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62화 (162/197)

“으아아아압!”

“죽여 버려!”

단테의 읊조림은 그 자체로 합의가 끝이 난 전투의 신호탄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로열 가드와 엠퍼러 가드들은 두려움을 애써 삼키며 다시금 손에 쥔 무기를 꽉 쥐었다.

혹자는 용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선택지가 딱히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반란을 획책한 시점에서 패배란 곧 죽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들도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발……!’

‘어떻게든 해 주겠지!’

로열 가드는 물론 엠퍼러 가드들조차 자신들과 달리 무표정으로 전투를 준비하는 하운드들에게 달려가면서도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묘한 기대와 불만, 나아가 막연한 안심이 섞인다.

그리고 그런 기대가 담긴 시선이 향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슈페인을 필두로 한 쿠데타 세력 측 블랙 가드의 원로들이었다.

……그들에게 이제 편은 중요하지 않았다.

놈들이 어떤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 또 어떤 기만을 하며 자신들을 이용하고 있는지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이 빌어먹을 지옥에서 자신들을 살려서 집에 돌려보내 줄 수만 있으면 그뿐인 것이다.

“……큭.”

그러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이슈페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녹색과 청색이 뒤섞인 눈동자 너머로 번뜩거리는 시간을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예상보다 더 빠른데……? 빌어먹을.”

아무리 무수한 경우의수를 계산해 보아도 이렇게 빨리, 그것도 남궁연희 혼자가 아니라 단테까지 데려올 정도라면 그들의 계획은 실행하는 시점부터 들켰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러나 당혹감이 맴도는 표정도 잠시.

그는 자신과 달리, 표정이 굳지 않고 송곳니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세이티나를 힐끔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티나.”

“그래, 안 그래도 움타르가 좀 지겹던 차였는데…….”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이슈페인의 목소리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고, 곧 뚜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물론 움타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세이티나! 지금 나를 두고 어디를 가는 거냐! 쿠으!”

“시끄러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쟤네랑 놀지 그래.”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시원한 무시.

이와 함께 그녀의 하운드들이 다가왔다.

결국 움타르는 기계처럼 근육을 꿈틀거리며 주먹을 뻗고는 억울함과 분함이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왜! 전사의 전투였거늘!”

“그거 알아, 움타르?”

“뭘…….”

퉤.

세이티나는 입안에 들어찬 모래가 뒤섞인 침을 뱉어 내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랑 싸우면, 모래를 아가리에 쑤셔 넣고 싸우는 느낌이라 별로야.”

“……아.”

그 말을 들은 움타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그건 내가 모시는 수호령이…… 크윽!”

이윽고 정신을 되찾은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성토하기 위해 무어라 외치려 했으나, 이어진 세이티나의 하운드들이 펼친 공격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움타르의 입을 잠시나마 막아 둔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단테를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고, 곧 마찬가지로 자신을 응시하는 단테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니.

“반갑다, 단테 대령. 아니, 천마님이라고 불러 줘야 하려나?”

이제는 무얼 더 숨길 이유도 없다는 듯이 내뱉은 말에 단테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잠시 연회장 내부의 흘러가는 상황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 뿐이었다.

“일단 빠르게 정리부터 해야겠구나.”

“명을 받드나이다.”

그마저도 세이티나에게 내뱉은 말이 아니다.

단테의 읊조림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을 꿇은 수십의 하운드들은 일제히 연회장 곳곳으로 흩어지듯 뻗어졌고, 그 모습에 세이티나는 놀라기라도 한 듯이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오호, 하운드들까지 붙여 주셨네요, 당주님. 이제 아예 원로로 들어온 건가?”

“설마요. 그저 돌려줘야 할 이들을 되돌려 주었을 뿐인걸요.”

반목하는 것을 넘어서 배신했음에도 세이티나는 남궁연희에게 예의를 지켰다.

마찬가지로 남궁연희 역시 그녀에게 불쾌감이나 호통을 치기는커녕 그저 마주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나 단테는 느꼈다.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이런 감정 낭비는 그에게 한없이 시간 낭비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습.”

때문에 그는 세이티나가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곧바로 대지를 박찼다.

콰드득!

그의 군림보로 인해 갈라진 대리석의 파편이 다시금 허공으로 튀었다.

그것이 최고 지점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단테의 몸은 마치 섬광처럼 뻗히며 세이티나에게 닿았다.

주먹을 말아 뒤로 당겼다.

