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81화 (181/197)

“쿨럭!”

클리에는 식도를 따라…… 어쩌면 기도를 따라 밀려오는 지독한 피 내음에 기침을 내뱉었다.

핏물이 그녀의 넝마가 된 군복을 적신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의 두통과 더불어 흐릿한 시야 속에서 한참을 꿈틀거렸고, 곧 정신을 차리고 더듬듯이 군복 안을 뒤졌다.

통신기의 실루엣이 손끝에 닿았다.

“끄으윽, 하아, 하아…….”

눈이 먼 것인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야와 온몸의 뼈가 박살 난 듯한 고통.

정신을 잃기 직전의 순간, 그녀는 찰나의 마력을 끌어 올려 통신기에 대고 나지막이 읊조렸으니.

“쿨럭! 전선을 포기, 네임드…….”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통신기를 쥐고 내뱉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기갑천마

마지막이 될 전쟁 (2)

전선에서 급하게 들려오는 보고는 거의 전부가 암울하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전황은 좋지 않았다.

물론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대군주의 군단과 전투를 이어 나가며 전황이 좋았던 적은 그다지 찾아보기가 힘든 역사였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지휘 막사 안에 있는 장성과 영관급이라면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

“이 무슨…….”

하지만 그런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치익, 습-.

답답함에 태우는 담배의 연기만이 그들의 입가에서 흘러나와 막사 천장을 자욱하게 메울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막사 내에서 가장 상급자였던 소장은 반쯤 탄 궐련을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고는 말했다.

“클리에 제독이 중태라는 건 둘째 쳐도…… 참모장, 이게 말이 되나?”

툭, 하고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탁자 위로 던졌다.

소장과 마찬가지로 입가의 쓴맛을 담배로 억지로 누르고 있던 장교들은 다시금 절망적인 성적표를 확인하고 말았다.

-동부 전선 에이스 손실 60%

-장교 및 사병 손실 70%

어느 쪽을 봐도 절망적이다.

대강 계산을 때려도 10만이 투입되었다면 기본적으로 7만은 넘게 뒈져 나갔다는 말이 아닌가.

그 때문에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동자를 굴릴 따름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토록 절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았는데, 감히 무슨 말을 쉬이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침묵만 지킬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소장에게 질문을 받은 참모장은 마찬가지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답했다.

“일단 전달받은 바에 의하면 클리에 제독께서 의식을 잃기 전 전선을 뒤로 물릴 것과 더불어 ‘네임드’라는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그러니…….”

“전장을 그렇게 만든 건 네임드라는 뜻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네임드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그 전장에 서 있던 에이스만 백 명이 넘지 않았나? 그들 전부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당해 버렸다는 게 말이 되나?”

네임드가 나타나 클리에 제독이 중태를 입었다는 것 자체는 물론 놀라운 일이지만, 모두가 침묵을 지킬 정도로 두렵거나 경악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라고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에이스라고 한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다는 걸 군 상층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스들이 전부 당한 것도 모자라, 투입된 병력의 7할 이상이 당했다면 근본적으로 말이 달라지지 않은가.

“네임드가 아니라 차라리 여왕이라면 말이 될 텐데…….”

소장이 나지막이 읊조린 말에 잠깐의 침묵이 막사를 맴돌았다.

제각기의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이윽고 참모장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군주가 움직임을 멈췄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 놈이 일종의 둥지를 틀고 그곳에서 이전까지와 다른…… 궤가 다른 네임드를 생산했을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흠.”

그의 말에 소장은 손안에 쥔 라이터를 굴리며 미간을 좁혔다.

5년, 아니 불과 2~3년 전이었다면, 참모장의 말은 어떤 근거도 없는 과도한 비약으로 몰려 무시당하거나 욕을 먹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과 그 짧은 시간에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

‘여왕, 그리고 네임드.’

이제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여왕’이라는 개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전보다 더 강하고 많은 네임드들도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즉, 참모장이 내뱉은 말도 어느 정도는 고려해 볼 법한 의견이라는 점이다.

“허…….”

그러나 제발 아니기를 빌어야 한다.

하지만 참모장의 말이 제일 큰 가능성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장교들의 뇌리에 동일한 생각이 스쳤다.

‘대군주의 둥지.’

