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74화 (174/197)

레벤스라트 제국은 작금의 대륙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대국이다.

그런 제국의 수도, 그것도 황궁이나 다름이 없는 내성이 반파되었다는 사실은 평시라면 모든 신문의 호외를 타고 대륙 시골 마을 곳곳까지 퍼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 것이다.

하지만 예상 밖에 제국의 일은 대륙인들에게 그리 큰 감흥을 안겨 주지 못했으니, 그건 다름이 아니라 대군주 때문이었다.

“저, 저걸 어떻게 막으라고!”

“으아아아아!”

일선에 나갔던 군사들이 그야말로 갈려 나가고 있다.

이미 연합 왕국과 법국은 망르 해안가는 진즉에 망실했고, 놈은 등장한 지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구(舊)프란틴의 국경을 넘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가 아닌가.

치익, 습.

엘프 마피아, 드사 노스라 패밀리의 아스렌은 그런 생각을 하며 푸른 숨결의 끝에 불을 붙이곤 한 모금을 깊게 삼키고는 곧 특유의 검은 코트와 중절모를 여몄다.

다만 평상시와 다른 점이라면 그의 표정에 여유나 능글맞음은 사라지고 쓴웃음만이 남았다는 점일까?

“……이야, 진짜 개판이네?”

하지만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광경을 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 그 자신도 단어를 쉬이 고를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다.

‘피해 추정치가 각각 최소 1개 군단급이라고 했지.’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5에서 6만, 최대치로 잡으면 거진 10만에 다다르는 군세가 갈려 나갔다는 말이다.

그것도 단순하고 무식하게 병력만 추정.

기타 군용 장비들과 민간인들 피해까지 합치면 그 수는 적어도 2배까지는 올라가리라.

그는 그리 달갑지 않은 기분을 퉤- 하고 푸른 숨결을 바닥에 뱉어 버림으로써 해결하곤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섰던 전장을 등졌다.

파삭!

내디딘 걸음에 검게 물든 풀이 스치자 부질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래, 먼지처럼 말이다.

모든 생명력을 빼앗긴 듯이…….

아직 잔존하는 생명력도 물론 존재했으나, 이미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죽음을 앞에 둔 시한부를 보며 살아 있다고 말하진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고, 곧 마도구 하나를 꺼내 마나를 주입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어이쿠, 실수.”

하마터면 패밀리 전용 마도구에 말할 뻔했다.

아스렌은 답지 않은 실수를 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머리를 잠시 긁적거렸다.

‘이놈의 패밀리, 패밀리. 하도 읊조리니까 점점 물드는 거 같단 말이지.’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배신이나 하고 다니는 흑막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아스렌은 잠시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통신기를 다시 꺼냈다.

사실 배신자라고 하기에도 뭐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패밀리는 두 번째 직업이었는데 말이다.

통신기에 마나를 주입한다.

우웅-거리는 진동이 손안을 울렸고, 곧 그는 때마침 연결된 통신기 너머를 향해 말했으니.

“아, 오랜만입니다, 당주님. 제가 없던 사이에 이슈페인이 어리광을 부렸다던데.”

아스렌은 이제는 익숙해진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를 자연스럽게 살살 만지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당주, 남궁연희는 화답했으니.

〔남은 시간은?〕

주어도, 흔한 안부도 없는 간결한 물음.

하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편했기에 아스렌은 곧바로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길어야 한 달입니다. 당주님.”

그리고 그건, 썩 덤덤한 한마디였다.

기갑천마

기약할 수 없는 밤

한참 전투를 치른 뒤, 잠시 숨을 고르려 비행함으로 돌아온 클리에는 물을 묻힌 수건으로 간략하게 땀을 닦아 낸 후, 큰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함교 내부로 들어왔다.

“젠장! 젠장!”

그리고 그때.

지휘는 부 함장에게 넘긴 채 단독으로 강습전을 펼친 그녀에게 부 함장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제독님, 솔라 법국의 미카엘 님께서 통신을 원하신다고…….”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곤 곧바로 함장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그러고는 겉에 대충 걸치고 있던 연합 왕국의 구린 군복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힘줄이 꿈틀거리는 구릿빛 팔뚝이 드러났다.

그녀는 곧 부 함장이 가져다준 통신기를 쥔 채 책상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쥐었다.

치익, 습-.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흰색의 끝자락이 라이터 끝에 피어오른 불꽃과 잠시 만나 일렁거리다가 이내 타들어 가고, 클리에는 폐부 깊숙하게 밀려들어 오는 연기를 한 모금 삼킨 후 뱉어 낸다.

그리고 때마침 우웅- 하고 번뜩이는 빛에 마찬가지로 마나를 불어 넣은 뒤 물었다.

“후우, 빌어먹을……. 그쪽은 좀 어때?”

일이 풀리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신경질일까, 아니면 단순히 초조함이 뒤섞인 것일까.

뜻 모를 클리에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타고 너머로 흘러갔다.

그리고 곧 짧게 빛이 반짝거리며 귀에 익은 남자, 미카엘은 침울함을 넘어 어쩌면 무력감마저 느끼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법국 역시…… 딱히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벌써 두 명의 기수가 네임드와 교전하다가 목숨을 잃었죠.〕

“뭐?”

