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르 해안가.
“흐아아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 병사들은 쉽사리 보기도 힘들다던 네임드와 여왕이 동시에 나타난 지옥이었으나, 전사자 수습과 더불어 항시 주둔하는 방어군이 배치된 이래 꽤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병장인 마우저가 근무 중 하품을 했다고 뭐라고 할 장교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와 함께 군 생활을 하다시피 한 하사 톤스는 익숙하다는 듯이 마우저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하품은 괜찮은데. 술은 반입하지 마라. 저번에도 그거 막아 주다가 진급 나가리 됐잖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거 보급품 횡령해서 그런 거잖습니까?”
“……조용히 해.”
톤스의 말에 마우저는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금 담배갑을 받아 입에 물고는, 망르 해안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회색빛 연기가 일렁거리며 하늘로 사라진다.
그렇게 얼마나 묵묵히 담배를 태웠을까.
문득 마우저가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또 놈들이 여기로 몰려오진 않겠죠?”
“설마.”
톤스는 그럴 일은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경계 초소 한쪽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곤 하품과 함께 말했다.
“하암, 네임드랑 여왕이었다고 하잖나. 원래 그 정도 체급이 되는 애들이 한번 몰려오면 그쪽은 안전해. 동급이 오면 또 모를까. 그런데 그런 애들이 어디 널려 있냐? 그랬으면 진작 대륙은 멸망했어.”
“그렇긴 하죠. 후우.”
회색빛의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 전쟁으로 얻은 경험은 후대에 전송되고, 그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은 마수들은 일정 등급 이상의 개체가 죽으면 한동안 그 자리를 피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보다 등급이 높으면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으나, 톤스의 말대로 여왕보다 등급이 높은 것이라면 대군주밖에 없지 않은가.
“대군주가 안 보인 게 몇 년인데. 흐암.”
대군주는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췄다.
그렇기에 하필 오늘, 대군주가 굳이 망르 해안가로 오리라는 소리는 진지하게 말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망상이었던 것이다.
마우저도 그것을 알았기에, 그저 하품을 참으며 담배를 태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응?”
문득 저 멀리 검은 하늘을 응시하던 마우저는 순간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왜 그래?”
“아니, 조금 전 하늘이 움직인 거 같은…….”
“뭐? 하늘이 움직여?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당연히 톤스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으나, 마우저는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듯 미간을 더욱 좁혀 바다 너머를 응시했다.
그리고 때마침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저 멀리 수평선 위를 비추니…….
“어?”
마우저는 입에 문 담배를 떨어트렸고, 톤스 역시 눈을 의심하며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느리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 무언가를 확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놈은 마치 별처럼 무수하게 몸에 박힌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입질하니.
-까드득, 까드드드득.
그건 과거 중원의 밤하늘에서 울려 퍼지던 것과 같은, 게걸스럽고도 두려운 악몽의 속삭임이었다.
기갑천마
제도의 밤 (1)
제도(帝都)의 밤은 조용하다.
물론 당연하게도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구획에서는 밤이라고 하여 불이 꺼지지는 않았으나, 황성과 더불어 각종 행정 부처가 존재하는 내성의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부우웅…….
그런 도로를 따라 검은색의 차가 달렸다.
잘 닦인 도로를 미끄러지듯 내달리는 차는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황성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다름 아닌 남궁연희와 단테가 타고 있었다.
“…….”
“…….”
둘은 구태여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다만, 서로의 생각을 가늠하며 묵묵히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광경을 눈에 담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침묵도 잠시.
우웅-.
“음?”
남궁연희는 품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시선을 내렸고, 곧 품에서 통신기를 꺼내 들고는 귀에 무언가를 끼웠다.
“무슨 일이지?”
평온한 목소리가 조용히 차 안에 울렸다.
“뭐, 뭐라고?”
그러나 창가로 비치는 그녀의 얼굴을 본 단테는 곧 남궁연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알겠어.”
때마침 통신이 끝이 났고, 곧 단테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시선을 마주하곤 몇 번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를 고민한 그녀는 머잖아 읊조리듯 입을 열었으니.
“대군주.”
