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6화
4. 떠보기(3)
올빽머리의 남자, 서수준이 피곤한 눈을 하며 자신을 부르는 우석을 바라본다.
“우석이, 네가 갑자기 무슨 일이냐. 생전 연락 한 번 안 하던 놈이.”
오랜만에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수준은 그리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철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우석과 수준은 그리 친한 동창생이 아니라고 했다.
그냥 각자 조용히 할 거 하는 그런 사이에 불과하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고등학생 때의 일일 뿐.
지금의 우석은 수준의 능력이 필요하다.
“일단 한잔해라. 뭐 마실 거냐.”
“……아메리카노면 돼.”
“여기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우석이 종업원에게 대충 커피 주문을 들려준다.
이윽고 가볍게 한숨을 쉬는 수준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다.
“요즘 많이 바쁘냐?”
“바쁘고 나발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본래 기자라는 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는 특종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대박 건수 하나 터뜨리는 게 일이니까.”
“그렇지.”
고개를 끄덕여주며 나름 이해한다는 공감대를 표현해 주는 우석.
동시에 그의 시선이 금세 날카로워진다.
“실은 말이다. 네가 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내가? 뭘?”
“간단한 거야. 내가 지시하는 것들을 기사화시켜서 잔뜩 외부에 뿌려주면 돼.”
“……내용은?”
“그건 네가 ‘해주겠다’라고 말해주기 전까지 비밀로 하마.”
“쳇…….”
우석도 바보는 아니다.
아직 정식으로 하겠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자신의 기삿거리를 함부로 제공하겠는가.
아쉽다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찬 수준이 옅은 한숨을 내쉰다.
“빈말로?”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지.”
우석이 슬쩍 작은 봉투를 내민다.
순간적으로 봉투를 목격한 수준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본다.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경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우석이 건네는 작은 봉투를 몰래 받아든다.
“이우석…… 예전에는 뭔가 좀 답답한 놈인 줄 알았는데, 사회 물 좀 먹으니까 말이 통하게 되었네.”
“높은 평가를 내려주니 고맙구나.”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응시하던 수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건넨다.
용돈 벌이치고는 꽤나 짭짤한 비용이 들어 있었다.
우석은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신뢰 관계를 견고히 다지기 위해선 서로 주고받는 무언가가 한번 거래로 이뤄져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말로만 진행하는 신뢰 관계는 금방 깨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부탁할 때, 고위층 간부나 혹은 잘나가는 사업가가 상대방에게 몰래 거액의 금액을 가져다 바치기도 한다.
우석과 수준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철수마냥 우석과의 우정을 강조하는 의리파가 아닌 이상, 이렇게 직접 몰래 건네는 돈 봉투만으로도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신뢰를 구입할 수 있다.
돈은 곧 만능이다.
돈의 힘을 잘 알기에 우석은 그 힘을 이용해 수준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건네준 액수라든지 이런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우석의 깜짝 선물에 수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원하는 기사가 뭔데?”
“간단해. 조만간 한국에서 개봉하게 될 영화 ‘마이 웨이’에 관한 기사와 더불어 그 영화의 원작이 런닝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런닝의 전작이 레일 아웃이라는 것까지 순차적으로 기사를 작성해주면 돼.”
“마이 웨이라…… 들어본 적이 있지. 유럽에서 대히트를 치고 있다는 그 영화 아니야?”
“잘 알고 있네.”
마이 웨이는 현재 유럽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영화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히트작으로 거듭나고 있다.
처음에는 한국에도 마이 웨이의 흥행 돌풍을 미리 점치던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하나 워낙 세계 각지의 언론 기관들이 마이 웨이, 마이 웨이를 연호하다 보니 한국에도 웬만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이 웨이가 어떤 영화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그게 개봉이 된다고?”
“배급사와 조절 단계에 들어섰다는 정보까지는 내가 개별적으로 입수했어. 아마 별다른 어려움 없이 우리나라에도 개봉할 거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수준의 기사를 통해 우석은 레일 아웃의 가치를 더더욱 올릴 예정이다.
이미 런닝은 수많은 출판사들이 판권 경쟁에 돌입했다.
만약 수준의 기사가 온라인 상에 퍼지게 된다면, 분명 레일 아웃을 노리는 자들도 생겨날 것이다.
런닝의 판권 경쟁에서 패배했으니, 하다못해 런닝의 전작 시리즈인 레일 아웃이라도 노리겠다는 잔당들이 분명 있을 터이다.
우석은 레일 아웃을 노릭고 달려드는 그들을 먹잇감으로 잡는다.
레일 아웃을 노리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레일 아웃 판권의 가격도 런닝과 마찬가지로 상승하게 된다.
자고로 경매라 함은 경쟁자들이 많을수록 그 가치가 상승하는 법이다.
우석이 노리는 건 바로 이것이다.
경쟁자들의 시선을 레알 아웃 쪽으로 돌려 판권의 가치를 기하급수적으로 올린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언론 플레이가 중요하다.
“그럼 잘 부탁하마.”
아메리카노가 나오기도 전에 우석이 수준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더 이상 길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서로 바쁜 몸 아니겠는가.
볼일도 끝냈으니, 이제 각자 할 일을 하러 돌아가면 된다.
기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 금이니까.
나름 우석의 배려를 받은 수준이 피식 웃으며 마주 손을 잡아준다.
“그래. 기사에 대한 건 걱정하지 마라. 각종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제대로 한 번 노출되게끔 강력하게 푸쉬할 테니까.”
“나중에 잘되면 좀 더 두둑한 선물로 보답하마.”
“오케이, 기억하고 있을게.”
그렇게 수준을 가볍게 매수한 우석.
이제 다음 계획에 들어갈 차례다.
* * *
수준과의 만남을 마치고 난 이후.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나.”
버스가 거의 끊기기 직전임을 깨달은 우석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집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이제 와서 버스를 타기에는 너무 아슬아슬하다.
어쩔 수 없이 오피스텔에서 하루 자고 가자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긴다.
혹시 몰라 미리 릴리아나에게 오늘 오피스텔에서 자고 갈 거라는 문자를 남겨준다.
이윽고 익숙한 비밀번호 4자리와 별 표시를 누르며 안으로 들어서는 우석.
그 순간.
“……!”
우석이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는다.
불이 다 켜진 오피스텔 안.
큰방으로 향하는 복도 앞에서…….
알몸의 릴리아나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백옥과도 같은 피부.
군살 하나 없는 탄력적인 몸매가 수컷의 본능을 자극할 만큼 아찔한 성적 매력을 선보인다.
그러나 정작 알몸을 보인 릴리아나는 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으며 평소의 목소리로 우석을 반긴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신가요, 우석 님.”
“너…… 내가 보낸 문자, 못 봤냐?”
“문자라고 하시면…….”
“아니, 됐다. 그보다 옷부터 먼저 입어라.”
“네.”
아무래도 샤워를 하느라 우석이 보낸 문자를 체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낯선 남자에게 알몸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무덤덤한 반응을 유지하다니.
우석은 속으로 ‘세계의 주인을 모시는 비서는 수치심을 얼마만큼 느끼지 못하는지를 기준으로 뽑는 게 아닐까’ 하는 새로운 가설을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