네임드라는 놈들이 둥지를 제거할 때도 그들은 무수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대군주가 꾸린 둥지라면…….

막사 내 제일 상급자인 소장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금 담배를 물며 장교들의 얼굴을 살폈다.

곧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어쩌면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대군주의 둥지’라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 그들을 감싼다.

그러나 그때였다.

-누, 누구십니까?

-잠깐만……. 이, 이건?

막사 밖에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울리자 막사 내의 지휘관들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그 순간 막사의 문 역할을 하던 천이 끌려 올라간다.

“이야, 이거 반갑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를 본 장교들은 무심결 눈살을 찡그린 채 나지막이 읊조릴 수밖에 없었으니.

“……엘프?”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이 아니라 엘프, 그것도 중절모를 눌러 쓴 채 입에 푸른 숨결을 물고 긴 코트를 늘어트린…… 척 보기에도 온몸으로 자신이 마피아임을 주장하는 듯한 사내였으니까 말이다.

“뭐지?”

엘프들이 스스로를 패밀리라 말하며 마피아를 이루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소장은 미간을 좁히며 막사 안으로 들어온 엘프의 뒤로 다급히 달려 들어오는 중사에게 물었다.

“그, 그게…….”

당연히 소장은 물론 막사 내부에 있던 지휘관급 장교들의 심기가 좋을 리는 만무하다는 걸 알기에, 보초를 서던 중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때.

“너무 그러지 마시지요. 다 이유가 있어서 들여보내 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소장을 비롯한 막사 내 장교들은 밖에서 들렸던 보초들의 목소리가 경계나 짜증이 아닌 당혹스러움에 가까웠다는 걸 떠올리곤 엘프를 응시했다.

동시에 그는 손안에서 굴리고 있던 황금색의 무언가를 탁자 위에 턱 하고 올리니.

“……블랙 가드?”

참모장의 읊조림이 막사 안을 맴돌았다.

그제야 그들은 눈앞의 사내, 아니 아스렌의 정체를 알아채자, 어째서 보초들이 그를 막지 못하고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큼, 블랙 가드가 여기는 어째서……?”

블랙 가드를 나타내는 명패.

그것을 확인한 소장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태연하게 푸른 숨결을 태우고 있는 아스렌에게 물었다.

겉으론 명백히 소장이 상급자였으나 중앙과 끈이 있는 그는, 일전에 제1 군단에 소속된 일선 장교 중 적잖은 수가 블랙 가드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모두 죽이진 않았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끌려간 장교 중에는 블랙 가드도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귀족가의 후계자 등이 섞여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는 블랙 가드와 같은 초법적인 기관의 권한이 더욱 올라간다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장은 겉으론 한없이 태연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눈앞에 서 있는 아스렌을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았다.

“아, 용건은 간단합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렌은 입에 문 푸른 숨결의 옅어진 불씨에 불을 더하곤 품에서 손을 밀어 넣었다.

“……무슨?”

“큭!”

군인이라면, 아니 총을 쥐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품속에 손을 집어넣는 행동을 언제나 경계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쓸데없는 과민반응이라고 얕잡아 볼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 직면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의 멍청한 읊조림 아니겠는가.

따라서 아스렌이 코트 안에 손을 밀어 넣은 순간 장교들 역시 제각기 권총집에 있던 권총을 꺼내 쥐고는 그에게 겨눴다.

“거참, 난리들은…….”

하지만 정작 아스렌은 태연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마저 꺼냈다.

그 물건을 본 소장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녹화 수정?”

“예, 그렇습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다름이 아닌 녹화 기능이 담긴 수정으로,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을 본 소장은 눈앞의 아스렌이 블랙 가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일부를 덜어 낼 수밖에 없었다.

녹화 수정은 그 자체로 희귀하고 값이 비싸서, 마피아라도 어지간해선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틀어도 괜찮겠죠?”

아스렌은 소장에게 물었다. 소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렌은 당연히 허락받을 줄 알았다는 듯이 녹화 수정에 마나를 집어넣었고 말이다.

우웅-!

마나를 머금은 수정이 번뜩였다.

동시에, 막사 내부를 배경으로 삼아 그가 전하고자 한 광경이 펼쳐지니…….

“이, 이건.”

참모장을 비롯한 내부의 장교들은 제각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장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도 나름 목숨을 걸고 찍은 영상입니다. 잘 감상해 보시기를.”

