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질의 신-9화 (9/201)

갑질의 신 9화

2. 재활용(4)

“잔돈…… 말입니까.”

“그래, 잔돈.”

릴리아나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설마 우석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잔돈을 요구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인가 보다.

물론 여기서 충분히 발뺌을 할 수도 있다.

우석은 이 세계의 값어치가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는 비서다.

잔돈이 있다면, 라울에게 넘기는 편이 수순에 맞다 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드리도록 하죠. 다만, 이 세계와 라울 님께서 기존에 계시던 레디너스 대륙의 환율 가치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 정도 되지?”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돈으로 환전을 하게 된다면, 대략 5천만 원 정도 됩니다.”

“5천이라…….”

적지 않은 돈이다.

하나 라울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코 많지 않은 돈이라 할 수 있다.

레디너스 대륙의 경제를 한 손에 움켜줬던 남자 아니겠는가.

그런 그에게 고작해야 5천만 원이라는 단위가 크게 보일 리는 없을 것이다.

“잔돈은 어떤 방식으로 드리면 됩니까?”

“원 단위로 환전해 줘, 그리고 조만간 계좌 하나를 개설할 터이니, 그쪽에 잔돈을 전부 다 넣어주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환전은 바로 가능한가?”

“2~3일 정도 걸릴 거 같습니다.”

“그렇군…… 너와 따로 연락을 취할 수단 같은 건 없나?”

“제 휴대폰 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휴대폰?”

“네.”

“…….”

사실 우석은 이 세계의 주인을 모시던 비서라고 해서 뭔가 텔레파시라든지, 아니면 전음을 통한 연락 수단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설마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겠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휴대폰도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이 아닌, 2G 폴더 폰이다.

“여기, 제 번호입니다.

폴더 폰 단추를 꾹꾹 누른 뒤 화면에 띄워진 자신의 번호를 보여준다.

세계의 주인을 보필하는 비서로서의 위압감이 하나도 안 느껴지지만, 그래도 일단 서로 연락 정도는 취해야 하니 번호를 교환하기로 한다.

“그런데 넌 어디 살고 있지?”

“본래는 부평역 근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만, 라울 님을 보필하기 위해 이쪽으로 이사를 올까 합니다.”

“방 계약은 했나?”

“아니요. 고시텔 전단지 같은 걸 수시로 보면서 살 곳을 정하려고 합니다.”

“…….”

원룸도 아니고 고시텔이라니.

순간 할 말을 잃은 우석이 옅은 한숨을 내쉰다.

“넌 가지고 있는 개인 재산 같은 건 없나?”

“거의 없다 보셔도 무방합니다.”

“다른 비서들도 설마 너처럼 가난뱅이는 아니겠지?”

“이미 저를 제외한 비서들은 세계의 주인이 이 세계를 팔아먹은 시점부터 퇴직을 선언하고 떠났습니다.”

“…….”

총체적 난국이다.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길래 뭔가 화려한 자신의 인생을 기대했지만, 알고 보니 거의 다 쓰러져가는 중소기업을 인수받은 느낌이다.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이 되고 나서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있다고 하던데.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다만.”

“이 세계 안에서 펼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가능합니다.”

“기후도 조종이 가능한가?”

“네.”

“놀라운 능력이군…….”

분명 좋은 능력이다.

하지만 우석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공짜는 아니겠지?”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합니다.”

“역시나.”

기후를 조종할 수도 있다.

하나, 그 기후를 조종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 있어야 세계의 주인다운 권한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세계의 주인 자리를 꿰차게 된 절대 갑, 라울.

하나 이들의 관계는 결국 회사, 그리고 사장과 마찬가지다.

회사는 곧 이 세계요, 사장은 라울을 가리킨다.

회사를 굴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사원들에게 급여를 줘야 하는 건 물론이고 업무를 보는 데 필요한 건물의 임대비, 비품 비용, 그리고 전기세 등등 회사를 운영하는 데에도 경비가 지속적으로 소모된다.

‘결국 돈을 모으라…… 이 뜻이군.’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고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에 합당한 권한을 누리기 위해선 돈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물론 지금의 우석은 돈이 없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이야기일 뿐이고.

‘돈은 어차피 지금부터 벌면 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세계를 구입하고 남은 잔돈이 필요하다.

그 돈이라도 있어야 우석이 생각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잔에 담긴 커피를 한꺼번에 원샷으로 마무리 지은 우석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릴리아나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린다.

“조만간 사무실 하나를 구할 생각이다. 고시텔 같은 거 잡지 말고 당분간은 거기서 생활해라. 알겠나?”

“전 고시텔에서 머물러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니, 그렇게 되면 네 돈도 따로 나가게 되는 꼴이잖나. 지금은 조금이라도 아껴야 한다. 그리고 널 고시텔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될 가장 큰 이유도 있거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라울 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릴리아나.

그녀를 향해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답변을 들려준다.

“명색이 세계의 주인을 보필하는 비서가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생활한다고 하면 폼이 안 나잖냐.”

* * *

부천의 어느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

인터넷을 통해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공인중개사를 찾아온 우석이 간판을 지그시 응시한다.

“성공 공인중개사 사무소라…….”

듣기만 해도 성공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사무소 명칭이다.

한편, 우석과 함께 사무소를 찾아온 철수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묻는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

“사무실로 사용할 오피스텔 하나를 구해볼까 해서.”

“사무실? 돈도 없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라.”

5천에 불과하지만, 월세로 작은 오피스텔 하나를 구할 정도의 돈은 된다.

재고로 쌓여 있는 책들을 구입하는 것까진 좋으나, 그 책들을 따로 보관할 장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오피스텔이 필요하다.

사재기한 서적들을 보관할 장소 겸, 사무실 겸, 그리고 곧 이사를 올 릴리아나의 잠자리(?)를 겸해서 다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따로 살 만한 집을 구하기 전까진 우석과 철수는 계속 이 부천 지역에 있는 오피스텔로 출퇴근을 할 예정이다.

컴퓨터를 살 돈도 아까워서 일부러 자신의 집에 있는 데스크탑을 오피스텔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사무실이 될 테지만, 그래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이제부터 머지않아 우석의 2번째 황금 인생이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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