동시에 손끝으로 밀어지는 내력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그의 육신을 감쌌고, 단테는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의 위치를 특정한 듯한 세이티나의 전투 감각에 내심 감탄하며 낮게 읊조렸다.

“한번 막을 테면 막아 보거라.”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묵환강(天魔黙丸鋼).

단테의 손끝에서 일렁거리는 구체는 머지않아 하나의 거대한 폭력이 되어 세이티나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 쇄도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거기에 모래도 없잖아!”

세이티나는 마치 오랜 시간 기다린 순간이라도 된다는 양 그렇게 외치고는 바로 명치 언저리까지 온 단테의 묵환강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는 것을 단테는 확신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녀 역시 그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게 뭐?”

세이티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씨익 웃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예쁜 호선을 그리며 도드라진 송곳니를 드러냈다.

머지않아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팔을 뻗어 단테의 손목을 쳐 냈다.

콰아아아아아앙!

공격은 그녀의 뺨을 스치고 기둥에 닿았다.

그 순간 기둥이 형태도 없이 무너졌고, 지지를 잃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천장이 두 남녀를 덮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둘은 걱정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일격에 천장을 뚫고 기둥을 무너트리는 이들을, 제정신이 박히고서야 걱정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캬하앗!”

퍼어어어어엉!

마치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리며 세이티나는 무너진 천장과 기둥의 잔해를 먼지로 만들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뒤이어 단테가 그런 그녀의 궤적을 뒤쫓았다.

“우어어어어어!”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다.

얼떨결에 상대를 잃은 움타르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세이티나의 하운드들을 몰아붙이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사마제천은 충원된 단테의 하운드들에게 도움을 받아 베데눔과의 전투를 버티고 있었다.

누가 우세한가 따위의 사실은 제각기 다르지만 공통된 사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아무래도, 알현실은 철거 후 재건하는 게 빠르겠군.”

황제의 권위와도 직결되는 알현실 내부는, 이미 재건이 빠를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그렇게 중얼거린 황제는 이윽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나이트 프레임을 꺼내는 황태자의 로열 가드를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그런 그에게 남궁연희가 성큼 다가섰다.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가식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기라도 하려는 듯, 측근에게 과한 예를 갖추며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한편 황제는 그것이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필리아 경이로군.”

“염려가 많으셨나이다.”

“염려라…….”

황제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콰아아아앙!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단테에!〕

순간 들려온 외침에 고개를 돌려 아예 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단테와 세이티나의 기체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다 알현실 밖, 조금 전 단테가 들어온 거대한 문으로 향하며 덧붙였으니.

“터는 남겨 놓아라. 터는 말이야.”

그건 언뜻 자조적이면서도 신뢰가 담긴 한마디였다.

기갑천마

제도의 밤 (5)

그 자체로 고풍스러운 자태를 풍기던 알현실의 내부는 순식간에 무너진 천장과 갈라진 기둥, 조각난 대리석의 잔해로 화하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모했다.

쿠구구구구궁!

거대한 나이트 프레임의 그림자가 내부를 가득 채웠고, 자욱한 연기가 스산하게 깔리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들은 무심결 눈을 비비며 눈앞에 펼쳐진 모든 장면이 정녕 현실인지를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쉬이 볼 수도 없는 광경이었고, 쉬이 봐서도 안 되는 광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가?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집무를 보는 알현실이다.

다른 곳도 아닌, 그런 곳에서 전장의 최전선에서 활약해야 할 나이트 프레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작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래, 이것도 나쁘진 않지!〕

물론, 세이티나가 그런 것을 신경 쓸 리는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오랜만에 오른 전용기의 탑승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통신기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밝고도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가자! 네카토르!〕

연기 너머로 알현실의 뚫린 천장에 닿을 듯한 거대한 기체가 굽어진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읊조리듯 속삭인 기체의 이름이 이 전장에 서 있는 모두의 뇌리를 스치니.

네카토르(Necator).

룬어를 제국어로 해석하자면 ‘살해자’.

“무, 무슨?”

“……대체 어떤 새끼가 블랙 가드가 별거 없다고 말한 거야?”

그 섬뜩한 이명에 누군가는 몸을 떨었다.

누군가는 전율하며 멍하니 그것을 응시했고.

누군가는 달빛 아래에서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기체를 응시하며 숨을 삼켰다.

-까드득.

언젠가 전장에서 들었던 마수의 입질 소리가 저럴까?

“아, 아아-.”

상처를 입은 채 구석에서 몸을 떨고 있던 로열 가드는 무심결 그런 생각을 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비단 그 혼자만 보인 반응이 아니었다.

