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64화 (164/197)

둘의 주먹이 맞닿은 직후, 영겁처럼 느껴지는 찰나가 지나자 승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쿨럭!〕

마른기침 속에 핏물이 뒤섞여 보랏빛 액체 위를 부유한다.

세이티나는 저릿한 손과 내상을 입은 육체를 가늠하며 쓴 웃음을 지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이런, 빌어먹을 반쪽짜리 몸.〕

마기(魔氣)란 무엇인가?

흔히 마법사들이 다루는 마력(魔力)과는 달리, 오직 마족과 악마, 혹은 그들과 계약한 인간들에게만 허락되는 본질적인 음(陰)의 힘인 것이다.

한데, 이미 그 자체로 마족인 정체성을 가진 그녀의 힘은, 마족이나 악마 따위와 계약한다고 해도 온전히 다룰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애초에 이 세계엔 남아 있는 마족이나 악마 따위도 없었지만 말이다.

때문에 그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마인화(魔人化)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빙의한 육체가 상상 이상으로 나약한 몸이었다는 점이었다.

마인화는 그 자체로 몸을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나약한 몸은 그녀의 마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로 인한 반작용은 단테와 맞붙는 찰나의 순간 그의 공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퉤!〕

세이티나는 핏물이 가득찬 침을 콕피트 내부에 뱉어냈고, 저릿하다 못해 끊어질 듯 아려오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네카토르의 장갑이 벗겨지다 못해 갈라져 내부의 프레임이 드러난 것을 확인하곤 쓰게 웃었다.

〔쯧, 인정할 건 해야겠는데.〕

단테는 그녀 자신의 생각보다 강했다.

과연 당주가 그렇게 읊조리고 말하던 이유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짧게 스쳤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

곧 그녀는 비릿한 핏물이 묻은 입술을 한번 가볍게 훑고는 입을 열었다.

〔너는 강해. 하지만…….〕

악마가 심연 속에서 눈을 뜨듯 세이티나의 안광이 불을 뿜고, 동시에 오른쪽 팔이 날아가다시피 한 네카토르는 마치 더러운 벌레가 육신을 기어 다니는 듯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가슴팍을 거칠게 긁었다.

콰드드득!

갈라진 손톱의 궤적을 따라 상처가 남는다.

동시에 그녀의 이변을 느낀 벤데타의 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찰나.

〔내가 더 강할걸? 큭큭!〕

그녀의 눈과 입, 코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동시에 그녀의 육신을 타고 흐르던 짙은 보라색 마력이 빠르게 콕피트 내부의 액체와 동화되어 네카토르의 육신을 감싸기 시작하니,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단테는 자신도 모르게 조소에 가까운 미소를 흘리며 읊조렸다.

〔대체, 지난 50년 동안 어떤 놈들과 어울렸던 것인지.〕

까드드득!

마치 용의 외골격과 닮아 있었던 듯한 육신을 뒤덮던 장갑은 뒤틀리고 꼬이며 대지로 추락했다.

머지않아 날갯죽지에서 돋아난 기이한 뼈들이 눈 깜빡할 새에 형체를 잡아갔다.

뿌드득거리는 소름끼리는 소리가 귀를 스친다.

동시에 원래도 날카롭게 돋아나 있던 네카토르의 손톱은 마치 짐승의 것처럼 제멋대로 솟구쳐 늘어지고 등이 기형적으로 굽어졌다가 펴졌다.

“아, 아아…….”

그리고 마침내 모든 변화가 끝난 순간, 연기 너머로 서서히 비춰지는 실루엣을 지켜본 한 군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네카토르를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리니.

“아, 악마?”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라리이 중장도 한마디의 감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으니.

〔거주 구획으로 넘어가는 즉시 모든 화력을 집중해서 제압할 준비를 끝내라.〕

그렇게 명령을 내린 라리이는 이전까지와 달리 조금은 당황한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통신기를 끄고 말했다.

“……설마 저거까지 꺼낼 줄은 몰랐는데. 제대로 시동이 걸렸나 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모장은 그렇게 물었고, 라리이는 구태여 그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겠어.”

