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퍼러 가드는 한차례 홍역…… 아니, 단지 그런 말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정신을 차렸는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군기를 보였다.
“충! 제국에 영광을!”
사실 당연한 일이다.
당장 엠퍼러 가드의 수장이 갈려 나간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그 수장이었던 류튜스 백작은 그대로 단두대로 끌려가 목을 바쳐야 했다.
그뿐인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엠퍼러 가드의 잔존 기사들은 혁명이라 말하고 쿠데타라 부르는 짓거리를 반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과 며칠 전까지 함께 동고동락하며 같은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연병장을 뛰던 동료들이 자신들에게 칼과 총을 겨누는 짓거리들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놈들은 웃기지도 않는, 꼭두각시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운 황태자를 유일한 희망인 양 떠받치며 끝까지 극렬하게 저항하고 침을 뱉던 이들을 불가피하게 ‘제거’했다.
‘물론 블랙 가드의 내분으로 촉발된 일이다.’
엠퍼러 가드들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블랙 가드의 원로라는 놈들 일부가 황태자와 류튜스에게 같잖은 부추김을 더해서 일이 이렇게 꼬였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말고를 떠나 명명백백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쩌라고?’
분노해야 하는가?
이미 주동자들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든 블랙 가드의 원로들과 단테 대령…… 아니, 준장의 손에 의해 끌려갔고, 황태자는 유폐되었으며, 류튜스 백작은 스스로 목을 바침으로써 가담한 엠퍼러 가드들 대부분을 살렸다.
물론 그 살린 목숨이 머지않아 꺼지리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에서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나 일단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나.
정 운이 좋으면 살아 돌아올 수도 있으리라.
여하튼 그들이 단테와 남궁연희에게 이토록 깍듯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제스처였다.
‘황제 폐하께 이토록 충성을 바치니,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라는 구걸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건 생존과 직결된 문제 아니겠는가.
끼이익-.
“충! 제국에 영광을!”
여하튼 그런 뒷사정으로 둘은 엠퍼러 가드의 융숭한 의전과 우렁찬 경례를 몇 번이나 받으며 어전 안으로 들어섰고.
“아, 왔군.”
집무실에 앉아 의연한 얼굴로 제국 옥새를 서류에 찍고 있던 황제가 그들을 반겼다.
그는 검토하던 여러 서류를 그가 들어서자 망설임 없이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러자마자 황실 집사가 적당한 온도로 맞춰 놓은 차를 단테와 남궁연희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향이 나쁘지 않다.
하긴, 황제가 마시는 차가 안 좋을 리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집사는 물론 어전 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황제의 명령을 따라 자리를 비웠고, 황제는 자리에 앉은 그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중원이라고 했던가, 당주.”
“예, 폐하.”
그것은 예측한 말과는 다른 단어였다.
때문에 막 찻잔을 쥔 단테의 손이 멈칫했으나, 정작 황제는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커튼을 치자 가려져 있던 황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때 황위는 꿈도 꾸지 않은 채 그저 어여쁜 신부나 맞이하길 바랐던 때가 있었지.”
그것조차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계승권 말석의 왕자가 꾸기엔 썩 괜찮은 미래였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큰일이 없었다면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리라.
제일 큰 형님이자 장차 제국을 이어 나갈 황태자처럼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 검술이나 수련하고, 이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귀족가의 영애들과 웃으며 떠드는 그런 삶 말이다.
“어느 날 한 기사가 말했지.”
-정체불명의 마수들이 대륙을 침공 중입니다.
“처음엔 그저 잠시 지나갈 한때의 일인 줄 알았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처음엔 이름 없는 마을이 사라졌다.
그 이후엔 남작령이 무너졌고, 나아가 국경을 맡고 있던 변경백들이 미친 듯이 전령을 올리며 외쳤다.
그들의 요구는 간결했다.
단지, 살려 달라는 처절한 절규였을 뿐인 것이다.
“단 일 년.”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무너진 왕국이 몇 개였는가.
그렇게 죽어 간 목숨이 몇 개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무렵 또 하나의 비보가 제국을 강타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가 죽었다.
그를 보좌하던 황실 근위대 태반이 죽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으나 소드 마스터였던 황태자는 최초로 등장한 네임드 ‘레라지에’를 죽이고 함께 장렬하게 산화한 것이었다.
“도합 2만.”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 2천.
4서클 이상 마법사가 1천.
대마법사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초인이 황태자를 포함하여 10명.