그 말을 들은 단테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그녀는 애써 굳은 얼굴을 가다듬으며 그에게 말했다.
“대군주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어디에서?”
단테답지 않은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남궁연희는 이전처럼 웃으며 그 부분을 짚어 주지 않았다.
“망르 해안가.”
다만 그녀는 과거 단테가 기억하던 서늘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주둔 중이던 연합 왕국 제31 연대는 전멸. 현재 법국의 신성 군단과 연합 왕국의 비행함 전대가 출격했으나 교전 1시간 만에 전력의 3분의 1이 궤멸당했어요.”
나열된 정보는 그 자체로 절망적이었으나 정작 이야기를 하는 남궁연희와 단테의 얼굴엔 절망 따위는 맴돌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단지 대군주…… 아니, 거귀(巨鬼)를 다시금 마주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이었다.
“…….”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것은 비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단테와 남궁연희뿐만이 아니라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녀의 하운드 역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망르라고 했지.”
단테는 그렇게 말하며 차의 문을 여는 손잡이를 쥐었으나, 그 순간 남궁연희가 말했다.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황성에 먼저 들러야 할 이유가 있어요.”
“이유?”
펄럭!
차는 더욱 속도를 올렸고, 그에 따라 대로에 길게 늘어진 깃발이 조금씩들 흔들리며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그 순간.
단테가 그 이유라는 걸 재차 물으려던 그때였다.
황실에 거의 근접한 순간 하운드는 창 너머 보이는 불빛에 미간을 좁혔고, 곧 일련의 군인들과 나이트 프레임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지!”
끼이익! 하는 제동음과 함께 차체가 멈춰 선다.
그리고 그들이 차로 다가오자 운전대를 쥐고 있던 하운드는 고개를 돌려 남궁연희와 단테를 향해 물었다.
“처리할까요?”
얼핏 보이는 수만 해도 총을 든 군인이 수십에 나이트 프레임까지 기동이기에 한없는 만용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남궁연희와 단테는 웃지 않았다.
어찌 웃을 수 있겠는가.
당장 마음을 먹으면 그 자신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거늘.
다만 그를 막아 선 것은 남궁연희의 가볍디가벼운 손짓이었다.
“됐어요. 내릴까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단테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곧 단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창문 내……. 어?”
때마침 하운드를 향해 창문을 내리라고 말하려던 군인들은 뒷좌석에서 그들이 내리자 시선을 옮겼고, 곧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충성. 제1 군단 예하 24대대장 쉴츠 중령입니다. 현재 황궁에서 소요가 일어나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스스로 중령임을 밝힌 쉴츠가 조금 전 차를 멈춰 세울 때와 달리 깍듯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아마도 단테가 입은 군복을 확인한 듯했다.
다만 단테의 견장에 붙어 있는 대령 계급을 본 쉴츠는 그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으나, 곧 남궁 연희에게 시선을 옮긴 그는 눈을 살짝 게슴츠레하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입은 것은 분명 제국의 표준 군복임에도 어떠한 견장이나 훈장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를 비롯한 24대대의 일원들은 손에 쥔 총구의 방아쇠에 슬그머니 손가락을 걸고는 그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당연하게도 나이트 프레임 역시 끼기긱- 따위의 기계음과 함께 단번에 그들을 제압할 준비를 마친 후였다.
“죄송합니다만, 대령님과 동행분의 소속과 성명을 밝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건 쉴츠 중령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제1 군단은 넓게는 제도를, 좁게는 황실을 수호하는 제국의 방패다.
때문에 그들은 황실에 관련한 일에 대해선 자율권이 높았고 덕분에 대령에게 이러한 요구를 건넬 수 있는 것이다.
즉, 초병(哨兵)의 정당한 권한인 것이다.
쉴츠 중령은 어느새 허리춤에 멘 권총의 그립을 쥐고 그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때문에, 단테가 막 입을 열어 소속을 밝히려던 그때였다.
“라리이 중장을 데려와 줄래요?”
“예?”
단테보다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남궁연희는 태연하게 그렇게 물었고, 당연히 쉴츠 중령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리이 중장이 누군가?
