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68화 (168/197)

황성 내부의 전투는 꽤 흥미롭게 흘렀다.

정확히는 한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림으로써 ‘내부’라고 말하기도 뭐했으나 어찌 되었든 황성의 내부였던 것은 맞으니 표현상 큰 문제는 없으리라.

물론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말이다.

〔허억, 허억…….〕

황태자의 로열 가드 중, 나이트 프레임에 오른 최후의 로열 가드는 온갖 잔해 속에 틀어박힌 기체의 콕피트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상기하고 또 괴로워할 새도 없이 그저 읊조리듯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으니.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쿨럭!〕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에서 기인한 그저 투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이 단말마의 한숨이라면, 그만큼 두려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만약을 가정한다.

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로열 가드는 그런 덧없는 가정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엉!

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단 전용기라고 말하기에도 괴리감이 넘치는 기이한 기체들의 전투 장면이었다.

〔크아아아아아!〕

움타르의 기체는 정말 그다웠다.

고동빛인지, 아니면 구릿빛인지 모를 색에 특유의 문신까지 도장으로 각인이 되어 있는, 근육질 거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묘한 웃음마저 자아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군일 때였고, 정작 그를 정면에서 마주해야 할 이들에게 움타르는 그 자체로 악몽이나 다름이 없었다.

〔크으윽!〕

〔크하하하하하! 후크트!〕

평소에 웬만해선 숨소리조차 잘 내지 않는 하운드가 단지 기체의 주먹을 받아 낸 것만으로 고통 섞인 신음을 터트린 것만 봐도 자명하지 않은가.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본디 원로와 하운드는 그 차이가 극명했기에 당장 그의 앞에서 맞서는 하운드들조차도 그 정도 차이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그들이 착각하고 있던 것이 있다면 그건…….

〔커헉!〕

‘다수가 덤비면, 버틸 순 있겠지.’라는 허황되고도 멍청했던 만용이었다.

〔흐으읍!〕

콰아아아아앙!

끼기기긱!

뻗은 주먹에 직격당한 하운드들의 기체는 이미 무너진 알현실의 폐허 속으로 나뒹굴거나 혹은 아직 채 무너지지 않은 곳을 기어이 무너트렸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때때로 반격이 움타르의 나이트 프레임을 스쳤으나 그뿐.

〔가당찮다! 흐탐!〕

움타르는 도리어 대리석이 뒤집혀 드러난 흙바닥에서 거대한 도끼 형상을 꺼내고는 양팔을 넓게 펼치며 일갈했다.

그 모습은 흡사 뭐랄까.

……그래, 먼 과거 존재했다던 야만 전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슈페인이라고 가만있진 않았다.

“빌어먹을 캄푸트.”

그는 나지막하게 움타르의 기체, 캄푸트(Kamput)의 이름을 읊조리곤 평소 옷 안쪽에 넣어둔 목걸이 형태의 마스터키를 꺼냈고, 곧 그것은 이슈페인의 내면에 자리한 소형 원자로와 교감하여 빛을 번뜩였다.

마기나 마력, 기(氣)와는 또 다른 기운인 전력이 마스터키에 일종의 동력을 주입하는 것이다.

그 감각을 느끼며 이슈페인은 생각했다.

‘아직 나노 머신들이 좀 불안하긴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기에 맞서지 않는다거나 몸을 사린다는 선택지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오라, 메카니카.”

메카니카(Mechanica).

룬어를 제국어로 옮기자면 ‘기계적인’ 내지는 ‘기계의’라는 뜻을 가진 나이트 프레임.

다른 기체들과 달리 4개의 다리를 가지고 투박한 장갑과 대비되는 휘황찬란한 LED를 번뜩거리는 모순적인 기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한편.

〔후, 우린 대화라도 좀 해 볼까요. 그래서 왜 변심한 겁니까? 평소 이런 건 신경도 안 쓰던 분이.〕

〔…….〕

제각기 기체에 오른 사마제천과 베데눔은 서로 이미 한차례 맞붙은 후, 숨을 고르며 대치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분위기는 정적.

사마제천은 제5 원로인 베데눔이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알고는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 아십니까? 아무리 침묵이 미덕이라고 한다지만 과하면 그거대로 문제라는 겁니다. 이유라도 좀 알아야 제가 결정을 내릴 거 아닙니까.〕

결정을 내린다.

