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모두 모이셨습니까?”
블랙 가드는 물론 특임대의 일원들까지 모두 모인 함선의 회의실에 아스렌의 태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방에 군인…… 그것도 최소 영관급들이 즐비한 회의실에서, 중절모와 검은 가죽 코트, 안에 잘 다림질한 정장을 입어 엘프 마피아의 전형적인 외형을 가진 그가 브리핑을 한다는 점 자체가 난센스였지만, 이미 그가 블랙 가드의 원로 중 하나라는 걸 전해 들은 그들이었기에 별달리 반발은 없었다.
더욱이 근 1년 동안 특임대와 블랙 가드는 얽히고설켰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던 것이다.
“그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스렌은 상석에 앉은 단테와 남궁연희에게 물었고, 자연히 모두의 시선은 그들을 향하거나 잠깐이나마 머물렀다.
지극히 간결한 물음이었으나 그 찰나의 순간, 둘이 이 회의장 안에서 지닌 지위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끄덕.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스렌은 곧바로 스크린에 준비한 자료를 띄울 마도구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아니, 집어넣으려 했다.
-끼이익.
갑작스럽게 열린 회의실에 울려 퍼진 문 열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음?”
“어?”
이미 들어올 이들은 전부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던 이들은 무심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남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들은 뒤늦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름이 아니라…….
“혹시, 우리 없이 회의를 시작하려 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요.”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채 들어오는 클리에와 그녀의 바로 한 발자국 뒤에서 뒤따르던 미카엘이었기 때문이었다.
“클리에.”
누군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녀의 등장 자체는 그리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미 특임대에 몸을 담았던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엄연히 연합 왕국의 제독인 그녀 역시 이른바 급에서 밀리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들의 시선은 다름이 아닌 클리에의 왼쪽 눈으로 향했을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눈이…….”
“아, 이거?”
한쪽 구석에서 서 있던 유엘이 나지막이 읊조린 대로 그녀의 왼쪽 눈에는 이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검은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사마제천은 말했다.
“치료할 수 없었나 보군요.”
“……아예 터져 버려서.”
“그러면 답이 없죠.”
신전에서든 병원에서든 신체적 손상 자체는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더라도 아예 기능을 잃어버린 장기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그들의 시선은 다시는 볼 수 없을 클리에의 왼쪽 눈가로 향했다.
“뭐야. 이 분위기는?”
그러나 정작 클리에는 그런 그들의 반응에 유난을 떤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고는 비어 있던 자리에 대충 걸터앉은 채 말했다.
“됐어. 이제까지 운이 좋았던 거지. 이 정도로 끝난 것도 충분한 천운이었어.”
그녀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군인이라면 팔다리 하나쯤 도려내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오죽해선 발전된 의수가 진즉에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대륙은 진즉에 노동력이 없어서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돌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말한 대로 전선 자체를 붕괴시켰던 네임드와 마주하고도 고작 눈 하나를 바친 정도라면 정말로 싸게 먹힌 것이었다.
“……후.”
물론 당사자의 기분은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클리에는 내심 주변의 시선에 묘한 동정이 담겨 있다는 걸 눈치챘음에도 낮게 한숨을 내쉴 뿐 별다른 말을 내뱉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들에게 별달리 와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
한편, 미카엘은 미카엘대로 곧바로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는 클리에가 자리에 앉을 동안에도 그저 단테를 응시하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왜 그러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단테가 그런 미카엘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고, 그의 반문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미카엘은 이윽고 고개를 저으며 화답했다.
“아닙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둔한 이라도 그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구태여 내뱉지 않고 속으로 삼켰음을 알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단테는 굳이 그걸 지적하진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사소한 대화가 아니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끼익.
미카엘은 클리에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작하세요.”
그러자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었음을 느낀 남궁연희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스렌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도구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웅-!