다름이 아닌, 제1 군단의 군단장이자 최연소로 중장을 단 군부의 살아 있는 전설이 아닌가.
‘물론 지금은 단테 대령에게 머잖아 최연소를 빼앗길 거라는 말이 돌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라리이 역시 충분히 존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군인이었고, 쉴츠 중령 역시 한 번도 보지 못한 단테 대령보단 그를 훨씬 높게 평가했다.
때문에 남궁연희의 말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꽤나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이전보다 훨씬 딱딱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중장님은 만나고 싶다고 바로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소속과 이름, 황궁에 들어가려는 목적을 밝히시죠. 불응하시면 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쉴츠 중령의 입에서 체포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철컥!
끼기긱!
동시에 그의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은 물론 나이트 프레임 역시 그들을 향해 총구를 세우니 그 모습은 일반인이기 보기엔 매우 위압적이었다.
물론, 일반인이 보기엔 말이다.
“라리이가 누구지?”
“아, 제1 군단의 군단장이에요. 이미 연락이 닿았을 텐데…… 조금 늦네요?”
단테는 마치 자신을 향해 뻗어진 총구와 나이트 프레임의 서늘한 안광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고, 남궁연희 역시 그의 말에 너무나도 태연하게 화답한다.
때문에 쉴츠 중령은 물론 나머지 군인들마저 둘의 행동에 혹여 지원군이 있는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들이 달려온 거리 쪽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연기라기엔 너무 자연스러운데?’
‘혹시…… 그렇지만 보이는 건 없는데.’
그렇지 않으면 저들의 만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쉴츠는 미간을 좁히며 결국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어 외쳤다.
“지금 당장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투항……!”
“쉴츠 중령.”
“어?”
……아니, 외치려고 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아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라리이 중장님?”
그건 다름이 아닌 라리이의 것이었으니까.
쉴츠 중령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곧 정신을 차리곤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황궁으로 접근하려는 신원 미상자를 발견했는데 저 여자가 중장님의 이름을…….”
“당연하지.”
“예?”
“아직도 모르겠나?”
“그, 그게 무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라리이의 말에 쉴츠 중령은 무어라 말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어벙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라리이는 남궁연희에게 남들 몰래 경의와 묘한 반가움이 담긴 눈인사를 살짝 건네고는 그의 물음에 답했으니.
“단테 대령과 그 부관이다. 황궁에서 일어난 소요에 폐하의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그를 반겨 주진 못할망정 길이나 막고 있었군.”
그건 사뭇 한심하다는 말이 덧붙여진 타박이었기에 쉴츠는 물론 그를 따르던 군인들은 사색이 됨과 동시에 약간은 억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말을 좀 해 주지……!’
그들이라고 단테 대령임을 알고 멈춰 세웠겠는가.
알았으면 진즉에 데리고 라리이의 앞까지 안내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쉴츠 중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직이는 걸 느끼며 외쳤다.
“충성! 제국에 영광을! 실례했습니다!”
“추, 충성! 제국에 영광을!”
곧바로 군례를 올리며 각이 잡힌 발걸음으로 자리를 비켜섰고, 그건 그를 따르던 군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급자가 앞에 있음에도 대령에게 경례를 올리는 것은 그리 옳은 선택이 아니었으나 그만큼 쉴츠 중령과 군인들이 당황한 것이었다.
이후 그것을 깨달은 쉴츠의 얼굴이 더 사색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들어가시죠, 대령.”
한편, 라리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이미 후방 경계 부대에는 말해 놨습니다. 이제 앞길을 막는 놈들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리이의 시선은 단테를 지나 남궁연희에게 닿아 있었으나, 그건 연모나 다른 감정이 아닌 아주 익숙하면서도 묘한 감정이었다.
‘충성심인가.’
단테는 라리이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이채를 띄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남궁연희가 뒤따랐다.
차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다.
때문에 그들은 걸음으로서 황궁에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충성! 제국에 영광을!”
〔충성!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테 대령님.〕
라리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머지않아 드러났으니, 이후 그들을 마주치는 군인들은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경례를 올리며 길을 비켜준 것이다.
