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이 세상을 뒤덮었다.
마치 세상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 아아아…….
울리는 곡소리가 바람을 대신하여 귓가를 스쳤고, 솨아아- 떨어지는 빗소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울었다.
‘……여긴.’
그곳에 홀로 선 단테는 주변을 훑었다.
그러자, 곧 언젠가 겪은 듯이 눈에 익숙한 것들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무림맹의…….’
흰색과 푸른색을 뒤섞은 도복을 입고 있는 무수한 시체들이 그의 왼쪽에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 끝을 헤아려 본다.
하지만 그의 시선 끝에 걸리는 것은 시체들의 끝이 아니라 구름을 뚫고 쌓여 있는 거대한 시체의 탑일 뿐이었다.
투둑-.
무심결 발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미처 소화되지 못한 장기들이 바닥을 구르다가 이윽고 핏물로 된 강물 아래로 추락해 잠기니, 단테는 몇 번 눈을 끔뻑거렸다.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것이 가늠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가 무언가라도 뜯고 찢으려 손끝을 천천히 말아 올리며 내력을 끌어 올린 그때.
“……이제 정말 끝이네요.”
들려서는 안 되는,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으로 이제는 들릴 리가 없는…… 자조적이고 울분에 차 있는 비통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고개를 돌렸다.
단테, 아니 천휘는 비릿한 입꼬리를 올리며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남궁연희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화답했다.
“본좌는 끝나지 않는다.”
“훗, 끝까지……. 하긴 천마라는 족속들은 늘 이랬죠.”
“너야말로 맹주라는 년이 패배감에 절어 버린 것이냐.”
그녀를 응시한다.
묘한 역겨움이 뇌리를 가득 채운다.
코끝을 스치고 귀를 어지럽힌다.
시야는 어둡게 바뀐다.
백옥과 같았던 그녀의 피부가 갈라지고, 남색 빛이 도는 검은 장발은 흘러내리듯이 추락하며 그 빛을 잃었다.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뜬 단테는 곧 앞을 보았다.
“맹주, 라, 이젠, 의미가, 없는, 말이죠?”
조금 전까지 남궁연희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그것은 기이하게 입을 움직이며 마치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몸을 움직였다.
천휘, 아니 단테는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그는 시선을 돌려 다시금 시체로 쌓인 산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그곳에 겹겹이 쌓인 시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
무심결 실소를 내뱉는다.
동시에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고 곧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족히 열 배는 더 큰 거귀(巨鬼)를 눈에 담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개꿈도 이런 개꿈이 없군.”
내력을 끌어 올렸다.
동시에 이젠 말조차 내뱉지 않고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시체들과 남궁연희를 흉내 내던 괴물, 그리고 거귀를 향해 그대로 주먹을 찍어 눌렀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묵환강(天魔黙丸鋼).
침묵과 공허 속에서 세상에 재림한 묵색의 구체가 일제히 놈들을 집어삼키고, 곧 한 번의 빛이 번뜩이며 단테를 감싸고 있던 허황된 세계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와장창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우르르……?
단테는 서서히 심연 아래에서 끌려 올라가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고, 그 순간 낯선 침대의 감촉과 잔잔한 조명이 그를 반겼다.
그리고 그때, 침대와 떨어진 소파에서 남궁연희는 말했다.
“악몽을 꿨나 봐요? 몇 번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도 흘리던데.”
“……중원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허, 그건 좀…….”
단테의 답에 남궁연희는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한 얼굴로 실소를 흘렸고, 곧 손에 쥔 술잔에 담긴 얼음을 한 바퀴 돌렸다.
달그락-.
얼음이 술과 함께 찰랑거리며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잔을 돌았으나 정작 그것을 바라보던 남궁연희는 침묵할 뿐이었다.
“…….”
그리고 그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찬물로 가볍게 입을 적신 단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
“…….”
둘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때마침 창밖에서 내리는 비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이 아닌 남궁연희였다.
술을 한 모금 머금는다.
독한 술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고, 이미 몇 잔을 마셨는지 그녀는 살짝 풀린 눈으로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아 푸른 숨결을 입에 물려 하는 단테에게 물었으니.
“……이길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단테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말 잠시일 뿐, 이윽고 그는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푸른 숨결의 끝에 붙이곤 화답했다.