아스렌이 손에 쥔 녹화 수정에서 재생된 영상에는 다름이 아닌,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저, 저건?〕

당황한 듯한 나이트 프레임 파일럿의 목소리가 녹화된 수정에서 흘러나오더니, 곧 전장에는 두려움과 더불어 미지의 것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이 스쳤다.

-저, 저건 대체 뭐야!

-도망쳐! 도망치라고!

비단 나이트 프레임의 파일럿뿐만이 아니다.

비루한 인간의 육신일지언정 대륙을,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쥐었던 이들은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놈을 보고 패닉에 빠졌다.

거대한 비행함의 내부에서 전장을 폭격하던 승조원들 역시 경악하긴 매한가지였다.

〔대, 대체 저건…….〕

그들의 시선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으나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단 하나,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눈을 깜빡거리는 무언가였다.

“저, 저건.”

그리고 녹화된 화면으로 그것의 그림자를 본 소장 역시 참았던 숨을 내뱉듯이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면 너머 전장에 자리하고 있는 그것의 윤곽은…… 그 자체로도 압도적인 혐오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차르르륵.

그때 놈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원들이 빙그르르 도는 소리를 울렸다.

곧 아스렌을 비롯한 막사 내의 모두는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놈의 육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억!”

동시에 그들은 깨달았다.

어째서 이토록 절망적인 전황이 되었는지를.

또 클리에 제독이 당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깜빡.

놈의 거대한 눈동자가 전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 번 깜빡이자, 모두의 뇌리에 놈의 모습이 각인되었다.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눈동자.

그리고 수많은 동물과 인간, 괴수의 눈동자를 잘라다 붙인 듯 제각기 다른 크기의 눈동자가 쉼 없이 눈을 깜빡거리는 4개의 톱니바퀴까지.

“진짜 역겹게 생겼지 않습니까? 하핫.”

오직 경악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막사 내에서 아스렌은 그렇게 말했다.

마치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그 순간 거대한 눈동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본능적으로 직감했듯이,

〔저, 저건 무슨……?〕

전장의 선두에 선 클리에의 기체인 갱플랭크가 멈칫한 순간, 놈의 육신을 감싸고 있던 4개의 톱니바퀴가 빛을 뿜었고.

촤아아아아악!

그 순간, 전장을 휩쓴 섬광을 뒤이어 사방에 핏물과 살점을 튀기며 그대로 영상은 끝났다.

“아까, 참모장님이 대군주가 낳은 네임드가 아니냐고 물으셨죠?”

아스렌은 막 재생을 끝낸 녹화 수정을 다시금 품속으로 밀어 넣은 채 말했다.

“대군주가 낳은 건 맞습니다.”

다만…….

“저걸, 네임드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들은 웃음과 함께 말하는 아스렌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기갑천마

마지막이 될 전쟁 (3)

영상의 내용은 실로 짧고 간결했다.

전장은 참혹했고, 인류는 처절했으며, 네임드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압도적인 폭력으로 인류를 희롱했다.

아스렌은 품속에 수정을 갈무리했다.

동시에 막사 안에 있던 여장교 중 한 명은 충격을 겨우 갈무리한 채 그에게 물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입수한 겁니까?”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다.

수정의 녹화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선 사용자가 직접 마나를 불어 넣어야 한다.

그 말은 곧 눈앞의 녹화를 인간이 직접 했다는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문에 아스렌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화답했으니.

“아, 당연히 제가 했죠.”

스윽-.

팔을 감싸고 있는 검은 코트와 흰 셔츠를 걷어 냈다.

그러자 곧 장교들은 제각기 눈살을 찡그리거나 역겨움을 참기 위해 담배를 입에 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러난 아스렌의 팔에는 붕대로 묶고 성수를 부었음에도 아직 아물지도 않은 거대한 상처들이 누런 진물을 흘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죽을 뻔하긴 했지만요.”

아스렌은 늘 그랬듯이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으나, 상처를 본 그들로서는 그것이 지극히 꾸며 낸 웃음이라는 미묘한 괴리를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찰나의 침묵과 그것을 감싸는 담배 연기가 막사 내부를 가득 채우기 직전, 그나마 빠르게 멘탈을 수습한 참모장은 입에 궐련 담배를 쑤셔 넣으며 그에게 재차 되물었다.