때문에 단테와 남궁연희는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황궁의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긴 참, 삭막한데 아름답다니까요.”
남궁연희가 내뱉은 감상처럼 황궁의 전경은 언뜻 삭막해 보이면서도 꽤 잘 꾸며진 모습이었다.
물론 단테는 그녀가 말하는 풍경 따위에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뭐지?”
“라리이에 대해선 안 묻나요?”
단테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보다 앞서 걸어가는 남궁연희의 뒷모습을 좇으며 대답을 기다릴 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으니.
“라리이의 정체부터 맞추면 알려 줄게요.”
“쯧.”
어째 시간이 지나니 더 성가신 여자가 되었다.
단테는 그런 생각을 구태여 감추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남궁연희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정답은 남궁세가의 가신이에요. 됐죠?”
“……남궁세가의 가신?”
그리고 그 순간, 단테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지그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갑천마
제도의 밤 (2)
남궁세가의 가신이라…….
제1 군단장이 말이다.
“그런가.”
단테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은 아니었다.
다만 묘한 감흥이 일었을 뿐이다.
그것은 괴리감이었고, 또 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그가 알고 있던,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남궁연희라는 여자는 억지로 무림 맹주라는 맞지도 않는 옷과 감투를 쓴 채로 위태롭게 버티던 치기 어린 명문가의 여식일 뿐이었다.
‘……하나.’
눈앞의 여인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궁연희라는 정체성은 그대로였으나 이제 그녀에게 풋내기답다거나 치기 어린 명문가의 여식과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만큼 그녀도 바뀐 것이다.
‘낯설 정도로 말이지.’
단테의 적색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맺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남색의 눈동자에 단테의 얼굴을 담은 그녀는 말할 것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지만, 정작 단테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벅.
검은 군화가 흰 대리석을 디뎠다.
그는 묵묵히 앞으로 걸었고, 남궁연희 또한 그 뒤를 따랐으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녀가 단테의 묘한 기류를 읽지 못할 리가 없었기에 그녀는 어느샌가 앞서 걷고 있는 그의 뒤를 쫓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단 놀라지 않네요?”
“글쎄.”
그녀는 단테가 놀랄 것이라 생각한 이유가 없지는 않았으니, 그건 다름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사람이 등장한 것에 대해 놀라지는 않았느냐는 물음이었다.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나 충분히 놀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말을 들은 단테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어 말했다.
“됐고, 이유나 말해라.”
그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어쭙잖게 다른 일이나 사건으로 더 시야를 어지럽히지 말고, 대군주가 나타났음에도 황성에 먼저 들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뜻이리라.
그런 그의 의도는 투명하리만큼 적나라했다.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할 남궁연희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일단 첫 번째.”
남궁연희 또한 더 말을 돌릴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본론은 빠르게 진입한다.
“블랙 가드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이견은 없겠죠?”
대군주가 다시금 등장했다는 작금의 현실에 가려져 조금은 잊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놈에게 대항할 가장 큰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블랙 가드는 현재 2개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
단테는 조용히 거대한 황궁의 대리석 도로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되물으니.
“굳이 놈들이 필요한가?”
“응? 뭐라고요?”
“차라리 모두 죽여 버리는 게 편할 텐데.”
단테는 별다른 악감정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딱히 연기는 아니었다.
즉, 그가 남궁연희에게 건넨 의문은 냉혹한 동시에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이른바 ‘효율’을 따지는 의문이었다.
“단순히 드러난 전력만 계산해도 너희에게 피해가 조금 있을지언정 놈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아. 내가 틀렸나?”
조금만 눈치가 있어도 알 수 있는 문제다.
블랙 가드는 분열되었음에도 남궁연희는 조급해하지 않았고, 그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편에 선 모두가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 놈들은 어떤가.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하는 행동은 조급했고 또한 여유가 없었다.
즉, 놈들도 아는 것이다.
여차하면 쓸려 갈 정도로 힘의 격차는 극명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윽…….
단테의 시선이 남궁연희의 얼굴에 닿는다.
동시에 그의 시선을 본 남궁연희는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곤 화답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구태여 단테의 물음에 반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언의 동의였으나 단지, 그녀는 화답하는 것이었다.