그 말을 들은 베데눔의 기체가 안광을 터트린다.

동시에 그토록 듣기 힘들다는 베데눔의 한마디가 사마제천의 귓가를 스쳤다.

〔……무엇을?〕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이지만 꽤 오랜 기간 베데눔을 보고 때때로 함께한 사마제천은 어렵지 않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무엇을 결정하냐는 거겠지.

물론 답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적당히 제압만 할지, 그게 아니면…….〕

다만 그 대답을 내뱉는 순간 둘의 얼굴은 극명한 대비를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

〔진짜로 숨만 붙여서 살려 둘지 말입니다.〕

사마제천은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고, 그와 대치하던 베데눔은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기묘한 정적이 스쳤다.

하지만 이어진 베데눔의 대답은 간결했다.

파앙-!

거대한 기체가 일순간 사라졌다고는 믿을 수 없는 빠른 속도였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전까지와 달리 거대한 소음이 울려 퍼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정작 베데눔과 맞서는 사마제천은 태연했으니, 그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

〔이런.〕

이미 이것 역시 알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사마제천은 낮게, 어쩌면 이죽거리는 듯이 읊조리곤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그러곤 말한다.

〔판타시아는 여전합니다.〕

판타시아(Phantasia).

허상이라고도 해석되는 그 이름을 읊조린 그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자신이 탄 기체의 허리를 비스듬하게 틀었다.

그 순간 종이 한 장의 차이로 그는 판타시아가 뻗은 단검을 피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직후.

사마제천은 말했다.

〔그거 압니까, 베데눔.〕

끼기긱!

사마제천이 탄 기체는 뭐랄까, 백색의 기체임에도 묘하게 어두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광의 백색 기체의 장갑은 온통 흑백으로 치장된 하운드의 그것보다 선이 얇았다.

거기에 그의 무기는 여타 다른 기체들이 쥐고 있는 무기와는 달리 하나의 철로 된 거대한 부채였다.

그리고 그는 말하니.

〔당신은 제가 기체에 오르기 전에 제 목숨을 취했어야 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건…….〕

그건 언뜻 비웃음과 안도가 뒤섞인 한마디였다.

〔원해서 이슈페인에게 가담한 것이 아니군요. 이 우둔한 그림자 같으니.〕

〔…….〕

베데눔은 긍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마제천에게 달리 해석될 여지조차 없는 암묵적인 동의였기에, 그는 더 망설이지 않은 채 부채에 내력을 끌어 올리곤 말했다.

〔조금 아플 겁니다. 아르스는 여간 다루기 힘들어서요.〕

그 말이 내뱉어진 직후.

부우웅,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거대한 부채는 휘저어지며 베데눔의 기체, 판타시아의 가슴팍을 훑었다.

콰드드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린다.

〔……흡.〕

동시에 베데눔은 바다 깊이 눌러져 있다가 숨을 내뱉기라도 한 듯이 옅게 신음을 터트렸고, 직후 판타시아는 허망하다 싶을 정도로 그대로 기울어지며 환한 빛과 함께 추락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최소한의 명분을 남긴 채 전장에서 빠졌다고 봐도 무방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

스스슥-.

한창 움타르와 맞서는 이슈페인에게로 향하려던 사마제천은 무언가 질질 끌고 오는 듯한 소리에 시선을 뒤로 옮겼다.

그러다 곧 한 사내와 고깃덩어리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이 길게 끌려오는 모습을 눈에 담고는 나지막이 실소할 수밖에 없었으니.

〔……참, 여전하시다니까.〕

그가 그렇게 읊조린 순간.

단테는 손에 쥔 세이티나를 터억 내려놓고는 무너진 알현실과 전장을 훑고는 말했다.

“아직도 안 끝났나, 쯧.”

기갑천마

제도의 밤 (11)

“…….”

베데눔은 언제 그렇게 날뛰었냐는 듯이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며 옅게 숨을 골랐다.

물론, 그 모습은 한없이 이질적이다.

명백히 말하자면 그의 모습은 전투 불능보단 명분 하나를 쥐고 전투에서 빠지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아니, 보인 것도 아니다.

그의 목적은 애초에 그것이었으니까.