“저, 저게 전용기라고?”

“히끅!”

그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이티나의 전용기인 네카토르의 외견은 절대 정상적인 나이트 프레임의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쿠구구궁!

알현실의 천장에 맞닿을 듯한 거대한 몸체가 마침내 안개를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붉게도 보이는, 그러나 분명 보랏빛이 맴도는 갑주는, 마치 드래곤의 외골격을 흉내라도 낸 듯이 각지면서도 유려한 곡선을 그렸고, 동시에 안광을 터트리며 입질하는 기체의 얼굴과 묘하게 굽은 허리는 그 자체로 ‘살해자’라는 이름에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저 기체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던 누군가는 이윽고 뇌리에 떠오르는 한 가지 단어를 나지막이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악마.”

그래, 그건 차라리 악마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못했으니, 뒤를 이어 단테의 기체인 벤데타가 혼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끼기긱!

묵빛을 띠는 장갑이 단테의 움직임을 따라 유려하게 흔들리고, 마치 기사의 망토를 연상토록 만드는 보랏빛과 회색이 뒤섞인 천이 휘날린다.

철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갑주가 흔들린다.

붉은 안광이 터지며 콕피트 안에서 눈을 뜬 단테는 너머로 보이는 세이티나의 기체, 네카토르를 지그시 응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이진 않으마.〕

언뜻 오만한 한마디.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고, 다만 벤데타는 콰득거리는 묵직한 울림과 함께 알현실의 대지를 디디고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네카토르를 향해 돌진할 뿐이었다.

“크윽!”

“피해!”

이제는 파편밖에 남지 않은 대리석이 튄다.

강렬한 바람이 알현실 내부 군인들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고, 동시에 세이티나는 콕피트 너머로 순식간에 눈앞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벤데타의 주먹을 응시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웃은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입꼬리가 완전한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황금색 안광을 번뜩인 그 순간.

콰아아아앙!

퍼어엉!

벤데타의 주먹이 네카토르의 콕피트를 정확히 겨냥하며 뻗혔고, 그 충격을 받은 네카토르는 그대로 밀려나 알현실은 물론 건물 자체를 박살 내며 밖으로 나뒹굴었다.

기둥이 무너진다.

동시에 사색이 된 로열 가드와 엠퍼러 가드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된 건물을 바라보며 우왕좌왕하다 외쳤다.

“무, 무너진다!”

“건물 밖으로 나와!”

나이트 프레임은, 특히 전용기의 출력은 이미 천장과 한쪽 벽이 무너진 건물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하운드들조차도 빠르게 건물 밖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겠어.’

아마 이번 전투가 끝나면 무엇이 되었든 결론이 나게 되리라.

대략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한 이슈페인은 상처를 어느 정도 수습한 듯 절뚝거리며 황태자에게 걸어오는 엠퍼러 가드의 수장, 류튜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존대나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류튜스는 그것에 어떠한 반발이나 분노를 머금지 않고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전하. 쿨럭! 일단 자리를 피하시지요.”

황태자는 한쪽에 멍하니 앉아 서서히 무너질 기미를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며 핏물이 뒤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류튜스는 그런 황태자의 팔을 끌었고, 둘은 곧 이슈페인의 눈짓을 받은 하운드들의 인도를 받아 묵묵히 건물 밖으로 나섰다.

황제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

거기에 황태자까지 자리를 비웠다.

그 간단명료한 사실은 모두의 뇌리를 스쳤고, 이미 무너질 건물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이어질 행동은 약속이라도 된 듯이 각기의 기체를 소환하는 것이었다.

“오라, 아리에스!”

“크토르!”

제국의 에이스 중 적지 않은 수가 로열 가드와 엠퍼러 가드에 속해 있었는데, 그건 블랙 가드의 하운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이 자리에 당장 꺼낼 수 있는 기체가 수십 기에 달한다는 소리였다.

우우웅!

강대한 마력의 흐름이 건물 곳곳에서 일렁거리고, 곧 머지않아 각자의 아공간에 잠들어 있던 전용기들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움타르!”

“알고 있다!”

사마제천과 움타르는 물론.

“후. 어쩔 수 없군요.”

“…….”

이슈페인과 베데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후.”

“쯧.”

제각기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된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옅은 숨결을 내뱉었다.

그때, 묵묵히 한 발자국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으니.

“……죽이지는 말아요.”

그건 사뭇 씁쓸한 읊조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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