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이슈페인은 안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어지럽게 뒤엉키는 베데눔과 사마제천의 전투를 응시했다.
물론 그 역시 구경만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측면, 그리고 좌측 흉부, 오른쪽 고관절…….’
베데눔의 공격 루트를 읽고 예측하여 그가 향하는 공격에 최대한의 보조를 맞추어 주었다.
일전의 전투로 많은 부분이 상한 그의 육신으로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 방해를 할 바에는, 차라리 이게 베데눔을 돕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일까.
“끄윽!”
꽤 오랜만에 사마제천의 신음이 귓가를 스쳤다.
덕분에 이슈페인 역시 베데눔이 만들어 준 찰나의 틈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일이 꼬이긴 했지만…….’
사실, 그들 역시 이렇게 리스크가 큰 쿠데타를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황태자를 앞세워 황위를 찬탈한다고 해도 결국, 중추가 되는 블랙 가드를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하는 이상 그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향은 절대로 완성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특히, 법국의 일이 엎어진 이후 더욱 일이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그건 다름이 아닌 망르 해안가에서 벌어진 이변 덕분이었다.
‘설마 여왕까지 올 줄은 몰랐으니까.’
본디 그들의 계획은 법국을 음지에서 조종하여 제국을 비롯한 타 국가를 위태롭게 만들고, 후에 대군주를 몰아내는 것에 모든 힘을 할애해 약해진 블랙 가드 중추를 숙청하고 그 자리를 삼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 계획은 그들이 조종하던 제1 추기경이 축출당함으로써 어그러졌으나, 망르 해안가에서 벌어진 이변이 그들에게 더욱 좋은 기회를 안겨 준 것이다.
‘특임대를 비롯한 각국의 손실, 이후 이어질 공세를 대비하여 국경 지대로 보충된 전력들까지.’
제도를 지키는 제1 군단에서조차 차출되어 전선에 배속될 정도였기에 블랙 가드 내부가 혼란스러울 것은 자명한 일.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보아도 도박을 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슈페인은 무심결 입술을 훑으며 자신을 비롯한 동지들이 그리는 큰 그림을 다시금 상기했다.
‘제국을 삼키고, 블랙 가드를 축출한 후 법국과 연합 왕국마저 우리의 손아귀에 넣는다.’
훗날 대군주가 등장하면 그들의 피로 막아 낸다.
그렇게 된다면 가뜩이나 무너지기 직전이던 대륙의 마지막 국가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대군주와 함께 심연 속으로 몰락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 빈자리에 우리의 신세계를 연다.’
무수한 문명의 기술이 어우러진,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자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세우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겐 자격이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건 그와 뜻을 함께하는 다른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모든 일이 생각대로 풀리리라는, 우습고도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당주가 알아채겠지.’
그런 생각은 황태자가 일을 시작한 이래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마제천과 움타르가 나타나 일을 망침으로써 확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뿐.
이슈페인은 점차 옅은 상처를 입어가며 베데눔에게 맞서는 사마제천을 지그시 응시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금방 끝이 날 거다. 황제가 제거되면 당주도 결국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지.”
남궁연희가 그들을 알고 있듯이 이슈페인을 비롯한 다른 이들 역시 그녀를 알았다.
그녀는 쓸데없이 정이 많다.
또한, 모든 행동에는 그녀만의 정의가 서 있다.
‘그게 바로 그녀의 약점이고 말이야.’
꽤나 오래전에 그들의 생각을 는치챘음에도 곧바로 잘라 내지 못해 이렇게 종양을 키운 것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들을 잘라 내지 못한다.
같은 적에게 고향을 잃었고, 긴 시간 동안 같은 목적을 바라보며 함께 싸워 온 동료를 감히 잘라 내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할 수 있지.”
이슈페인은 씁쓸한, 또 자조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리곤 찰나의 순간 눈을 번뜩였다.
“제기랄!”
사마제천의 입에서 드물게 욕지거리가 내뱉어지고, 그는 또 다른 철필을 꺼내기 위해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이슈페인은 보았다.
사마제천이 일순간 공세를 멈추는 찰나의 틈을 말이다.
