….”
“무작정 원키로 불러야 한다든지 하는 그런 강박관념은 지우세요. 사람의 목소리라는 건 태생적인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목소리 톤 자체가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도 있지요. 게다가 지혜 씨가 부르는 건 지혜 씨의 목소리에 최적합된 노래가 아니잖아요? 원키는 원곡을 부른 가수의 목소리에 맞춰진 노래일 뿐이지, 지혜 씨의 노래가 아니에요. 차라리 키를 변경해서 본인만의 목소리 음역대에 맞추는 것이 더 듣기 좋지요.”
“…….”
“어때요. 간단하죠?”
지혜는 사실 화염룡과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저 화염룡이 사무실에 얼굴을 비출 때마다 간혹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화염룡의 ‘안목’은 역시 대단하다.
당사자인 지혜조차도 화염룡의 능수능란한 말에 벌써부터 현혹이 될 정도였다.
“키를 낮추는 게 좋겠군요. 그럼…… 몇 단계 정도로 낮추는 게 좋을까요?”
“제가 들어봤을 때에는…… 한 단계 정도만 낮춰도 충분할 거 같아요. 오디션 볼 당시에 MR을 틀어주시는 분한테 가셔서 음정 키 조절해달라고 하시면 무리 없이 해줄 거예요.”
“그렇군요…….”
들어보면 들어볼수록 화염룡의 말에 푹 빠져들게 된다.
마치 대한민국 가요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듯한 그런 충고였다.
“오디션 보는 기획사 이름이 뭔가요?”
“LC 엔터테인먼트예요.”
“LC라…….”
엔터테인먼트 상호명을 머릿속에 기억해 둔다.
‘나중에 아이티 녀석한테 조사 좀 해달라고 해야겠어.’
정보의 신이라 불리는 아이티라면, LC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정보를 몇 시간 안에 싸그리 다 긁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뒤가 구린 내용까지도 전부다.
화염룡은 지혜가 어떤 경위로 반드 미디어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술집에 가수 지망생을 보내 몸을 굴리게 하는……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연예 기획사에서 뛰쳐나와 반드 미디어에 합류했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똑같이 질 나쁜 연예 기획사와 만나지 않게 하려면 아이티를 시켜 사전에 조사를 시켜둘 필요가 있다.
“조언 고마워요. 화염룡 씨 덕분에 많은 걸 얻고 가는 거 같아요.”
“아니에요. 지혜 씨 정도라면 구태여 제가 이런 조언 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합격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비록 그 전 연예 기획사는 그다지 좋지 않은 곳이긴 해도, 지혜 씨는 이미 오디션에서 한 번 합격한 경험이 있잖아요? 한 번 해봤는데 두 번, 세 번이라고 까짓것 못할까요. 뭐든 일에는 항상 첫 번째가 가장 어렵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이제부터는 잘될 거예요.”
용기를 북돋아 주는 화염룡의 말에 지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중에 오디션 붙으면 제가 크게 한턱낼게요!”
“어머, 기대할게요.”
그렇게 지혜를 먼저 보낸 뒤.
가볍게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던 화염룡이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조깅 시간이 졸지에 상담 시간으로 바뀌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