그의 시선은 보랏빛 불길한 아우라를 풍기는 네카토르에서 떠나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벤데타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윽고 품속에서 꽤 고급인 듯한 시가를 입에 물고는 커팅 된 끝을 이빨로 질겅 물었다.

“우리의 천마님께서 잘 때려눕혀 주시기를 바라야지. 뭐, 혹시나 지면…….”

말을 흐린 그는 곧 손에 낀 반지 모양의 마스터키를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그땐 우리가 나서야겠지.”

그 안에 담긴 것은 묘한 두려움과 동시에, 눈앞의 전투에 대한 기대감일 뿐이었다.

기갑천마

제도의 밤 (7)

-크그그그그.

세이티나의 기체인 네카토르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그 자체로 악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라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 자체가 악마였으며, 그 형질은 그녀의 기체에도 온전히 전해졌으니까 말이다.

끼기기긱.

제멋대로 솟구쳤던 기이한 골격들이 마치 타락한 천사의 날개를 억지로 흉내 낸 듯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굽어진 허리를 기울이며 자리에 선 네카토르는 살짝 비틀어진 시선으로 단테를 응시했다.

그러다 세이티나가 말했다.

〔……어때? 쿨럭! 이제 좀 싸울 맛이 나겠지?〕

말 사이에 스치듯 지나간 기침 소리는 그녀가 지금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보여줬지만, 정작 단테와 세이티나 둘 다 그걸 신경 쓰지는 않았다.

끼이이…….

단지 단테는 굳은 기체의 관절부를 한번 가볍게 풀어 주고는 그녀에게 대답할 뿐이었으니.

〔말이 많다, 세이나.〕

〔……빌어먹을.〕

그 순간 세이티나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곧바로 대지를 박차고 하늘 위로 솟구치며, 광소와 짜증이 뒤섞인 외침을 내뱉었다.

〔세이티나라고! 세이나가 아니라!〕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기체가 순식간에 대지를 떠나 하늘 위로 솟구치자 당연히 그들의 전투를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던 제1 군단의 군인들은 비상이 걸렸다.

“격추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라리이 중장님 말씀 못 들었어?! 거주 구획 넘어가기 전까지 지켜만 보라잖아!”

“하, 하지만 자칫 잘못되면 막을 기회조차 없어지지 않습니까! 거주 구획에서의 대피도 아직 끝나지 않은 마당에……!”

장교의 말에 상관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주 구획에 피해가 갈 시 즉시 개입하라는 라이이 중장의 명령은 곧 ‘어느 정도 거주 구획의 피해를 용인한다.’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은가.

물론 소요가 황성을 넘어 내성 전체로 번진 직후 내성과 가까운 거주 구획에서는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는 소개 작업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방어선이 구축되고 있긴 했으나…….

“만약 조금이라도 빠르게 거주 구획으로 들이닥치게 되는 순간, 최소 수백에서 수천이 죽어 나갈 거란 말입니다!”

그의 지적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실현이 되는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암울한 미래를 그렸다.

때문에 현장 지휘관 중 몇몇은 결심이라도 한 듯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통신기를 쥐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뇌하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만연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휘하 장교들을 찬찬히 훑었다.

“…….”

“……대령님.”

장교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이어질 명령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다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대의는 현장 지휘관들에게 있었기에, 기꺼이 항명에 동참하려는 장교들이 더욱 많았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현장 지휘관 중 한 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통신기를 꽉 쥔 채 입을 열었다.

〔나는 트이렘 대령이다. 예하 연대에 소속된 대대는 지금부터 눈앞의 소요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그러나 그때였다.

“어?”

이어질 명령을 기다리던 군인들은 곧 눈앞에서 번뜩거리는 섬광에 눈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다가 곧 옅은 달빛만이 반짝거리던 검은 밤하늘을 뒤덮을 듯이 점멸하는 광원을 바라보았다.

“무슨……?”