그의 말을 들은 클리에는 그리 크진 않았으나 잠시 입에 물던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을 멈추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법국의 기수(旗手)란 무엇인가?

‘사실상 에이스지, 에이스.’

그 자체로 추기경을 따르는 고위급 인물로 한 명 한 명이 에이스 중의 에이스, 혹은 로열 가드의 단장급으로 평가되는 인재들이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클리에였기에 기수 두 명을 잃었다는 미카엘의 말에 내심 지원을 요청하려던 그녀는 반쯤 타들어 간 담배의 필터를 잘근 씹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씨발, 이러다가 진짜 다 뒈지겠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

엄연히 연합 왕국의 제독이 법국의 차기 추기경이나 다름이 없는 미카엘에게 하기엔 거친 말이었으나 둘 다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대륙이 망할 위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치이익-.

클리에는 채 반절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책상에 놓여 있던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곤 통신기 너머로 연결되어 있는 미카엘에게 물었다.

“전황은?”

〔부르첸, 카네, 쿤타이온, 라발 등……. 총 열두 개의 중소 도시가 무너졌고,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최소 10%의 영토가 마수들에게 넘어갔습니다. 단 일주일 만에요.〕

“그래, 일주일 만에 그렇게 됐지. 그래서 우리가 이 전선에 서 있는 거고.”

미카엘은 서부전선, 클리에는 남부전선.

각각 법국과 연합 왕국의 새로운 국경이 된 최전선에 서 있는 둘이었기에 눈앞의 광경이 더욱 암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전선이 펼쳐진 대륙의 지도를 본 그들을 비롯한 각국의 참모진은 실소를 터트리며 생각했다.

“허…….”

“거참.”

어쩜 살다 살다 이런 전선을 보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던 네임드가 나타나는 건 둘째 치자. 최상급 마수는 물론이고 대륙의 마수란 마수가 죄다 몰려오는 것도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클리에는 도저히 불길함과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새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고, 곧 그녀는 탄식하듯이 읊조렸으니.

“대체 저 새끼는 왜 멈춰선 거지?”

그녀의 시선이 함교를 넘어 거대한 전선의 끝에 다다랐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닌 이 전장에 서 있는 이라면 누구든지 보고 있을 광경을 눈에 담았다.

-콰아아아아앙!

-퍼어어어엉!

비행함들은 하늘을 가득 메울 기세로 몰려와 포문을 열고 포신이 벌게질 때까지 포를 쏘아 댔다.

그뿐인가?

대지에선 법국과 연합왕국, 제국과 프란틴의 유민들, 엘프와 오크와 같은 이종족들이 제각기 총과 수류탄을 들고 참호와 포병의 엄호 아래에 간신히 전선을 유지 중이었다.

“마수들이 몰려온다!”

“빌어먹을, 저 개새끼가 또 마수를 뱉어 냈어어!”

그러나 전황을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장의 저 멀리에 자리를 잡고 있음에도 육안으로도 훤히 보이는 놈.

-끼기긱……. 까드득…….

마치 낮게 입질을 하는 듯한 소리와 더불어 검은 장막이 나풀거리는 듯한 거대한 육신, 나아가 섬뜩한 붉은 안광까지.

“대군주.”

모든 마수를 지칭하는 ‘군단’의 주인이자,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와 게걸스럽게도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를 포식하려 하는, 전례가 없는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까드득…….

놈이 입을 한번 우물거릴 때마다 수백, 수천의 마수들이 토사물 속에서 일어나 전장을 내달린다.

그러고는 저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실로 비열하고도 우스운 전략이다.

명색이 대군주라는 놈이 제대로 싸우는 꼴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럼 뭐 해애애!”

“마석 가져와! 마석!”

하지만 군인들은 알았다.

대군주가 갑작스럽게 진군을 멈췄든, 놈이 일신의 거대한 엉덩이를 떼지 않고 단지 마수들만 전선으로 투입해서 시간을 끈다고 해도, 이대로 목숨을 바쳐 전선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이 없다면 결국 도로 원상태로 복귀라는 것을 말이다.

어찌 모르겠는가.

전장에서 직접 총을 쏘고 싸우는 것은 그들 자신일 터인데.

“끅, 끄윽…….”

“애새끼처럼 울지 마라. 짜증 나니까.”

“에휴, 어차피 망했습니다. 곧 뒈질 전우인데 울 시간 정도는 주시지 말입니다.”

“뭐? 너 죽고 싶냐?”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와 군율은 나날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그런 것들을 상기한 그녀는 어느새 책상의 턱에 다리를 기대곤 묵묵히 통신기의 겉을 슬며시 어루만졌고, 곧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던 그녀는 어쩌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카엘에게 물었으니.

“……아, 모르겠다. 그래서 단테 대령은 대체 언제쯤 연락이 되는 건데?”

〔……저도 궁금합니다. 하하.〕

돌아오는 답은 마찬가지로 씁쓸한, 그리고 의문이 담긴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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