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57화
16. 출진(2)
해가 중천에 뜬 어느 평일의 오후.
유료 주차장에 차량을 정차시킨 우석이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선다.
그가 가게 안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는 한 남자가 우석을 맞이한다.
“여기다.”
반드 미디어의 1차 라인업 공개에 발맞춰 인터넷 기사로 지원 사격을 담당해 준 서수준이 특유의 올빽머리를 선보이며 우석에게 악수를 건넨다.
“그간 잘 지냈냐?”
“뭐, 그럭저럭.”
“일단 앉자. 할 이야기가 서로 많은 거 같으니까.”
수준의 말에 따라 우석 역시 맞은 편에 자리를 잡는다.
우석은 수준에게 반드 미디어 소설 라인업 공개와 동시에 기사를 뿌려달라는 말을 미리 전달해 뒀다.
일단 우석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실 수준은 그저 일시적으로 우석을 도와주는 것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사를 올려봤자 그저 소설 플랫폼에서 연재하는 몇 개의 작품들이 공개되었을 뿐이다.
예전부터 이런 식의 콘텐츠 공개는 수도 없이 많이 거행되어 왔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활자와 그리 많이 친숙한 편이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도 여간 쉽지 않을 만큼 독서를 잘 안 하는 나라 중 하나에 속한다.
그래서 우석이 하는 일 자체에도 사실은 별로 큰돈이 안 될 거라 생각했던 서수준이지만.
“……솔직히 말해봐라. 한 달 매출이 얼마나 나왔냐?”
아주 직설적으로 묻는 수준의 질문이었다.
반드 미디어에서 공개된 소설들은 곧장 편당 유료연재로 돌리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무료로 볼 수 있게끔 푸는 형식을 기반으로 한 시스템에 편승되어 있다.
결국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공짜로 볼 수 있지만, 작품 퀄리티 자체가 워낙 재미있는 탓에 일찌감치 유료로 끊어서 보는 독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
“회사 기밀인데 그렇게 손쉽게 매출을 밝힐 리가 없잖냐.”
우석이 여유롭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이켜며 수준의 질문을 단칼에 거절한다.
물론 수준도 우석이 매출을 바로 공개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여기저기서 입소문이 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매출도 알게 될 텐데. 그냥 나한테만 몰래 알려주면 안 되냐?”
“알려주면 나에게 뭔가 이득이 떨어지는 거라도 있어?”
“난 우리가 파트너라고 생각했는데.”
섭섭하다는 말투를 들려주는 서수준.
그러나.
우석의 생각은 다르다.
“고등학교 동창이긴 하지만, 업무적인 면에선 확실히 선을 그어야지.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
이우석.
이 친구…… 만만치가 않다.
서수준의 머릿속에 절로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고등학교에 재학할 당시의 우석과 지금의 우석은 뭔가 많이 다르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마저 받는 서수준이었다.
“그보다 원래 넌 이쪽 시장에 별로 관심이 없었잖냐.”
“그렇긴 하지. 그러나 돈이 되는 시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언론 매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사실 그리 다양하지 않다.
기껏 해봤자 스포츠, 정치, 연예계, 경제 같은 굵직한 것들의 소식을 주로 다루는 회사가 대다수다.
그렇게 때문에 더더욱 틈새시장을 노려야 한다.
“장르문학을 비롯해 콘텐츠 사업에 관한 소식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한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꽤나 많이 끌어올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나쁜 생각은 아니지.”
앞으로 가면 갈수록 콘텐츠 사업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것이다.
게임, 만화, 소설 등등.
초창기에는 별로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가면 갈수록 문화 사업은 더더욱 힘을 받게 되리라 예상된다.
우석은 그 사실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기에 이번 세계에서 벌일 사업의 주 분야를 콘텐츠로 정했다.
“본래 이런 이야기는 술자리 같은 곳에서 하려고 했었는데…….”
서수준이 술 대신 바닐라 라떼를 손에 든다.
“조만간 독립해서 회사 하나 차릴까 생각한다.”
“네가?”