전 대륙에서 고르고 고른 강병이 대략 1만 7천.
그들 중 절반이 안 되는 병력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멀쩡히 돌아온 자들 중 초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없었다.
다만 죽음 직전의 몸으로 겨우 살아 돌아온 황실 근위대장은 죽기 전 황제에게 무릎을 꿇은 채 성토할 뿐이었다.
-이제,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폐하.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미간을 좁힌 채 떨리는 손으로 시가를 물었다.
그것을 본 남궁연희가 불을 붙여 주었다.
황제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황태자를 이어받은 둘째 형님이 죽었고, 이후 두려움에 전장으로 나가지 않으려던 셋째 형님은 휴양 중 갑작스럽게 등장한 최상급 마수에 목숨을 잃었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든 황자가 제각기 이유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채 2년이 걸리지 않았지.”
막내였던 황자는 황태자가 되었다.
초기 분투를 이끌었던, 이른바 초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여전히 처절하게 마수들을 상대로 싸웠으나 결국 그들도 사람이었다.
소드 마스터들은 최상급 마수, 혹은 네임드와 함께 죽었다.
대마법사들은 각혈하며 한 줌의 마나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전선을 지원했지만 하루하루 전선이 밀리지 않기를 기도해야 했다.
그리고 거의 밀리고 밀려 거대했던 제국의 옥토가 왕국 정도 크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노쇠한 황제는 삶을 스스로 포기한 채 죽음으로 도망쳤다.
“악몽이었지.”
갓 성인을 넘긴 황태자는 황위를 받았다.
단 몇 년 만에 대륙의 절반 상실.
말라 가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
통제되지 않는 백성들.
무너진 귀족.
무너진 황실의 권위…….
이제 갓 황제에 오른, 본디 황태자가 될 수 없었던 막내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어전에 틀어박혀 술과 여자로 현실을 잊어 가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 이름 높은 귀족 중 충신이라 부를 이들은 전장에서 하루하루 마수들의 피를 뒤집어쓰다가 뒈져 나갔고, 간신이라 이름 붙여진 이들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시간을 향락과 사치에 쓰며 최선을 다해 현실도피를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술에 취해, 약에 취해, 공포에 취해 악몽을 꾸던 내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그날. 검은 로브를 쓴 일곱 명의 남녀가 나를 찾아와 말했지.”
황제는 고개를 돌려 남궁연희를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단테에게로 옮겼다.
“이 세계가 마지막 전장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말이야.”
단테도 바보가 아니다.
그것이 그들이 했다는 ‘거래’의 내용이라는 걸 모를 수는 없을 터.
때문에 그는 물었다.
“대가는?”
황제에게 묻는 물음으론 말이 짧다고 느낄 수 있겠으나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은 그런 사소한 일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잘근.
황제는 시가의 끝을 깨물었다.
그리곤 다시 걸음을 옮겨 집무실 서랍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어 탁, 하고 책상에 놓았다.
이윽고 황제는 마침내 단테의 물음에 화답하니.
“복수. 그리고 미래.”
그리고 그 순간 목함 안에 있는 물건을 본 단테는 정말 찰나의 순간 무심결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안에 있는 물건은 다름이 아니라…….
“대환단?”
익숙한 듯 어딘가 낯선 환단이었으니까.
기갑천마
그들이 원한 것 (2)
단테는 걸어갔던 복도를 그대로 다시 되짚어 잠을 청하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끼이익, 따위의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홀로 들어온 단테는 뺨을 스치는 언뜻 뜨겁기까지 한 공기를 느꼈다.
“…….”
벽난로로 시선을 옮긴다.
그가 나갔을 땐 거의 꺼져가며 잿더미로 변해 가던 장작들은 어느새 갓 팬 장작들로 바뀌어 있었다.
‘……시녀라도 다녀갔나.’
무심결 그런 생각을 한 단테는 이윽고 걸음을 옮겨 아까까지 남궁연희가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고는 거의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목함을 탁자 위로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쯧.”
단테는 나지막하게 탄식인지, 짜증인지 모를 무언가를 내뱉은 채 옅은 숨결 속 갈무리하지 못한 무언가를 내뱉었다.
“……후우.”
구태여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온갖 감정들이 혼합되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기에 그저 꼬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감정 말이다.
탁, 타닥…….
조용한 방 안에는 오직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와 단테의 낮은 숨소리뿐이었다.
‘대환단이 아니라고 했지.’
이윽고, 그는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