“이걸 구태여 저희에게 보여 준 이유는 뭡니까?”

무엇을 지칭한 것일까.

영상, 아니면 상처?

아마도 전자이리라.

아스렌은 짧은 고민을 끝냈는지 피식 웃고는, 걷었던 팔의 소매를 내리며 그의 말에 화답했다.

“간단합니다.”

씨익, 하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다.

기본적으로 엘프는 다들 외적으로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몇몇 장교들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조금 놓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이어진 그의 말에 대한 충격을 배로 늘리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곧 놈이 이 전선으로 올 거 같거든요.”

“……예?”

“뭐라고?”

참모장은 입에 물었던 담배가 추락해 바지에 구멍을 냈다는 것도 모른 채 멍한 눈으로 반문했다.

소장 역시 이제까지 겨우 유지하던 평이한 표정을 버린 채 되물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문에 답한 인물은 아스렌이 아니었으니.

-타닥!

막사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리더니, 곧 일련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막사의 문을 거칠게 치우고 내부로 들어왔다.

평소엔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나, 사색이 된 그들의 얼굴을 보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동시에 조금 전 아스렌이 한 말이 겹친다.

‘설마.’

‘그럴 리가.’

장교들은 모두 하나가 된 마음으로 직면한 현실을 거칠게 부정했다.

하지만 때때로 인생이란 잔인한 법이라 했던가.

“겨, 경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비행함 편대 전멸! 하, 하늘에 무슨 눈동자가 오고 있다고……!”

경계 지역 비행함 편대의 전멸.

그리고 결정적으로 ‘눈동자’까지.

“……아.”

나지막한 탄식 끝에 모두의 시선이 어느새 옷매무새를 다듬고 서 있는 아스렌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막사 문밖으로 나설 따름이었다.

당연하게도 막사 내부에 있는 장교들도 가만히 앉아 침묵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다급히 아스렌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올려다본 그 순간.

“저, 저게……?”

“맞습니다. 그 그림자라고요!”

그들은 보고야 만 것이다.

조금 전 영상 너머에서 단 일격에 클리에 제독을 중태 상태로 만든 것도 모자라, 수많은 나이트 프레임과 병력의 목숨을 거두어 간 놈의 그림자를 말이다.

몇몇 장교들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눈을 비비고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달라지는 건 조금도 없었다.

-차르륵.

거대한 눈동자를 맴도는 톱니바퀴의 마찰음.

서서히 구름을 꿰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이질적이고도 역겨운 몸뚱어리.

의심할 일말의 여지조차 없이 놈이다.

“저, 저건 대체 뭡니까!”

“쏩니까? 예? 명령을!”

전선에 마수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응당 화력으로 응수하는 것이 상식이기에 지상과 고지에 설치된 마력포들은 포문을 열고 일제히 놈을 겨냥했고, 법국에서 지원한 나이트 프레임들 역시 격납고의 천장을 열고 하늘을 날았다.

〔……지휘부? 며, 명령을 내려 달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어째서 명령을-!〕

사방에서 들려오는 재촉에도 지휘관들, 조금 전 막사 안에서 영상을 본 그들 중 누구도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을 목도한 이상 그 누가 감히 입을 열 수 있을까?

‘공격을 하자고?’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전선이라고 명명되지만, 지휘부가 있는 만큼 후방에 속한다.

그렇다는 말은 이곳의 전력은 놈이 초토화한 동부 전선에 비교하면 한없이 빈약하다는 뜻이고.

그 말은 곧…….

‘승산이 없다.’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조차 없다.

조금의 희망도, 이 상황을 타개할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은 정해져 있다.

단지 비참하고 비루하게 죽어 가는 것뿐이리라.

때문에, 일전에 아스렌에게 물음을 던졌던 여 장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틀어쥐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미 일말의 이성을 되찾기엔 지척까지 다가온 죽음의 공포가 너무나도 크고 거대했다.

동시에 아스렌을 바라보는 그들의 뇌리에는 모두 같은 원망이 스쳤다.

“미리, 미리 알려 줬으면 피할 수 있었잖아! 이건 다 개죽음이라고!”

직접 올 필요도 없었다.

블랙 가드는 그 자체로 첩보 조직으로도 쓰였음을 알기에, 원한다면 아스렌이 직접 오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리라.