“글쎄.”
그건 실로 담담한 대답이었다.
기갑천마
그들이 원한 것 (1)
그렇게 침대의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푸른 숨결을 태운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반쯤 탄 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단테는 이윽고 여전히 소파에 걸터앉아 너무나도 태연하게 술잔 안의 얼음을 빙그르르 돌리고 있는 남궁연희를 응시하며 말했다.
“누가 보면 여기가 네 침실인 줄 알겠군.”
그 안에 담긴 진의는 간결했다.
야밤에 이리 찾아온 것이 불쾌하다는 소리였고, 동시에 빨리 나가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이제 와 개수작을 부릴 여지는 없었다.
애초에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해진 그도 아니었고 말이다.
“흐응.”
당연하게도 남궁연희는 그가 하는 말의 진의를 알고 있었지만,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어느새 다 빈 술잔에 새 위스키를 채우며 화답하는 것이었다.
“몰랐어요? 황궁에서 제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은 없답니다.”
얄미울 정도로 태연한 대답이다.
그녀는 그렇게 답한 후 술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곧 식도를 따라 반쯤 식은 알싸한 알코올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유리잔에 붉은 입술을 붙었다가 떨어진다.
꿀꺽, 하고 목의 울대가 굴곡을 일으키며 하얗디하얀 목덜미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테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녀의 걸음을 따라 벽에 걸린 침침한 마석의 빛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스읍, 후-.
단테는 어느새 반절로 줄어든 푸른 숨결을 다시금 깊게 삼켰다.
그가 잠시 재를 턴 그 찰나의 순간 남궁연희는 어느새 단테의 곁에 앉아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다.
이쯤에서 되짚어 보자면 남궁연희, 아니 이젠 필리아가 된 그녀의 외모는 절대 못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생 역시 그녀의 외모는 어지간한 미녀는 무릎 꿇릴 정도로 반반했다.
“……허.”
그런 그녀가 한참을 단테와 시선을 맞추다가 손에 쥔 위스키 잔을 침대 머리맡에 있는 탁상에 탁- 하고 내려놓고는 그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요? 무림맹에서 한때 당신을 남색이나 탐하는 놈이라고 소문을 퍼트리려 했던 것.”
“뭐라고?”
다시금 푸른 숨결의 끝자락을 입에 가져다 대려던 단테는, 귀를 의심토록 하는 그녀의 폭탄과도 같은 선언에 드물게 감정을 드러냈다.
미간을 좁힌 채 되물은 것이다.
물론 그런 반응을 본 남궁연희는 오히려 좋다는 듯이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뭐, 실제로 실행되진 않았지만 말이에요.”
구태여 ‘천마씩이나 되는 사람이 평생토록 염문설 하나 비선들에게 들키지 않으니 그런 소문이 돈 것이 아니겠어요?’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드물게도 진심으로 싫다는 듯이 일그러진 단테의 얼굴을 눈동자에 담을 뿐.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마께서 당장이라도 유언비어를 퍼트린 놈들의 목을 추수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계신 것이 그리 흔한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같잖은 짓을 꾸미고 있었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파 놈들이 하는 짓이 그렇지 따위의 표정을 짓고 있는 단테를 향해 웃던 그녀는 이내 잠시 걸터앉았던 침대에서 일어나며 그가 원하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용건이 뭐냐고 물었죠?”
“그랬지.”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시네요.”
“뭐?”
황제 폐하.
그 단어에 단테는 무심결 입에 물려던 푸른 숨결을 다시금 떼어내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라, 그가 그런 족속과 언제 인연이…….’
“없진 않았지.”
단테는 아예 뒤바뀐 세상에서 만난 황제가 신교를 마교라 칭했던 황제와 뭐가 다르냐며 발작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물론 군인으로서 그리고 단테로서 몇 번 만난 적이 있긴 했고, 그건 불과 며칠 전의 쿠데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뿐.
이 시기에 황제가 자신을 보자고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가늠하던 단테는 남궁연희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그녀는 어쩐지 이전과 달리 능글맞아진 웃음으로 화답했으니.
“당신이라면 우리가 어떤 거래를 했는지 알 자격이 충분하니까 말이에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단테는 잠시 입에 물고 있던 푸른 숨결을 깊게 삼키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