짧게 마나가 진동하며 마도구를 흰색 빛으로 번뜩이도록 만들었고, 곧 마나를 가득 머금은 그것은 이내 흰색 화면에 둥지 일대와 전선을 하늘에서 바라본 듯한 생생한 지도를 그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현재 대군주의 둥지에서는 네임드를 더는 뱉어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 전에 뱉어 낸 네임드의 수만 해도 20마리를 넘겼죠. 추정되는 손실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늦지 않게 원로들이, 혹은 각국의 에이스들이 투입된 전선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당한 전선은 그야말로 궤멸당한 탓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모조리 죽어 고깃덩어리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아스렌이 내뱉는 건 어디까지나 서두에 불과했으니까.
“여하튼 일단 소강상태입니다만 이대로 시간을 끌면 결국 말라 죽는 건 우리가 되리라는 건 이미 예견된 미래입니다. 혹시 대군주를 죽이는 것에 반대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이의는 없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일종의 재미없는 농담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단테는 말했다.
“본론만.”
“예, 알겠습니다.”
때에 따라서 그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아스렌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후, 그가 원한 대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건, 비단 단테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가 원하던 일이기도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군주가 둥지를 틀었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는 분은 이 자리에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둥지를 튼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단지 네임드에서 그쳤던 그것이었지만, 이제는 여왕이라는 상위 개체가 존재함을 시사하는 한마디였다.
‘대군주가 낳은 여왕, 혹은 그 이상의 개체.’
그것의 두려움을 모를 이는 이 자리에 없다.
하지만, 그때 이제까지 침묵을 고수하던 로한이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말했다.
“이제까지 둥지에서 뱉어 내고 있는 놈들은 모두 네임드가 아니었어, 아니. 아니었습니까? 구태여 여왕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의 말은 꽤 낙관적이었으나 동시에 정론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둥지에서 내뱉어져 전선을 가득 채웠던 네임드뿐만이 아니라 최상급, 상급, 중급, 하급 마수들 역시 매한가지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글쎄요…….”
사마제천은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다가 고개를 저었고, 곧 남궁연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으니.
“놈에게 이 정도는 어디까지나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 거예요. 그런데도 놈이 둥지를 팠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거겠지.”
단테의 목소리였다.
기갑천마
작전명 : 여명 (1)
놈, 그러니까 대군주는 다른 것을 노리고 있다.
그것이 사실상 확정된 이상 이제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뇌리에는 단 한 가지 명제가 스쳤다.
-대군주가 바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특임대는 몰라도 블랙 가드의 원로들은 대군주의 여력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놈이 게걸스럽게 삼키고 흡수한 세상과 생명이 몇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거늘, 고작 네임드 스무 마리와 더불어 마수들을 내뱉어 대는 것으로 놈의 여력이 고갈되었다는 말 자체가 우습지 않겠는가.
“그래서, 방법은?”
그때, 이제는 구속복을 벗게 된 세이티나가 과자를 씹으며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리베라 역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아스렌을 바라보았다.
비단 그녀들뿐만이 아니다.
단테 역시,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대안을 제시하라는 눈빛으로 아스렌을 응시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마피아에게 대안을 요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들이 보았다면 기강이 바닥까지 처박혔다고 기겁할 일이었지만, 이미 그가 블랙 가드의 원로이자 정보국장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아스렌 역시 곧바로 화답했다.
“첫 번째는 정공법입니다.”
-삐빅.
마도구의 버튼을 누르자 그가 띄운 지도 위로 전선을 이루는 주된 정보들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몇 개의 화살표를 검디검은 대군주의 둥지 쪽으로 그으며 말했다.
“이대로 병력을 갈아 넣어서 전선을 축소, 둥지를 포위한 후 겉에서부터 차근차근 살점을 발라 내는 겁니다.”
“피해가 클 텐데요.”
미카엘의 말에 아스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와 위정자들은 그렇게 말하겠고, 후방에서 소식을 들을 민간인들은 처참하다고 말할 것이며, 현장에서 뛰는 군인들은 지옥이라고 하겠죠.”