“깡그리 죽여 버리면 편하겠죠. 비록 한동안의 혼란이 있고 블랙 가드는 많은 수의 일원들을 잃겠으나 그만큼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 거예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임을 그녀는 알았다.
때문에 그녀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흰 대리석을 디딘다.
검은 바탕에 황금색으로 문장이 각인된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중앙에 거대한 분수가 물을 뿜으니 그들은 어느새 거대한 알현실의 앞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움타르와 세이티나의 거칠고도 거친 괴성이 귓가를 스친다.
-크아아아악!
-우어어어어어어!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하다.
암수가 뒤엉켜 서로의 목숨을 취하려 드는 듯한 울림이 문 하나를 두고 둘의 귀를 스쳤음에도 정작 둘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단테에게는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각 원로들의 기운일 뿐이었으나, 남궁연희는 달랐다.
그녀에겐 한없이 익숙한 것들이다.
제각기 다른 파편은 그녀의 뇌리를 훑고 지나가는 동시에 많은 생각을 안겨 주는 것이다.
익숙한 향취다.
익숙한 피 내음이고, 익숙한 이들이다.
그녀는 그 모든 향취를 어루만질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무심히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어째서?”
“알고 있으니까요. 또……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무엇을?”
단테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고, 머지않아 다시금 시선을 돌려 거대한 알현실의 문을 응시했다.
알현실의 문에는 꽤 많은 것이 각인되어 있었다.
갑주를 입고 검을 쥔 기사들.
스태프를 쥐고 로브를 쓴 마법사들.
제국의 건국제(建國帝)라는 작자의 초상.
과거 인류를 위협했다는 마족과 악마는 물론이고, 작금에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드래곤 등까지.
많은 역사가 알현실의 문에 각인되어 있듯이 그녀의 뇌리에도 지난 50년의 세월은 생생하진 못해도 분명히 남아 있었고, 그것은 그녀의 행동에 대한 기반이자 동시에 족쇄였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공허한 눈빛을 기억해요. 그건 나와 다르지 않았죠.”
제각기 개인차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단 원로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군주에게 고향을 잃고 이 세계로 떨어진 이들에게 공통점은 있었다.
“우린 망자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
지독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우스운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고향을 잊을 정도로 무감한 이는 이 세계에서 눈을 뜨지 못했고, 과거에 매몰될 정도로 우둔한 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저 위태롭게도 서 있을 수 있는 이들만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순간 그녀의 남색 눈동자에 무언가가 맺힌다.
그건 눈물도, 어떠한 형체를 가지지도 않은 감정의 편린이었을진대, 어째서인지 단테의 눈을 스쳤고, 곧 그녀는 말했다.
“저는 그들을 죽일 수 없어요. 다만, 이대로 방종을 눈감아 주는 것도 옳지는 않겠죠.”
이윽고 그녀의 손끝이 알현실의 문에 닿는다.
금으로 각인된 그것은 신성한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임과 동시에 황궁이라는 공간과 그 둘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벽이었을 뿐이니.
“두 번째 이유를 말하기 전에 묻겠어요.”
그녀는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동시에 둘을 감싸는 공기는 가라앉으며 그녀는 단테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어떡할 건가요? 저들을 모두 죽일 건가요, 아니면 선택의 기회라도 억지로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주도권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그녀는 자신이 수십 년을 바쳐 일군 것의 분기점을 그에게 건넸고, 그것을 받아 든 단테는 무심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말의 고민조차 없다.
그리고 머잖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답은 다름이 아니라…….
“그걸 왜 나에게 묻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의문이었다.
“나는 모른다. 네가 저놈들에게 어떤 것을 보았고, 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으며, 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까지 말이다.”
어쩌면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모든 것이 대책이었다 말했던 건 너였다. 벌써 잊고 있었나? 아니면 그저 과거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안온함에 젖어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인가?”
단테는 미간을 좁혔고, 그녀가 강제로 자신의 손에 떠맡긴 듯한 일의 주도권을 말로써 건네며 조금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에게 덧붙였다.
“네가 결정한 것을 말하고 도움을 구해라. 그리고 대군주를 죽인 후에는…….”
