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79화 (179/197)

‘대군주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간단하고도 두려운 명제가 아닌가.

그것은 머지않아 실질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법국의 영토 15%가 넘어갔고, 우리는 두 명의 기수와 더불어 전력의 20%가 죽었습니다.”

“연합 왕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적 손실을 둘째로 치더라도 비행함의 손실이…….”

“유감입니다.”

대군주가 모습을 드러내고 진군한 곳은 다름이 아니라 최근 전 대륙을 강타했던 격전을 치룬 망르 해안가였다.

그리고 그곳은 다름이 아닌 법국과 연합 왕국의 영토가 붙어있는 곳이었기에 두 국가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다.

때문에, 제국으로 파견을 나온 대사(大使)들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감이라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해 보시란 말이오!”

-콰앙!

탁자를 거세게 두드린다.

동시에 연합왕국의 후작인 드레드는 왜인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침묵만을 하고 있는 라리이 중장을 찢어 버릴 듯이 노려보며 일갈했다.

“하하, 일단 좀 진정을 하시고…….”

“진정은 무슨! 어째서 특임대의 단테 대령, 아니 준장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인지, 하다못해 특임대라도 보내란 말이오!”

“……동의합니다.”

법국의 대사 역시 언성만 높이지 않았을 뿐, 심히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이 되고 있는 라리이 중장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혼이 나간 표정으로 허허 웃으며 담배를 물고 시계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빌어먹을!”

당연히 그런 모습을 본 드레드의 인내심도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대군주가 나타난 지 벌써 근 이 주째요! 제국은 우리가 다 뒈지고 나서야 움직일 겁니까!”

“거, 군단을 배치했잖습니까.”

“우리는 특임대를 원하오!”

그들이 군단을 배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그것마저 하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피가 튀었으리라.

“진정하시지요, 후작님.”

“이게 지금 진정을 할 문제입니까?”

“후…… 언성을 높여선 될 일도 안 됩니다.”

“허!”

그렇게 겨우 후작을 진정시킨 법국의 대사, 프리멩은 근 일주일 째 웃음과 더불어 억지로 시간을 끄는 기색이 만연한 라리이 중장에 말했다.

“비록 표현이 거칠었다고 한들, 저 또한 의문입니다. 단테 준장은 물론 제국에 소속된 특임대 인원은 망르 해안가에서도 큰 전과를 보낸 이들 아닙니까? 어째서 그들이 출진하지 않는 것인지 명확한 답을…….”

“잠시.”

그때였다.

-우웅.

노골적으로 공기를 보고 시간을 보내며 담배를 태우던 라리이의 품속에서 통신기가 울렸고, 그는 양해를 구하곤 그것을 받아들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펴지며 되물으니.

“끝났습니까?”

돌아오는 답은 두 대사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통신기에 주입된 마나를 거두고 둘을 바라보며 웃는 라리이 중장의 얼굴을 본 그들은 확신했으니.

치익, 습-.

아니나 다를까.

라리이는 다 탄 궐련 담배의 끝자락에 불을 붙이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가서 전하십쇼. 특임대가 간다고.”

기갑천마

마지막이 될 전쟁 (1)

대군주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지도 이 주가 지났다.

지난 50년 동안 피를 바쳐 가며 고착시켜 놓았던 전선이 단 며칠 만에 무너지는 광경을 보며 인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 마수가 너무 많습니다! 지원, 지원을, 제바알-!〕

마수들이 망르 해안가가 무너뜨리는 데에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 이후 수많은 도시와 전선에서 새로운 저지선을 만들려던 시도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수들의 공세에 매번 엄청난 목숨을 잃은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전선에 서 있는 군인들은 일주일, 하루, 어쩌면 단 몇 시간 만에 쉼 없이 뒤로 밀려나며 절망에 찬 목소리로 하나같이 말했다.

‘……우리가 이제까지 대륙을 지켜 낸 50여 년의 시간은 그저 놈에겐 찰나의 자비였을 따름이다.’라고 말이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패주하는 패잔병들이 내뱉는 처절한 절규에 불과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은 잔인한 법이었으니.

법국과 연합 왕국, 프란 공화국 출신의 의용군과 제국군의 피해를 모두 합치면 벌써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다다르고 있었다.

“……인류의 종말인가.”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법왕은 회의장에서 무심결 읊조렸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대, 대군주가 멈췄습니다!〕

〔뭐?〕

그 자신은 어떤 공격도 하지 않고 그저 수많은 마수를 앞세워 세상을 뒤덮을 듯이 앞으로 향하던 대군주는, 어느 순간 둥지를 틀기라도 한 것인지 멈춰 섰고, 그 덕분에 인류는 잠시나마 전선을 가다듬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참호를 파! 다 뒈지기 싫으면!”

“일단 쏠 수만 있으면 아무거나 좀 가져오라고!”

후방의 예비대에 편성된 포탑은 물론 총기, 나이트 프레임들은 모조리 전선으로 투입되었고, 이젠 나라가 없어진 구(舊)프란틴의 유민들은 이제 총을 쥐고 전선으로 스스로 나아갔다.

대륙에 촘촘하게 깔린 철도는 엄청난 물동량에 비명을 질렀고, 일선의 참모들은 어떻게든 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보급을 확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렇게 전선을 형성시킨 뒤 어느 정도 숨을 돌린 각국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다름이 아닌 프로파간다였다.

-일선의 장교들이 대군주를 막아 내고 있다!

-우리가 피를 흘려 대륙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마수 따위 없는 세상을 물려주자!

지난 5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읊조려 댄 내용이었으나 이번엔 국가들 역시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자세한 정보들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시민들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

다만, 그들은 이 지옥이 어떻게든 끝이 날 때까지 속여야 했다.

전선에 남편을, 애인을, 아내를 보낸 이들.

과부로 살아 키운 아들을 아비의 군복을 입혀 보내고, 눈물과 더불어 편지를 쓰고 있는 수많은 장병의 가족을 말이다.

물론 위정자들은 알았다.

사망한 이들 중 태반은 시체조차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달리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결국 그들은 그저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역사는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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