막 명령을 내리려던 트이렘 대령조차도 무심결 통신기를 내린 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와 부관들은 그 순간 막사 안으로 일련의 검은 제복을 입은 이들이 들이닥치는 걸 한 박자 늦게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너, 너희는……?”

“커헉!”

“무, 무슨!”

막사 안에 들이닥친 검은 제복을 본 장교들은 늦게나마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대응하려 했으나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트이렘 대령을 제외하곤 모두 제압당한 후였다.

“브, 블랙 가드? 하지만 어째서……?”

당연하게도 트이렘 대령은 손에 쥔 통신기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제1 군단은 내부의 소요가 어째서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고, 다만 고위 장교들만이 쿠데타와 연관된 일이라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때문에 트이렘 대령은 어째서 블랙 가드가 이 소요를 막으려는 자신들을 제압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

“트이렘 대령.”

저벅.

낮은 군화 소리가 막사 안에 울리고, 곧 한 여자가 무표정으로 그에게 걸어와 말했다.

“항명의 조짐이 보여 부득이하게 거칠게 제압했습니다만, 혹 억울한 점이 있다면 후에 군사 법원에서 토로하시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차가운 인상.

단발로 자른 은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있지도 않다고 토로하는 듯한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

트이렘 대령은 곧바로 답하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막사 안에 들어온 여자, 아니 리렌 원사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없으신가 보군요. 그럼.”

“자, 잠깐!”

그는 마치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이 돌아서려는 그녀를 다급히 불렀다.

그러고는 곧 제압당한 채 먼저 블랙 가드의 일원들에게 끌려가는 부관들을 응시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응? 이해라도 하게 해달란 말이네.”

“상황 말씀입니까? 간단합니다. 쿠데타가 벌어졌고 그 상황을 블랙 가드는 황명으로써 제압 중입니다만.”

“어째서 블랙 가드가?”

그의 의문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블랙 가드가 어째서 제국군의 최정예 군단인 제1 군단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한다는 말인가.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럼.”

“자, 잠깐!”

하지만 리렌 원사는 자신의 권한을 넘기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의 말을 가볍게 일축하며 무시했다.

그 순간 트이렘 대령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수갑뿐이었다.

블랙 가드들은 그를 끌고 군용 차량에 태웠다.

그러자 곧 그들이 사용하던 막사는 텅 비게 되었고, 그곳을 잠시 훑던 그녀는 곧 다가온 한 사내에게 물었다.

“대군주의 동향은?”

“망르 해안가를 지나 인근 연합 왕국의 도시 3개를 궤멸, 직후 진군을 멈추고 있습니다만…….”

“아마 기다리고 있겠죠.”

“예, 대군주가 나타난 기점부터 중, 하급 마수를 제외한 모든 마수가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것이 나타내는 것은 간단했다.

대군주는 다가올 전투에서 소모품으로 사용할 ‘군단’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 머지않아 대륙은 멸망이냐 생존이냐를 두고 거대한 전쟁을 벌여야 하리라.

……전쟁. 유례가 없는 대전쟁.

리렌은 막사 너머의 허공에서 미친 듯이 맞붙는 단테와 세이티나의 기체를 응시하다가,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롭게 버티고 서 있는 황궁의 알현실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그가 있는 곳에서 늘 그랬듯이 부관으로서 함께 싸우고 있으나, 현 시점에서 그녀가 맡은 임무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마제천이 자신을 보낸 것이리라.

‘제1 군단의 전력을 온전히 보존해야 합니다. 기껏 집안싸움에 라리이가 어렵게 키운 강병을 잃을 필요는 없겠죠.’

그녀는 문득 사마제천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곧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사내에게 명령하며 몸을 돌린 채 막사 밖으로 향했으니.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항명, 혹은 쿠데타의 기색이 보이면 즉각 제압하고 반항할 시 사살하세요.”

“예. 원사님.”

그리고 그 직후.

트이렘이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현장 지휘관 6명과 부관 30여 명이 추가적으로 체포되었다.

물론, 제1 군단 대다수의 병사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제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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