신랄한 말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전장에 서 본 사람이라면 그가 지적하는 부분이 작금의 현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예상되는 피해 규모는?”
이번에 물음을 던진 건 클리에였다.
그러자 아스렌은 이미 그런 물음이 던져지리라 예상했다는 듯이 화면을 다음으로 넘겼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추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류에 나타난 것은 무수하게 올라가는 그래프와 숫자, 그마저도 태반이 표가 그린 한계치를 넘어가는 지표일 따름이었다.
“소강상태인 현 시점에서 전선에 투입된 전력은 대략 4개 집단군입니다. 얼추 600만이라고 쳐도 되겠죠. 공세도 하지 않는 현재도 전선에선 하루 평균 10만 정도의 사상자가 나옵니다. 그중 전력 외로 평가되는 사망자와 중증 사상자의 수는 대략 3만을 웃돌죠.”
그래, 소강상태다.
네임드가 나타나지 않고 그저 산발적으로 밀려오는 상, 중, 하급 마수들을 막아 내는 지금도 피해가 이 정도라면…….
“둥지까지 다다른다고 해도 최소 절반, 그나마 나은 경우에는 전멸, 최악에는 신병들까지 합친 1천만 이상의 피해. 그조차 아니면 둥지까지 다다르기 전에 공세 종말점.”
아스렌은 태연한 목소리로 한없이 절망스러운 미래를 점쳤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은 끝이 났다는 듯이 한발 물러서며 선택권을 눈앞의 이들에게 위임했다.
“…….”
“……허.”
단테와 남궁연희 등을 제외한, 원로들조차도 600만이라는 숫자에 압도되어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좌중은 침묵했다.
목 끝까지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니냐는 반문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들은 아스렌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치익, 습-.
“두 번째는?”
푸른 숨결에 불을 붙인 단테의 물음에 잠시 그를 응시했던 시선이 다시금 아스렌을 향했다.
뒤늦게 모두 조금 전 아스렌이 말했던 것에 ‘첫 번째’라는 전제가 붙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아스렌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마도구를 조작했다.
곧 그의 손길에 넘어간 화면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서 대군주의 둥지를 가리켰다.
“간단합니다. 하늘로 특공대를 떨어트려서 대군주의 목만 따는 거죠.”
“허?”
“크하핫!”
그제야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태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거나 고개를 저었다.
모두 눈치챈 것이다.
저것이 아스렌이 그들에게 제안하는 ‘진짜’ 대안이라는 걸 말이다.
“대군주의 목만이라…….”
단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푸른 숨결의 연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스렌이 말한 작전엔 가장 중요한 정보가 빠져 있었으니.
“그래서, 놈이 있는 곳을 어떻게 특정하겠다는 거지? 그저 천장을 찢고 들어가면서 놈이 있으리라 기도라도 하라는 말인가?”
단테의 말은 타당한 반론이었다.
물론 둥지의 특성상 천장을 찢고 들어가면 대부분 그 둥지를 만든 네임드가 있는 경우가 많기는 했으나, 대군주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아, 그 정보의 제공자는 제가 아닙니다.”
“뭐?”
아스렌의 말에 반문한 건 늘 그랬듯이 리베라였다.
그녀의 반문에 아스렌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클리에와 미카엘이 들어온 문이 아닌 뒤쪽의 문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시죠.”
마치 누군가가 대기 중이었다는 듯한 말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가 가리킨 문으로 향했다.
곧 문은 끼익거리는 둔탁한 경첩 음을 내며 열렸다.
-저벅.
“허.”
그리고 그 문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보며 단테는 무심결 실소하고 말았으니.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지구 연방은 대군주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탐지기를 개발해 강습 사이보그들의 프로그램 모듈에 삽입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강습 사이보그지.”
그건 다름이 아닌…… 이슈페인이었다.
“대군주는 둥지의 중심부에 있다.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침묵하고 있어.”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이슈페인은 뒷말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