그것을 짐작한 사마제천과 남궁연희는 하운드에게 눈짓하여 그를 건드리지 말 것을 명령했다.

베데눔 역시 이쯤 되면 해야 할 일은 전부 했다는 듯이 그저 묵묵히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알현실, 아니 이젠 알현실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공간을 훑을 따름이었다.

〔제기랄, 베데눔…….〕

당연히 이슈페인이라고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을까.

자신을 한번 힐끗 바라보다가 이윽고 묵묵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베데눔을 바라본 이슈페인은 이윽고 미간을 살짝 좁혔으나 더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그는 망설이고 있는 베데눔보다는 눈앞에 선 단테에게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곧 단테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이슈페인의 시선을 느끼고 손에 짐짝처럼 쥐고 있던 세이티나를 그대로 터억,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얼추 정리되긴 했군.”

그건 미묘한 감정을 가진 목소리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언뜻 질타하는 듯하면서도 그 이면엔 꽤 기꺼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때.

“쿨럭!”

먼지가 나뒹구는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기 때문인지, 마기를 미처 완벽히 누르지 못한 탓에 아직 흉터가 남아 있는 얼굴에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눈을 뜬 세이티나는 이윽고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곧 고개를 살짝 치켜세우고는 나지막이 읊조리듯이 말했다.

“……이 새끼, 싸움 존나 ……잘해. 쿨럭!”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경박한 어투다.

〔하핫.〕

그 때문일까. 나이트 프레임 아르스에 올라타 있는 사마제천은 물론이고, 남궁연희 역시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동시에 세이티나에서 단테로 시선을 옮긴 남궁연희는 엉망이지만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이는 세이티나를 힐끔 훑고는 말했다.

“살려 왔네요?”

그것은 꽤 기꺼운 목소리였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고마움, 또는 조금은 엇나갔다고 하더라도 지난 50년을 함께한 이의 마지막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많은 감정이 그녀의 눈을 짧게 스쳤다.

그러나 정작 단테는 그녀에게 간결하게 답할 뿐이었으니.

“착각하지 마라. 그저 아까웠을 뿐이니까.”

“아깝다뇨?”

“건방지긴 해도, 대군주와의 전투에선 충분히 쓸 만한 자원이 아닌가.”

“아.”

그제야 남궁연희는 뒤늦게 눈을 크게 뜬 채로 한 번 깜빡거리다가 이윽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단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세이티나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볼 뿐인 것이다.

그때였다.

마찬가지로 전용기인 메카니카에 올라 한창 전투를 이어 가던 이슈페인은, 문득 귓가를 스치는 익숙하고도 섬뜩한 단어에 무심결 반문했다.

〔……대군주?〕

지금 그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는 미간을 좁히며 단테에게서 시선을 옮겨 남궁연희에게 향했다.

그 순간 자신에게 쏠린 이슈페인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는 설마 몰랐냐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그래, 대군주. 설마 몰랐나?”

존대는 하대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단테를 제외하고 그들에게 남궁연희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

이슈페인은 대답하지 못했고, 남궁연희는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살짝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일그러트린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하아, 대군주가 나타났어. 망르 해안가에서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지. 정말 몰랐나? 글쎄…… 이슈페인 너도 시기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서 이 말 같지도 않은 쿠데타를 계획한 걸 텐데?”

이번에도 이슈페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 머지않아 대군주가 대륙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기 위해 오리라는 것은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실수라면 이렇게 빠르리란 예상은 하지 못한 것일까.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진통제 역할을 해주는 주사를 허벅지에 꽂으며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머리가 복잡하다.

진즉에 생체적인 부분은 모두 제거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두통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아아…….〕

밀어낸 숨결이 콕피트 내부를 한 바퀴 감싸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많은 감정이 담긴 한숨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없음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기에 남궁연희는 다시금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선택할 때라는 걸 구태여 덧붙여야 할까.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단테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서늘한, 언뜻 권위적인 목소리로 읊조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이슈페인은 고개를 들었다.

진통제의 효과일까.

아니면, 단순히 모든 일이 어그러졌다는 걸 스스로도 체념해서일까.

그는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선택, 선택이라…….〕

그의 입꼬리에 비릿한 조소가 맴돈다.

