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페인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러자 살짝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인지 알아.’
진즉에 칩이 박힌 뇌 속의 연산 장치가 빠르게 돌아가며 눈앞의 상대에 대한 정보를 의식 속에 쑤셔 박는다.
정보는 잘 정리된 파일처럼 나열된다.
‘이름, 단테 드 헤로이스. 소속은 특임대. 블랙 가드 제10 단장이며 우리와 같은 멸망한 세상에서 빙의되어 온 빙의자…….’
정보의 과다는 가뜩이나 추락한 그의 의식을 더욱 심연 아래로 가라앉힌다.
“……이게 누구이신가. 쿨럭!”
하지만 입은 그의 의지와 달리 내면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좋으시겠습니다, 당주님. 쿨럭! 그렇게 찾고 찾으시던 남자를 만났으니까……. 거기에 적까지 알아서 처리해 주니 백마 탄 왕자님이 따로 없군요. 큭큭!”
그러나 그는 구태여 입을 닫으려는 시도를 하진 않았으니, 그건 그가 지금 내뱉고 싶은 말과 딱히 다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묵묵히 자신이 내뱉는 이죽거림을 듣고 있던 단테는 한 발자국 성큼 걸어와 철창 앞에 섰고, 곧 한쪽 무릎을 굽혀 자신과 시선을 맞추곤 말했다.
‘무슨 말을 할까.’
천마라고 불렸다고 들었다.
백월신교인지, 백백신교인지 말 같지도 않은 이상한 교단의 수장이며 흔히 패도(霸道)를 따른다는 기이한 집단의 수장이라지.
아마 이렇게 된 자신을 비웃으리라.
때문에 이슈페인은 무심결 입술을 잘근 깨물곤 말했다.
“쿨럭, 착각하지 마라. 나노 머신만 멀쩡했더라면 네놈 따위는…….”
“이야, 이슈페인. 추해.”
“……넌 닥쳐!”
패배한 주제에 팔자 좋게 당주와 각각 담배와 푸른 숨결을 태우던 세이티나가 장난스럽게 말을 얹었으나, 그는 지금 시시한, 어쩌면 유치하기까지 한 농담을 들어 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안광을 터트렸고, 이내 손을 뻗어 철창을 잡았다.
철그럭!
그그그긍!
세이티나와 베데눔과는 달리, 목과 손목으론 모자라 사지를 구속한 구속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동시에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단테에게 말하니.
“축하한다. 쿨럭! 전부 망쳐 주셨군.”
그건 어쩌면 울분이었고, 분노였으며, 나아가 비통함이었다.
이슈페인은 마치 토해 내듯 말했다.
아니, 차라리 그건 하소연에 가까웠다.
“네가 대체, 우리가 그토록 인내하고 고통받던 시간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 빌어먹을……!”
그러나 그때.
단테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가 내뱉은 울분이나 분노에 대한 해답 따위가 아니었으니.
단테는 단지 그를 특유의 붉은 눈으로 응시하다가 말했다.
“류튜스는 처형당했다. 황태자는 유폐되었고, 아마도 다시 밖으로 나오진 못하겠지.”
“……뭐?”
기갑천마
망상의 무게 (2)
단테가 입에 담은 것들은 간결했다.
이슈페인, 그가 이번 일을 행함으로써 일어난 모든 일을 나열할 뿐이었다.
일종의 업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망상의 삿된 결과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허.”
하지만 단테의 말이 이슈페인에게 와닿는 그 순간, 그는 되레 미간을 좁힌 채로 반문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이지? 쿨럭!”
하찮게도 죄책감을 일깨우려는 수작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런 말을 함으로써 무슨 감화라도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슈페인의 입꼬리에 조소가 맴돈다.
그리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결국 류튜스도, 황태자도 스스로 선택한 거다. 쿨럭! 그런 웃기지도 않는……!”
“뭐라는 거냐.”
그러나 그때, 단테는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내뱉는 거냐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무심하게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너도 같은 처지가 될 거라고 말하려 했거늘.”
“……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단테의 한마디에 이슈페인은 그저 황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애초에 온몸이 구속된 상태 아닌가.
한편 단테가 내뱉을 말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비단 이슈페인뿐만이 아니었으니.
뒤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세이티나는 물론 남궁연희조차 그가 내뱉은 말에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후-.”
그러고는 이내 남궁연희는 시가 모양을 한 푸른 숨결의 끝자락을 전용 커팅기로 잘랐고, 곧 투둑- 하며 추락한 불씨는 서늘한 바닥을 몇 바퀴 빙그르르 돌다가 이윽고 멈춰 섰다.
콰지익!
불씨를 발로 밟아 돌린다.
그것은 이윽고 묵직한, 어쩌면 날카로운 섬광을 일으키며 꺼졌다.
동시에 남궁연희는 앞으로 걸었다.
그러고는 단테의 곁에 서서 이슈페인의 몰골을 한번 가볍게 훑었다.
그나마 세이티나와 베데눔은 원로라는 직위를 생각해서 옷이라도 정갈하게 입혀 둔 것에 반해, 그는 그마저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당연하지. 협조를 이렇게 안 하는데.”
남궁연희는 품 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 그 안에 태우던 푸른 숨결을 갈무리했다.
이내 단테에게 농락당했다고 생각한 건지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슈페인에게 말했다.
“대군주가 나타났다는 건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이제 알았을 거고, 그럼 남은 건 선택인데.”
이미 블랙 가드의 내부적인 솎아 내기는 진행 중이었으니, 셋의 하운드들은 물론 그들과 연관된 조직원들은 모조리 색출 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뒤에 선 세이티나와 베데눔, 그리고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이슈페인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향할 건가요?”
단테에게나 입에 담던 존대를 내뱉는다.
언뜻 가벼워 보이는 물음이었으나 그것은 그녀가 이슈페인 등에게 가담했던 모든 블랙 가드들에게 주는 선택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묵묵히 그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이티나는 어느새 거의 다 태운 담배를 감옥 바닥에 퉤- 하고 뱉어 내곤 물었다.
“만약에 안 하면?”
물으면서도 이미 어느 정도는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한 묘한 웃음이다.
그리고 옆방에 구속되어 있는 베데눔 역시 남궁연희를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의 대답이 어떤 결과를 낳을까.
그것을 가늠하던 남궁연희는 이윽고 옅은 미소를 띤 채로 화답했으니.
“글쎄요.”
그것은 두루뭉술한, 그렇기에 더욱 와닿는 한마디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