그리고 그건 베데눔처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닌, 철저하게 육신이 개조된 이슈페인만 볼 수 있는 수많은 경우 수 중 하나였다.
콰득!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럼에도 이슈페인은 묵묵히 육신을 이루는 나노머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 순간 나노머신이 단번에 사마제천의 급소를 향해 쇄도했다.
“……오, 이런.”
당연히 사마제천 역시 그것을 느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폐부를 노리고 뻗히는 나노머신을 확인하곤 쓴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읊조렸으니.
“……두 번 죽는 건 좀 그런데 말입니다.”
이미 피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때.
“쯧.”
오직 정적과 전투로 인한 소음으로 가득 찼던 알현실의 내부에 낮고도 오만한,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그런 생각을 한 이슈페인은 고개를 들었고, 머지않아 소리의 그 주인을 확인한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으니.
“누구 마음대로 죽는다는 건지.”
흑발에 적안을 가진, 오만한 얼굴의 사내.
단테는 그렇게 읊조리곤 곧바로 묵빛 내력을 끌어 올리며 무심하게 대지를 디뎠고.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쿠구구구궁!
그 순간 육신을 뒤흔드는 찰나의 파동과 함께 엄청난 내력을 기류가 알현실 내부를 뒤흔들었다.
기갑천마
제도의 밤 (4)
쿠구구구구궁!
알현실의 바닥을 지탱하는 흰색의 대리석이 갈라지며 일순간 둔탁한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머지않아 그들은 그런 이변을 일으킨 것이 다름이 아닌 문을 열고 들어온 흑발의 사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크윽!”
로열 가드와 엠퍼러 가드는 동요했다.
아니, 차라리 동요 정도로 끝났다면 상태가 나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이게 무슨……!”
“몸이……!”
또 다시 낯선 힘이 그들을 감싼다.
강대하고도 파괴적인 충격이 일순간 알현실을 훑으며 단번에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모조리 집어삼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지나갔다.
그들은 소름마저 끼치는 오만하고도 위협적인 기류에 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조금 전 목숨을 취할 수 있음에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번 것이 단순한 경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때문에 엠퍼러 가드의 수장인 류튜스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많은 감정이 담긴 것이었다.
하나는 무력감이었고.
또 하나는 패배감이었으며.
또 하나는 의문과 공포였다.
류튜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 내심 무시하던 블랙 가드의 원로들을 천천히 훑었다.
누군가는 제국인과 전혀 다른 바가 없는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데에 반해, 누군가는 과거 북부 저편에서나 존재했다는 일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블랙 가드는 결국 쓰다 버려야 할 사냥개에 불과할 뿐이다.
그건 비단 류튜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블랙 가드라는 조직을 조금이라도 아는 군인과 귀족은 물론 일부 정부와 관련된 이들이라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고, 또한 그렇게 되리라 예측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는 깨닫고 만 것이다.
‘사냥개? 개소리를…….’
그게 얼마나 허황하고도 멍청하며 우둔했던 생각인지를 말이다.
류튜스는 자신의 발치에 걸린, 반으로 부서진 검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쿨럭, 하고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큭.”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다.
사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놓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대륙에도 초인들의 역사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대전쟁 이전부터 서서히 잠식한 이른바 현대적인 기물과 무구에 적응했고, 그것은 나아가 ‘효율’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대륙인들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다.
그 기점부터 역사는 변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검 하나에 의지하여 오러를 흩뿌리는 기사는 죽거나 군인이 되며 자취를 감췄다.
평생을 마나에 바쳐 말미엔 전장을 좌지우지하던 마법사들 역시 전쟁 초기에 태반이 죽었다.
남은 마법사들은 새로운 병기를 보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고.
즉, 대륙에서 초인이 설 곳은 없다.
하지만 류튜스는 블랙 가드의 원로가 보인 진면목을 두 눈으로 응시하게 되자 자신이 했던 생각은 그저 한낱 망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때.
침묵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을 마주 바라보던 단테는 이윽고 입을 열어 그들에게 말하니.
“시간이 없다. 그러니…….”
순간 단테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빨리 끝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