“그래.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사실 마음에 별로 안 들거든. 물론 엄청나게 거대한 언론 매체를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고…… 얼마 없는 자본으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규모도 그리 크진 않아. 기껏해야 사무실 하나 정도 잡아서 나와 같이하기로 뜻을 모은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키워갈 예정이지.”
“그렇군.”
“너도 창업을 해서 잘 알겠지만, 초반부터 뭔가 치고 나갈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해. 다른 언론 매체들과 정치, 연예계, 스포츠 같은 이런 분야에서 정보 싸움으로 맞붙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지는 격이니까.”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
서수준은 머리가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다.
비록 우석에게는 수준과 어울리던 고등학교 동창 시절의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서수준의 사람 됨됨이를 알기에는 충분한 만남을 가져왔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 좀 하려고 한다. 장르문학을 비롯해 콘텐츠 관련 기사를 전문으로 다뤄 앞으로 우리가 키워갈 언론 매체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려고 하는데…… 네가 협력 좀 해줬으면 좋겠어.”
“흐음…….”
서수준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그가 원하는 건 결국 ‘정보’다.
장르문학계에 몸을 담그고 있는 우석과 이런저런 연을 맺어둔다면, 기자라는 신분을 지닌 채 돌아다니면서 얻는 정보 이외의 사실도 같이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보는 제공해줄 수 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공짜’로는 안 되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원한다.
도움을 절실히 바라는 쪽은 ‘을’이며,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을 만한 여력을 지닌 자는 ‘갑’이다.
우석은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갑의 자리에 등극을 하게 된다.
“……돈이냐?”
서수준이 직설적으로 묻는다.
돈은 곧 만능이다.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돈으로 사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하지만 돈을 주고 정보를 구입하기에는 서수준의 사정이 그리 넉넉지는 않다.
만약 그가 자금 사정이 좋았다면, 언론 매체 창업을 할 당시 작은 사무실에서 소소하게 시작을 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 돈은 이미 충분히 벌기 시작했어. 그리고 내가 돈을 요구해 봤자, 그리 큰돈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뭐…… 그렇긴 하지.”
“그럼 돈 대신 네가 잘할 수 있는 걸 해주면 된다.”
“기사 같은 거 말인가?”
“얼추 비슷하지.”
사실 우석은 속으로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언론 플레이다.
우석이 반드 미디어라는 신흥 강자 세력을 지니고 있지만, 덩치가 큰 출판사들과 정면으로 콘텐츠 시장 장악을 두고 대결을 펼치려면 외적인 요소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변수를 만들기에는 언론 플레이가 가장 적합하다.
“내가 필요하다 싶을 때 적절한 기사를 여기저기 유포해주기만 하면 돼. 물론 공짜로.”
예전에는 우석이 수준에게 기사를 부탁할 당시, 소소하게 금액을 몰래 챙겨주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석이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대신, 수준은 우석이 원하는 기사를 실어줘야 한다.
그래도 수준에게 있어선 나쁜 거래는 아니다.
우석이 어떠한 기사를 실어달라고 요구해오는 건, 다시 말해서 수준의 언론 매체에게도 기삿거리가 생긴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님을 인지한 수준이 우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럼 계약 성립인가?”
“얼추 그런 거 같군.”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마.”
선뜻 손을 내미는 서수준.
그의 손을 마주 잡아주는 우석 역시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는다.
* * *
현재 출판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단어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가 바로 반드 미디어.
그리고 두 번째가 화염룡이다.
두 가지 다 우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는 단어들이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장르문학 시장에 갑자기 끼어들게 된 우석이 현재 이 업계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석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도 계속 파고들다 보면 분명 그 사업적 수완의 비결이 보일 것이다.
“…….”
반드 미디어 사무실이 위치한 부천역 근처의 어느 대형 카페 안.
우석이 수준과의 약속이 잡힌 탓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근처를 방문하게 된 민아 출판사 대표, 이인정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오후 2시 반.
“……조금 늦는군.”
심기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약속 시각보다 대략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다급하게 뛰어오다시피 카페 안으로 들어선 한 남자, 오태준이 빠른 걸음으로 이인정 대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그러게 말이다. 얼추 두세 달 만인가?”
“정확하게는 석 달하고도 15일 정도 지난 거 같습니다.”