놈의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단테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곧 살짝 번뜩이는 붉은 안광을 본 남궁연희는 이어진 단테의 자조적인 읊조림을 듣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땐…… 딱히 생각을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그 또한 많이도 망가져 있다는 걸 말이다.
그 모습에 남궁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알현실이에요. 내부에 있는 건 아마 제3 원로를 제외한 모두…….”
그녀는 마치 종이에 깊이 새긴 잉크를 손으로 더듬어 읊조리는 사람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1 원로 사마제천.
제2 원로 움타르 도 라으.
제4 원로 이슈페인.
제5 원로 베데눔.
제6 원로 세이티나.
거기까지 확인한 그녀는 이윽고 쓴웃음인지, 아니면 그저 작은 스침인지 모를 미소를 띠고는 말했다.
“제3 원로를 제외하면 전부네요. 이건 또 오랜만인데.”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에 불과했기에 그녀는 알현실의 거대한 문에 각인된 조각들을 쓸던 손을 어느새 멈추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오기 전,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 기억하나요?”
“뭐?”
“원로급으로 대우하겠다고. 물론, 당신을 부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말이에요.”
대체 어떻게 꼬였기에 호의를 그렇게 받아들이나요, 따위의 투정을 덧붙이고 싶긴 했으나 시기가 시기이기에 그녀는 말을 아꼈다.
“이건 그 일환이자, 당신이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의 일부에요.”
타악, 하는 소리와 함께 고운 손이 맞닿으며 소리를 울린다.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와 단테의 주변의 공기가 일렁거리며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니, 그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당주님과 교주님을 뵙나이다.”
당주님과 교주님.
참으로 의미심장한 칭호들의 나열이지 않은가.
남궁연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단테를 응시하며 피식 웃었고, 곧 그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단테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일말의 동요조차 없는 저 얼굴을 보면 그 누가 몰랐다고 생각하겠는가?
“…….”
단테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빠르게 그들의 면면을 훑으며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하다가 곧 입을 열었으니.
“어쩐지 익숙함과 괴리감이 뒤섞여 머리를 울리더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지도 못한 것인지, 그저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 백월신교의 교도 수십 명을 응시하며 물었다.
“너희의 충심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그 순간.
돌아오는 답은 짧았으니.
“천마이시여, 기다렸나이다.”
그것은 일말의 의심도 없을 만큼 간결하고도 맹목적인 충성이었다.
기갑천마
제도의 밤 (3)
콰드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릿빛으로 꿈틀거리는 피부를 꿰뚫으며 세이티나의 마기는 마치 창과 같은 모습이 되어 빠르게 쇄도했다.
마기가 살갗을 관통한 직후, 붉은색과 보랏빛의 형태가 허공에 흩뿌려진 핏물과 함께 허상처럼 사라졌다.
“끄으으윽!”
고통에 익숙한 움타르의 입에서 신음이 터질 정도로 강렬한 고통이 척추를 따라 육신을 뒤흔들었다.
등 뒤에 수호신과 같은 모습으로 일렁거리던 거인의 형체가 괴성을 터트리며 세이티나의 몸 크기와 맞먹는 육중한 주먹을 그녀를 향해 뻗었다.
-우어어어어어어!
거인의 입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허상이되 허상이 아닌 주먹이 단번에 세이티나의 몸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이 뻗혔다.
그러나 그때.
“느려! 느리다고! 꺄하하핫!”
광기를 넘어서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황금색의 번뜩이는 눈동자를 깜박거린 그녀는 내뱉은 일갈이 허언이 아니라는 듯이 너무나도 손쉽게 거인의 주먹을 피했다.
동시에 그녀의 곁에서 뻗어낸 마력은 제각기 다른 창검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움타르의 육신을 향해 쇄도했다.
파아아아아앙!
쉬이이이익!
공간을 찢어 내고는 섬광을 그렸다.
하나하나 엄청난 살의를 머금었다.