전장을 살피는 푸른 눈동자에 맺히는 상황은 한없이 불리하기 짝이 없음을 어찌 그가 모르겠는가.

〔끄윽…….〕

〔허억, 허억…….〕

황태자의 로열 가드들은 이미 진즉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알현실을 이루던 폐허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슈페인과 세이티나의 하운드들 역시 상대 하운드들, 그리고 움타르와 맞서는 과정에서 꽤나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손실이라는 말도 우습다.

이미 알현실의 전황은 단테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그들에게 한없이 불리하게 흘렀으니까 말이다.

‘애초에, 베데눔은 하운드를 동원하지도 않았지.’

차라리 그뿐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슈페인은 다시금 정신을 잃은 듯이 흙먼지 속에서 볼품없이 나뒹구는 세이티나를 내려다보았다.

‘천마라…….’

헛웃음이 입가를 맴돌았다.

일전, 남궁연희와 사마제천에게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뜬 구름을 잡는 느낌이었다.

그저 그런 놈이 있구나- 정도의 감흥이었달까.

사실 조금은 답답하기도 했다.

그들은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남궁연희와 사마제천은 물론, 그과 인연이 닿아 있는 하운드들조차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땐 무심결에 그리워하는 모습을 비쳤으니까.

과거의 일에 마모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있던가?

단연코 없다.

‘그러나 놈이 나타나고, 깨달았지.’

처음엔 단순한 흥미였으나, 일을 계획하며 그의 발자취를 쫓다 보니 알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내이긴 했다.

하지만 그에게 닿는 흥미는 격동적이지 않았다.

아군으로 삼는다면 꽤 듬직하겠으나, 적이라고 해서 거리낄 건 없는…… 딱 그 정도의 감상이랄까.

‘그게 패착이었나.’

글쎄,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슈페인은 어느새 몸을 둔하게 만들어주는 진통제의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초에 선택지가 있었나?〕

그건 명백한 거절의 뜻이었다.

동시에 그의 하운드들 역시 주군의 의지를 따르겠다는 듯이 이어질 전투에 대비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야말로 폭풍전야.

그러나 그때.

이미 허리가 끊어진 기둥에 기대어 묵묵히 숨을 고르고 있던 베데눔이 스치듯이 말했으니.

“……그만해, 이슈페인.”

갈라진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으나 전장의 혼란스러움을 뚫고 이슈페인에게 닿기까지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베데눔은 머리에 쓴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곧 검은 피부를 가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 말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는 말하고 있음에도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점일까.

마치 입이 하나의 장식품처럼 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말했다.

“……어차피 망상이었다. ……알 텐데.”

베데눔이 이렇게 길게 말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임과 동시에 그의 말은 이슈페인의 뇌리를 스치며 맴돌았다.

-망상이었다.

-너도 알 텐데.

두 단어는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미간을 좁힌 그가 무심결 멈칫거리자 당장이라도 앞으로 뻗어질 듯했던 메카니카의 움직임이 주춤거렸다.

그 순간을 단테는 놓치지 않았다.

군화가 먼지로 가득한 대리석 바닥을 디뎠다.

내딛듯이 디딘 발 구름은 이윽고 대지를 한번 크게 울리며 그의 육신을 단번에 허공으로 솟구치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이슈페인 역시 한 발은 늦어도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눈을 번뜩였다.

〔단테에에에에!〕

조금 둔한 반응이긴 했으나 다른 이들이 보기엔 즉각적인 대응이라 느껴질 정도로 빠른 반격이었다.

주먹이 뒤로 당겨진다.

그에 따라 꿈틀거린 메카니카의 관절은 기계적인 움직임을 유려하게 뒤틀며 곧 이슈페인의 의지를 대변하듯 주먹을 뻗었다.

푸른 섬광이 일렁거린다.

끼기긱! 하며 울린 소리가 모두의 귀를 스치고, 일부 하운드들은 당장이라도 주먹에 직격당해 날아갈 듯한 단테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향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단테는 시야를 가득 채우는 이슈페인의 기체, 메카니카의 주먹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으니.

“벤데타.”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조롱도, 도발도, 이어질 전투에 대한 감흥도 아닌, 언뜻 듣기에는 미소가 어린 듯한 한마디일 따름이었다.