“그렇군. 일단 앉지그래.”
“예.”
지금은 비록 반드 미디어에서 일하고 있지만, 오태준의 신분은 아직도 민아 출판사로 기록되어 있다.
오태준의 전신을 한 번 쭈욱 훑어보던 이인정이 대뜸 가벼운 질문을 던진다.
“요즘 좀 살이 찐 건가?”
“아…… 그리 보이십니까? 요즘 좀 벨트가 꽉 끼인다 했더니, 역시 살이 찐 게 맞나 보군요.”
“반드 미디어는 회식 같은 걸 많이 하나 보구만.”
슬며시 반드 미디어를 언급해보는 이인정.
그러나 태준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내저어 보이며 그의 말에 부정의 뜻을 전한다.
“회식은 그리 많이 하지 않습니다만…… 밥이 맛있거든요.”
“밥이 맛있다고?”
“제가 민아 출판사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점심때만 되면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그러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드 미디어는 오히려 집밥을 제공하더라고요.”
“사무실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반드 미디어 사무실에 가본 적이 없는 이인정 대표.
사무실 구조가 어떤 식으로 설정되어 있길래 집밥을 제공한다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부엌이 딸려 있는 사무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래 건물 용도가 사무실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본래는 릴리아나, 철수, 그리고 우석까지 단 3명만이 지내던 사무실이었다.
그러나 지혜와 태준의 합류로 인해 이제는 어느 정도 꽉 찬 공간을 자랑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인력이 더 충원된다면, 사무실 이전까지도 고려해 보겠다는 우석의 말도 있었다.
“반드 미디어의 원동력은 가정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나오는 건가…….”
이인정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우석이 비록 이인정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배워야 할 것은 확실하게 배워둘 필요가 있다.
처음 콘텐츠 재활용으로 돈을 벌어들일 때는 그저 ‘운이 좋아서’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반드 미디어라는 새로운 회사를 이렇게 단기간 내에 키운다는 건 단순히 운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태준아.”
“글쎄요……. 저야 뭐 딱히…….”
태준으로서는 사실 할 말이 없다.
반드 미디어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모든 원인은 전부 다 이우석이라는 남자 때문이니까.
“반드 미디어에 대해 알아낸 건 더 없느냐?”
“예. 저는 그저 종이책 편집 과정만 담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이책? 어떤 작품이 종이책으로 나가길래 준비하고 있는 게냐?”
“그건…….”
잠시 말을 끊는 오태준.
종이책 작업을 준비 중인 타이틀은 소봉예화가 집필한 ‘눈물 비’다.
이미 소봉예화로부터 2권 원고까지 받은 상태고, M 컬쳐에서 3권이 선연재될 당시에 1권과 2권이 동시에 발매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런 상세한 사항들을 과연 이인정에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 이건 반드 미디어에 대한 배신이야. 말해선 안 된다!’
우석은 그간 태준이 보아왔던 그 어떠한 장르문학 업계 회사 대표보다도 직원을 위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믿음에 배신을 할 순 없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종이책 업무는 네가 거의 전담하다시피 할 터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예. 아직까지 스케줄 조정도 되지 않았고…… 아,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종이책 편집 업무’란 표현에 대해서 대표님께서 오해하신 거 같습니다. 설명드리자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언제든지 종이책으로 출간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의 편집을 미리 끝내두는 업무에 불과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종이책 출간 때문에 편집 과정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만 그저 그런 것뿐이지요.”
“…….”
뭔가 두루뭉술하게 핑계를 대는 것처럼 보인다.
이인정도 민아 출판사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남자다.
태준이 하고 있는 말에 그다지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녀석…… 거짓말을 하고 있군.’
여기서 계속 오태준에게 추궁을 해봤자 그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은 이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런 자리를 가지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이인정이 일어서자, 오태준 역시 마찬가지로 마주 일어선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 슬슬 사무실 들어가서 업무 봐야지.”
“그렇군요…… 조심해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너도 수고해라.”
“예.”
먼저 카페를 나서는 이인정의 뒷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던 오태준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친다.
“거짓말하는 티가 많이 났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