이미 그가 블랙 가드에 몸담고 있음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런,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큭!”

“제가 일부러 직접 찾아왔다는 걸 잘못 해석하신 것 같은데…….”

턱, 하고 자신의 멱살을 틀어쥔 장교의 손목을 손쉽게 비틀어 푼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뒤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죽기는 왜 죽습니까? 죽여야지.”

“……뭐?”

“설마 도망칠 생각입니까? 이런, 장교로서 실격이군요.”

그리고 그제야 소장을 비롯한 장교들은 급박한 상황이기에 잊고 있었던, 두 가지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첫 번째, 블랙 가드는 미친놈들이다.

두 번째, 엘프들은 미친놈들이다.

고로, 엘프이며 블랙 가드인 눈앞의 사내는 남들보다 정확히 두 배쯤 더 미치지 않았을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 놈이 우리를 봤군요.”

그 직후, 아스렌이 머리에 쓴 중절모의 챙을 살짝 끌어 올린 채 하늘을 응시하며 읊조리는 한마디를 들은 순간, 그들은 확신했다.

아무래도,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과 엮인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스윽-.

물론, 아스렌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다시금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더니, 곧 통신 아티팩트를 꺼냈다.

그러고는 패닉에 빠진 장교들과 달리 지극히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실 말씀은 많겠지만, 일단 먼저 말씀드리자면 전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고요.”

〔그러시겠지.〕

돌아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아스렌은 느꼈다.

지금 그는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걸.

그리고 그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그걸 먹었다고 했던가.”

눈앞의 적을 찢어 버리기 직전이라는 점이 꽤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스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막 공격을 하려는 듯이 톱니바퀴를 팽창시키는 네임드를 올려다보았다.

“오, 온다!”

“……아, 아아.”

이미 놈의 전투력을 알고 있는 참모장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소장 역시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올 죽음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때, 아스렌이 손목을 비튼 덕인지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여장교는 문득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좇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

그녀는 깨달았다.

아스렌이 바라보고 있던 것이 4개의 톱니바퀴에 징그러운 눈동자를 덕지덕지 붙인 네임드가 아닌, 그 위로 빠르게 접근하는 강습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강습함…….”

모선이 되는 비행함에 비해서 턱없이 작은, 그야말로 병력을 지상으로 투입시키기 위해 건조된 기체 하나로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런 의문이 뇌리를 스친 그 순간.

“어?”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고도를 최대치로 높인 강습함, 그리고 그곳에서 추락하는 하나의 검은 무언가.

그것이 인간이라는 걸 인식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고.

“무, 무슨……!”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네임드를 지켜보고 있던 모든 군인들은 단신으로 네임드를 향해 추락하는 한 사내를 보곤 제각기 다른 생각을 했다.

‘미친 건가?’

‘죽겠지?’

‘대체 어째서……!’

인간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지켜볼 때 생각을 멈추고 그저 시신경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를 갈무리하기도 힘들어하곤 한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건 그리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리라.

그들은 모두 사내의 죽음을 예측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두의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으니.

-깜빡.

거대한 눈동자가 눈을 한번 깜빡인다.

전장에 서 있던 군인들 역시 무심결에 네임드를 따라 눈을 감았다가 뜬 그때였다.

파아앗-!

일대를 뒤덮는 섬광이 하늘 위를 감싼다.

허공에서 거대한 폭탄이 터진 듯한 착각마저 할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의 빛이 번뜩이고, 뒤를 이어 그 빛을 좇아 회색빛의 무언가가 다시금 세상을 장막처럼 뒤덮으니.

-촤르르륵!

네임드 역시 공포를 느낀 것인지 사방으로 눈알이 기괴하게 박힌 톱니를 흩뿌렸으나…….

놈도, 지상에 서 있는 군인들도, 그리고 놈을 향해 손을 뻗은 사내- 아니, 단테조차도 느끼고 있었다.

……놈은 이 공격을 피하지 못하리라.

거대하고 역겨운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입이 없어 말하지 못하는 놈이었으나 눈동자에 맺힌 감정의 편린을, 단테는 분명히 읽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단전을 찢을 듯이 팽창하는 내력.

혈도를 따라 종횡하는 압도적인 기류.