지독하리만큼 일렁거리는 마기는 닿는 순간 인간의 살갗을 게걸스럽게 물어뜯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이번만큼은 쉬이 물러서지 않는 전사인 움타르조차 입술을 잘근 깨물며 양팔을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트!”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언어에 거인 역시 팔을 교차했고, 동시에 대리석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빠르게 솟구친 구릿빛 안개가 그들을 감쌌다.
그것은 곧 굳건한 요새가 되었고,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던 태산이나 다름이 없이 움타르의 육신을 보호하는 장벽이 되었다.
일개 필멸(必滅)의 육신으로 만들어 낸 신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전율 속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쳇!”
물론 세이티나의 입장에선 한없이 성가실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뿐.
세이티나는 유달리 돋아난 송곳니를 붉은 혀로 한번 훑고는 펄럭거리는 군복을 소매를 쥐었고, 곧 찢어발기며 외쳤으니.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일렁거린 거대하고도 날카로운 손톱은 칼날처럼 눈앞의 요새를 향해 쇄도했다.
……한편 그 시각.
알현실 내부를 무너트릴 기세로 맞붙는 것은 비단 세이티나와 움타르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이쪽은 장엄함이나 웅장함 따위를 느낄 수 있는 전장이 아닌, 철저하게 상대를 배제하기 위한 살육전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큭!”
언제나 미소에 가까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사마제천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벌써 반쯤 동난 두루마리 종이를 펼치며 내력을 끌어 올렸다.
……아니, 말을 정정하는 것이 옳을까.
정확히는 웃음 따위로 대표되는 가식을 부릴 상황 자체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사마제천은 언제 금이 갔는지도 모를 동그란 안경을, 아주 찰나의 순간 만들어진 빈틈에 스윽 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말이다.
이쯤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우세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고전을 할 정도로 놈들 역시 이번 쿠데타에 꽤 공을 들였다는 걸 말이다.
콰드드드득!
사마제천은 그림자처럼 쇄도하는 검은 칼날을 피하곤 조금 전까지 베데눔이 있던 자리로 푸른빛이 도는 철필을 던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슈페인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거늘, 베데눔은 진심으로 의외인데…….’
제5 원로 베데눔.
그는 본디 철저한 중립을 지키며 단지 블랙 가드의 원래 목적에 충실할 뿐이라고 선을 그었던 자였다.
마찬가지로 제3 원로 역시 중립이었기에 그들은 이슈페인을 필두로 한 이들을 보다 손쉽게 제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데눔이 어째서인지 그들에게 돌아섬으로써 사마제천 역시 허를 찔린 것이다.
“…….”
사마제천은 침묵과 그림자 속에 숨어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 그를 찾기 위해 기감을 흩뿌리는 동시에 알현실 내부를 응시했다.
무너진 샹들리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짧은 순간 누가 치운 것은 아니다.
다만, 움타르와 세이티나가 이어가던 인외의 전투에 산산이 부서지다 못해 녹아내린 것이리라.
‘하필, 달빛이 밝아.’
샹들리에와 함께 추락한 천장.
그 너머에서 비추어지는 달빛이 유달리 밝았다.
덕분인지, 알현실의 내부는 제일 큰 샹들리에가 없어졌음에도 명암의 구분이 명확했다.
물론 시야가 더 잘 확보되는 것은 이점이다.
다만 문제는 그림자 역시 더욱 잘 드리워진다는 것.
그 그림자에 가장 친숙한 이가 제5 원로인 베데눔이라는 점일까.
“커헉!”
그때였다.
사마제천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며 싸우던 하운드의 입에서 묽은 핏물이 터져 허공에 흩뿌려지고, 머지않아 그의 가슴이 붉게 물듦과 동시에 반으로 갈라졌다.
누가 그런지는 의심할 여지도 없다.
검은 칼날을 보았으니까 말이다.
“이거,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때문에 사마제천은 한 발자국 뒤에서 자신을 응시하며 나노 머신을 꿈틀거리고 있는 이슈페인을 바라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상대했다간 죽겠습니다. 하핫.”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그 순간, 서서히 드리운 구름이 선명하고도 부드럽게 지상을 비추던 달빛을 가려 일순간 세상이 어둡게 물들었을 때.
파아앗!
“큭!”
본격적인 베데눔의 공격이 그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