〔뭐?〕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슈페인은 그에게 되묻듯이 말했으나, 시간은 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까지 기다려 주는 친절한 법칙이 아니었다.

콰드드드득!

단테의 손끝이 이슈페인의 주먹을 지나 팔에 박히고, 그는 미끄러지듯 그의 팔을 따라 이슈페인의 콕피트 앞에 닿는다.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니.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를 확인한 이슈페인은 한마디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

당연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테가 메카니아의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하고 미끄러지듯이 그의 팔을 따라 내려온 순간 낯이 익은, 그러나 절대 지금 보여선 안 될 검은 빛이 그의 시야를 어지럽게 뒤덮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직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그러나 온갖 흠집과 상처로 뒤덮인 거대한 주먹이 단번에 콕피트를 주먹으로 덮쳤다.

이슈페인은 그대로 밀려오는 충격에 기체가 역소환되는 감각을 느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미친 놈, 커헉!”

〔……세상에.〕

〔클클! 재미있군. 후틈!〕

비단 이슈페인뿐만이 아니다.

사마제천 역시 그 모습에 무심결 한마디를 중얼거렸고, 움타르는 웃음을 터트리며 흥미가 담긴 눈으로 추락하는 단테와 벤데타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쿨럭!”

추락하는 단테가 꺼낸 벤데타는, 원래대로라면 전용기로 사용되는 4세대 기체라고 한들 폐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 증거로 그의 곁에는 역소환되면서도 잔해로 무너지는 기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았다.

저 상태의 기체를 꺼내는 것은 얼마나 부담되는지.

아니……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단테가 멀쩡해 보인다는 점일까.

“하아.”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연희는 무심결 미간을 좁히곤 낮게 한숨을 쉬며 읊조렸으니.

“여전하네, 정말.”

그건 어딘가 묘한 한마디였다.

기갑천마

관대한 처분

스윽-.

단테는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닦아 냈다.

턱선을 따라 미끄러진 그것은 피부에 붉은 자국을 남겼지만, 그는 그다지 개의치 않으며 단지 앞으로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터벅.

한 걸음을 내딛자 군화에 미처 가라앉지 않은 먼지가 일었다.

조금은 비틀거리는 듯한 모습에 무심결 하운드들이 그를 부축하려 향하려 했다.

하지만 곧 걸음은 정상적인 흐름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그들은 단테의 모습을 보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 그건 다름이 아니라 그가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만한 건가, 아니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만이라기엔 보아 온 것들이 있다.

당연하다기엔 상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때문에 이 폐허 속을 걷고 있는 단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곧 그것이 자신감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 어떠한 것에 대한?

‘이슈페인이 절대, 자신의 뒤를 노리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

이슈페인이라고 그걸 느끼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 역시 단테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걸 아주 절실히,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더욱 잘 와닿게 깨닫고 있었기에 당장이라도 그의 뒤를 노리려 튀어 나갈 듯했다.

“이, 이, 개 같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한계를 넘은 그의 육신은 그대로 미끄러지듯 기울어졌다.

그러다 곧 콰앙-! 따위의 소리와 함께 먼지를 풍기며 이슈페인은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단테의 자신감이 현실로 보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어느새 남궁연희 곁까지 다가온 단테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

노곤함이 담긴 목소리다.

비록 겉으로 티가 크게 나진 않았으나 남궁연희는 단테가 무리했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구태여 입으로 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교, 아니…… 대령님.”

그리고 그 직후, 그녀가 단테에게 건넨 ‘원로로서의 예우’에 포함된 하운드 중 제일 선두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한쪽 무릎을 굽혔다.

“모시겠습니다.”

단테 역시 그것에 답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끄덕일 뿐인 것이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 증거로 그의 걸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뒤를 따르는 하운드들 역시 그의 태도에 어떤 불만도 가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충성.

남궁연희는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때마침 기체에서 내려온 사마제천과 눈을 마주치곤 옅게 심호흡을 했다.

후하-.

숨결 사이로 메케한 먼지가 일렁였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옷매무새를 가볍게 다듬은 그녀는 단테와 있을 때와는 달리 서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블랙 가드의 당주로서 명하겠다.”

그녀의 읊조림에 기체에서 내린 사마제천은 물론, 움타르와 같이 아직 기체에 올라 있는 이들 역시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고.

“전부 체포해.”

그건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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