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35화
9. 변화의 바람(1)
세상만사 일이 잘 풀릴 때도 있고,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다.
물론 방금 전, 우석과 송 대표의 접대 자리는 전자가 아닌 후자 쪽에 속하는 경우라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젠장! 저 꼬맹이가……!!”
접대 자리가 졸지에 스트레스 풀이 자리가 되어버렸다.
송 대표가 거칠게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하자, 미나가 슬쩍 지애를 포함해 그녀의 친구에게 눈치를 준다.
‘너희도 나가 있으렴.’
‘……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이 방에는 6명의 남녀가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우석과 철수가 방을 나감으로 인해 지금은 3명의 접대 여성과 송 대표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방을 나선 지애와 그녀의 동기, 유리가 옅은 한숨을 내쉰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갔지만, 그래도 두 여성에게 있어선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할당된 시간은 아직 3시간이나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지에 일이 일찍 끝나게 된 셈이다.
“난 잠이라도 좀 자러 갈게.”
유리가 먼저 자리를 뜬다.
그녀를 포함해 지애 역시 후에 지명을 받은 일은 없다.
이대로 퇴근을 해도 좋다는 마담의 말을 듣고 지애 역시 피로가 매섭게 짓누르는 무거운 어깨를 이끌고 가게 바깥을 나선다.
이 일을 하게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오늘을 포함해 이 가게에 출근 도장을 찍은 것이 3번째가 될 것이다.
아직까진 손님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매번 이렇게 VIP 손님이 올 때마다 유리와 함께 연습실이 아닌 유흥업소에 출근을 하는 것부터가 지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가수가 되고 싶어서 연예계를 지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신세는 누군가에게 쉽사리 소개할 만한 그런 떳떳한 상황은 명백히 아니다.
처음 프로듀서에게서 접대도 연예인이 되기 위한 일종의 과정이라는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절로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프로듀서의 말을 거절하게 된다면 연예계에 데뷔할 수 없다는 연습생 동기와 선배의 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지애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다음에도 또 언제 이런 일이 들어올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또다시 이곳에서 연락이 온다면…….
지애는 아마 오늘처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그녀는…….
연예 기획사 안에서는 철저한 을(乙)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을은 갑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다.
갑이 을에게 하는 건 부탁, 혹은 제안이 아닌 명령이다.
명령을 어기게 되면 을은 더 이상 을의 지위를 잃게 된다.
그 끝이 기다리고 있는 건 절망뿐이다.
어떻게든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싶은 여자.
그게 바로 지애의 현재 상황이다.
대기실에 들어가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으려던 지애가 순간적으로 짧은 탄식을 자아낸다.
“……앗차.”
오늘은 이 복장 그대로 집에서 여기까지 왔다.
어차피 늦게까지 하는 일이다 보니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데 설마 대중교통을 이용할 정도로 일이 빨리 끝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택시보단…… 역시 전철이 더 좋겠지?’
돈은 가급적이면 많이 아끼는 편이 좋다.
게다가 일이 너무 빨리 끝난 탓에 손님한테서 제대로 팁조차 받지 못했다.
본래는 받은 팁을 택시비에 보태 쓰곤 했으나, 오늘 부수입도 그리 탐탁지는 않으니 교통비도 아낄 겸 전철을 선택한다.
현재 시각, 저녁 11시.
걸음을 조금만 더 빠르게 하면 그래도 여유롭게 전철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신도림에서 환승해 1호선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지애.
그 와중에 핸드백으로 둔부 부위를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치마가 워낙 짧으면서 동시에 속바지조차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허벅지 살결이 흔들리는 것까지 자세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벌의 옷 가져올 걸…… 실수했어.’
속으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1호선을 타고 어느 특정 역에 도착한다.
그녀가 목표로 삼은 역은 바로 부천역.
자취하는 곳이 이곳에 있기에 서울 한복판에서 환승을 거쳐 1호선을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휴…….”
부천역에 내려 집으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는다.
“아가씨…… 혹시 술집 여자야?”
“……?!”
술 냄새를 풍기는 중년의 남성이 갑자기 지애의 손목을 덥석 잡은 것이다.
놀란 지애가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이미 지애의 짧은 치마에 가 있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딱 봐도 몸 파는 여자 맞구만. 그러지 말고 이 오빠가 재미있게 해줄 테니까 근처로 자리 옮기는 게 어때?”
“그러니까 저는 그런 여자 아니라니까요!”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 해도, 지애를 도와줄 만한 의욕을 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니까.
굳이 여자를 도와줘 봤자,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시간만 낭비되고, 저 남자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할지도 모른다.
정의는 합리적인 사고방식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죽어가고 만다.
바로 맞은편에 지구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쪽으로 도망칠 수도 없다.
남자가 지애의 손목을 너무 꽉 잡은 탓에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쯤 해두시지요.”
남자의 손목을 잡아 거칠게 지애한테서 떨어지게 만드는 한 남자.
순간적으로 만취한 중년 남성이 매섭게 젊은 남자를 쳐다본다.
“넌 또 뭐야!”
“이 아가씨랑 안면이 있는 사이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요.”
구면이라는 말에 지애가 젊은 남자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와 동시에 지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 섞인 탄식이 새어 나온다.
“당신은……!”
“우연이네요.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송 대표의 접대 자리를 거칠게 뿌리 치고 나갔던 그 남자.
이우석이었다.
“그나저나 이곳에 계실 줄은…… 자택이 부천역에 있으신가 보군요.”
“네, 그것보다…….”
지애가 두려움 섞인 눈동자로 취객과 우석을 바라본다.
하나 우석은 별로 크게 신경 안 쓰듯 취객을 깔끔하게 무시해 버린다.
“자, 밤거리는 무서우니 이만 슬슬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이 개새끼가!!!”
취객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인지 우석을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소란 좀 그만 피우시고 얌전히 잠이나 주무시지요.”
가볍게 살짝 몸을 뒤로 빼며 취객의 달려드는 공격을 피한 우석이 재빠르게 남자의 손을 비튼다.
그와 동시에 비명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하는 취객.
“아야야야야야!! 나 죽는다, 나 죽어!!”
“이제 정신 좀 차리시겠습니까?”
“아프다니까, 이 X발놈아!!!”
순식간에 취객을 제압한 우석의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애 역시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이윽고 경찰이 올 때까지 취객의 징징거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