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22화
5. 협상(4)
덕립인쇄소 사장이기도 한 고지식은 난데없이 갑자기 잡힌 저녁 약속 때문에 부랴부랴 차를 끌고 이동을 서두른다.
집에 일찍 들어가서 모처럼 잠이나 푹 자려고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잠 한숨 자겠다는 말을 하며 식사 약속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전화상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아주 큰 건수가 걸려 있다고 했다.
“레일 아웃이라…….”
출판업계에 요즘 강한 파급력을 선사하고 있는 게 바로 런닝과 레일 아웃, 두 종류의 외국 서적이다.
이미 판권은 둘 다 MNN에게 넘어갔다는 말까진 사실로 확인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출판 작업을 어느 곳에 의뢰할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비록 판권은 MNN에게 넘어갔지만, 아직 출판권이 걸려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모든 출판업계, 혹은 인쇄소들은 지금 런닝과 레일 아웃, 두 시리즈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설마…….
그 두 시리즈가 자신과 거래하고 있는 출판사에게 종이책 작업이 할당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게 줄이야.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덕립인쇄소는 반년 동안 의뢰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엄청난 일거리를 지급받게 될 것이다.
“요즘 운이 좋은가 보구만…… 크크큭!”
눈엣가시 같았던 우석과 철수도 지들이 알아서 회사를 관두게 되었다.
두 녀석 때문에 한동안 밀린 임금을 어쩔 수 없이 지불해 준 고지식이지만, 다시금 점차 한두 달씩 임금을 스리슬쩍 지불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장 바닥에서 썩어갈 놈들이다.
배운 것도 없고, 생각이라는 게 없는 녀석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게다가 우석과 철수가 스스로 퇴사를 선택했으니, 임금체불로 더 이상 태클을 걸어올 만한 녀석도 없다.
일이 슬슬 잘 풀려감을 느끼는 고지식의 입가에는 연신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 * *
“어디 보자…… 여기인가.”
내비게이션으로 찾은 거대한 술집 가게.
간판에 적힌 가게 이름을 다시 확인한 고지식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선다.
복도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지식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는 한 사람.
“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민아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오민고 이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온다.
“오랜만입니다, 오 이사님. 그간 잘 지내셨죠?”
“저야 뭐…… 그보다 이번 런닝, 레일 아웃 두 종이책 출판 작업만 따낸다면 보다 더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하하!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보다…… 종이책 의뢰 권한을 쥐고 있는 분이 누구라고 하셨죠?”
아직 누가 그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고지식.
그러나 오 이사는 대답을 들려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고 대표를 데리고 이인정 대표와 최중요 갑(甲)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안내하는 선택지를 고른다.
어차피 고지식이 들어도 모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판업계에서도 그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혜성처럼 등장한 남자.
그 남자의 모습이 드디어 고지식 대표의 앞에 드러난다.
“어이쿠, 오랜만입니다. 고 대표님.”
“너, 너는……?!”
순간 고 대표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물‘들’이다.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고지식의 앞에서 거래처 상대인 이인정 대표와 당당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명은 이우석이고, 나머지 한 명은 그의 친구인 김철수였다.
“서로 아는 사이…… 입니까?”
이인정 대표도 적지 않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묻는다.
그러자 우석이 시원스런 미소와 함께 과거의 추억을 직접 본인의 입 바깥으로 내뱉는다.
“잠시 제가 고지식 대표님의 공장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지요. 가만…… 그때 분명히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회사를 때려치운 적이 있었는데…….”
“……!!!”
순간 이인정 대표의 얼굴이 굳어간다.
지금 이 자리는 절대 갑이 된 이우석을 접대하는 자리다.
민아출판사로부터 종이책 출간 의뢰를 받고 출판 작업에 임하는 덕립인쇄소 대표까지 대동해서 우석으로부터 최대한 레일 아웃과 런닝의 종이책 의뢰를 따내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일부러 고지식까지 불렀는데…….
설마 그와 우석이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 이인정 대표님…… 서, 설마, 전화상으로 말했던 그분이…….”
“뭐하십니까! 빨리 와서 인사드리세요!!”
“아, 네…… 네!!”
당황한 고지식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우석에게 과도한 인사를 건넨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존댓말을 사용하시나요? 저번처럼 편하게 말 놓으셔도 돼요. 하하하!”
“그, 그래도…….”
우석의 말에 고지식의 표정은 말 그대로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한편,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철수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얌마, 니가 말 놓으라 해도 지금 상황에서 함부로 말을 놓겠냐? 적어도 생각이 있으신 분이라면 말은 안 놓으시겠지.”
“그런가?”
우석도 장난기 가득 담은 미소로 철수의 말을 받아준다.
이들은 덕립인쇄소에서 일할 당시, 고지식에게는 그저 소모품에 불과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만약 여기서 우석에게 밉상 보일 짓을 하게 된다면, 레일 아웃과 런닝의 출판 작업은 둘째 치고 거래처인 민아출판사와의 관계도 틀어지게 된다.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안 그래도 요즘 종이책 시장도 점점 축소되고 있어서 기계가 쉬는 날도 많은데,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출판사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 업계는 상당히 좁다.
괜히 여기서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민아출판사가 레일 아웃과 런닝의 종이책 작업 의뢰를 따내지 못하게 된다면, 분명 다른 출판사들에게도 덕립인쇄소에 대한 이미지가 격하될 것이다.
자존심보다 생계가 우선이다!
그렇게 판단한 고지식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다, 당연하지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지금은 지금 아니겠습니까! 제가 옛날에 잘못한 일이 있다면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셨으면…… 그, 그러지 말고 여, 여기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일단 잔 받으시죠!”
“하하, 이거 참…….”
우석이 마지못해 고지식이 따르는 잔을 받아든다.
사실 우석은 민아출판사가 진작부터 덕립인쇄소와 협력 업체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판권 사들이기 작업을 시작할 때 민아출판사와 엮여 있는 레일 아웃을 가장 먼저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덕립인쇄소 대표, 고지식에게 그간 당한 굴욕을 갚아주기 위해서.
그래서 일부러 이 접대 자리에 철수까지 대동했다.
이것이 바로…….
우석이 원하던 갑질의 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