손끝에서 일렁이는, 이전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폭력.

그 모든 것이 주는 고양감에 온전히 몸을 맡긴 단테는, 핏물을 머금은 듯이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에 환희와 증오를 담아 답지 않은 나긋한 목소리로 놈에게 말하니.

“네놈들은, 언제는 말이 되는 존재였더냐.”

콰드드득!

단테를 당장에라도 양분할 듯한 은빛 섬광을 뜯어 쥐었고, 동시에 그는 어느새 올라간 입꼬리로 최후의 속삭임을 덧붙였다.

“비루하게 죽어라, 버러지.”

그리고 그 순간.

콰드드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린 직후, 놈을 감싸고 있던 4개의 톱니바퀴가 단번에 뜯겨 나가는 동시에, 거대한 눈동자의 동공이 찢어질 듯이 확장되었다.

찰나의 정적이 전장을 맴돈다.

그리고 직후.

촤아아아아아아악-!

대지로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피의 분수를 뒤로한 채 추락하는 단테를 응시하던 아스렌은, 처음으로 능글맞은 표정을 버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괴, 괴물이 다 됐네?”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모두가 한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기갑천마

마지막이 될 전쟁 (4)

쿠우웅!

강습함에서 뛰어내린 단테의 손끝에 네임드의 기괴한 눈과 톱니바퀴가 뜯어져 추락한 그 순간, 핏물과 살점으로 점철된 놈의 부산물이 대지를 향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은 이미 광기에 몸을 내던졌을, 또는 수많은 전우를 잃은 군인들에게는 시원한 대리만족이 되어 주었겠지만, 후방에 있는 그들에겐 아니었다.

“미, 미친.”

“……빌어먹을. 오늘 밥은 다 먹었네.”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허탈한 읊조림을 던지는 이들은 차라리 정신력이 강한 편에 속했다.

“우우욱!”

“……쿨럭!”

적잖은 이들이 핏물과 핏줄, 동공을 이루던 수많은 살점이 톱니바퀴의 잔해와 함께 추락하는 모습에 속을 게워 내거나, 아니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당연한 일이리라.

살점이 터지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거대한 눈덩이를 감싸듯 맴돌고 있던 수많은 눈동자들이 추락하는 모습은 아무리 전장에서 무수한 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쉬이 볼 수밖에 없는 직장이라고 한들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면 참혹한 것을 볼 때 어느 임계점이 넘어가면 그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이쿠, 제대로 터트렸네.”

“……위생병들은 당분간 트라우마 환자들한테 시달리겠구먼.”

때문에 멀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특임대원들 역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아니.”

남들과 달리 침묵을 지키며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세실은 눈살을 찡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예?”

그녀의 말에 함교에 모여 있던 특임대원들은 다시금 지상의 전경을 보여주고 있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 단테가 추락시킨 눈동자가 가로로 갈라지며 무언가 솟구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저건?”

로한은 미간을 좁혔고, 곧 그들은 누가 먼저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그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촤르르르륵-!

그건 다름 아닌 조금 전 단테가 한 줌의 혈수로 만들어 버렸던…… 아니,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네임드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어?!”

“뒤, 뒤를 보십-!”

비단 특임대뿐만이 아니다.

“위험합니다!”

“어, 어어!”

토를 게워 내고 있던 이였든, 아니면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던 이였든 상관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막 대지에 발을 디딘 단테를 향해 외쳤다.

단테는 고개를 돌렸다.

추락하며 함께 떨어진 핏물에 점철된 머리를 쓸어넘긴 순간, 그는 눈살을 찡그린 채 바로 눈앞까지 뻗어진 네임드의 부산물을 눈에 담았다.

-끼이이이!

죽어 가는 와중에 남은 사념인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살점과 조직이 엉겨붙어 뻗히며 내뱉는 일말의 성토인가.

단테는 구태여 답을 갈구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뻗고 그것을 틀어쥐었을 뿐.

콰드득!

단테의 손에 쥐어진 살점이 기이한 괴성을 내뱉는다.

동시에, 그는 언제 미간을 좁혔냐는 듯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손아귀 안에서 역겹도록 꿈틀거리는 그것을 응시하며 말했다.

“꼴에 발악은.”

그리고 그것이…….

콰드드드드드드드득!

놈이 들을 수 있던 마지막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