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벤스라트 제국의 황실은 적막하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제국은 가장 넓은 영토와 인구를 가진 만큼 무수한 시험을 견뎌야 했고, 그 모든 책임은 황실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공국이었고, 한때는 왕국이었으며, 이제는 제국이 된 레벤스라트라는 이름이 태어난 이래 이토록 많은 피가 흐른 시기가 있었을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현 황제인 시스 폰 레벤스라트가 매일 잠이 들 때마다 악몽을 꾸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허억-!”
깊게 숨을 몰아쉰다.
온통 핏물로 점철되었던 공간은 눈을 뜸으로써 순식간에 밝게 번뜩였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던 그는 머지않아 악몽임을 깨닫고 쓰게 웃음을 지었다.
“지긋지긋하구나.”
자조적으로 읊조린 한숨 사이로 노곤함이 짙고도 깊게 스친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 그는 서서히 날이 저물어 감을 확인했고, 곧 저녁 회의가 있을 시간임을 상기하곤 지친 몸을 일으켰다.
스윽.
잿빛을 띠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서서히 늙어 가는 몸은 중년을 넘어서 노년으로 가고 있으나, 황제라는 자리는 그에게 치친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거울을 보며 표정과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폐하.”
그러자 밖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시종들과 엠퍼러 가드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엠퍼러 가드(Emperor Guard).
황족의 전반적인 경호와 수행을 맡는 로열 가드와 달리, 오직 황제만을 위한 근위대인 그들의 제복의 색깔은 백색이었다.
“알현실으로 가겠다.”
“예, 폐하.”
최근 급작스러운 사건들이 겹치고 겹쳐 회의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망르 공방전은 물론이고 최근 법국에서도 이변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저벅.
적막함이 감도는 복도를 거닌다.
때때로 황실의 시종들이 그를 마주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임으로써 경의를 표했으나, 그와 별개로 복도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붉은 카펫을 디디며 황제는 묘한 감흥을 느꼈다.
‘30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온갖 귀족들이 내가 거니는 길에서 기다리며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했었지.’
그러나 작금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기나긴 전쟁은 평민들의 피뿐만이 아니라 귀족들의 피 역시 요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능한 이들은 태반이 작게는 목숨을 잃었고, 크게는 가문이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곧 복도의 끝자락에 다다른 그의 시선 끝에 알현실로 향하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황제가 그 앞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묵묵히 문을 열었다.
다만 그들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음을 황제는 알지 못했다.
“오셨습니까, 폐하.”
이윽고 그를 기다리는 건 수많은 신하가 고개를 조아리는 광경이 아니라 붉은 제복을 입은 로열 가드들이 황궁에 있는 황자와 황녀들을 묶어 둔 채, 한 사내가 황제만이 다다를 수 있는 권좌에 앉아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으음.”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황제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으니.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황태자이자 그가 낳은 첫 번째 자식인 시르투스 폰 레벤스라트였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 황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본능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가늠했고, 황제는 곧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려 엠퍼러 가드의 수장인 류트스 백작을 응시했다.
“그런가.”
황제와 류튜스 백작의 시선이 오간다.
그리고 그 순간,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를 호위하던 엠퍼러 가드의 단원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황제를 겨눴다.
“이, 이 무슨 짓입니까!”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시종장이 외쳤으나, 황제는 도리어 씁쓸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할 뿐이었다.
“그대가 택한 것인가?”
“……예, 폐하.”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이미 알고 계시리라 사료되나이다.”
“……그대도 황태자와 같은 생각이었군. 우둔하게도.”
시종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 숨을 죽이며 몸을 떨었다.
백작와 황제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황태자, 시르투스 폰 레벤스라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우둔하다니!”
그의 눈에는 자신이 행하는 것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듯한 강한 신념이 떠오르고, 그는 황제를 향해 성토했다.
“폐하야말로 우둔하지요! 말로는 블랙 가드를 두둔하여도 실상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까!”
다른 황자와 황녀는 이해하지 못할지 몰라도, 황태자의 자리에 앉아 많은 것을 보고 들은 그는 진실의 이면을 미약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작금의 제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황태자의 잿빛 눈에 광기가 맴돈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도 큰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 황제를 응시하며 말했다.
“놈들은 사냥개일 뿐입니다, 폐하. 주인을 물려고 하면 때때로 때리고 죽여서라도 길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허.”
이어지는 황태자의 말에 황제는 실소했다.
동시에 그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류튜스 백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그렇사옵니다.”
더는 물을 것도 없다.
단장인 그가 돌아섰고, 이토록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는 것은, 그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엠퍼러 가드들은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을 뜻할 테니까 말이다.
“……허허.”
때문에, 황제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체념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류튜스 백작은 비록 그에게 검을 겨눴다고 한들, 남아 있는 충성심으로써 답했다.
“황태자께 폐하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니, 황위를 계승한 후 황후 전하와 애첩들과 함께 별장에서 안온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안온한 노후라…….”
그토록 우스운 말이 있을까.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고, 곧 그의 시선이 묶여 있는 황자들과 황녀들에게 닿는 순간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작.”
대가.
그 말에 류튜스 백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었고, 곧 황제는 이제까지와 달리 큰 폭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외쳤으니.
“시르투스!”
잘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권력 앞에서 혈육이란 사슬은 너무나도 손쉽게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묶인 채로 벌벌 떨고 있는 황자와 황녀들 앞에 선 류튜스 백작은 뽑았던 장검 대신 예식용 권총을 꺼냈다.
곧 그는 가장 가까이 선 제2 황자의 미간에 총구를 가져다 대며 씁쓸함이 짙게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서하지 마소서. 다만 제국을 위한 일임을 알아주시길.”
철컥.
권총의 총탄이 장전된다.
동시에 황태자는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황제를 마주 보며 답했다.
“제 자리를 노릴 수도 있잖습니까, 폐하.”
그 순간 황제는 보았다.
이미 자신이 황태자로 세웠던 시르투스의 눈동자가 반쯤 맛이 갔다는 사실과 함께, 막 방아쇠를 당기려던 류튜스 백작의 등 뒤로 무언가 일렁거림을 말이다.
“한 가지를 묻겠다.”
이를 본 황제는 입을 열어 읊조렸으니.
“이번 일이 그대들이 말했던 내분과 관련이 있는가?”
“뭐?”
그것은 황태자나 류튜스를 겨냥한 것이 아닌, 제삼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었기에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송구하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류튜스 백작의 등 뒤에서 나타난 사마제천은,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뒤통수에 총구를 가져다 대니.
“그렇습니다.”
알현실에 또 다른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기갑천마
동상이몽 (2)
“무, 무슨?”
“어디서 나타난 거야?”
마치 허상처럼 등장한 사마제천의 모습은 그 자체로 기묘했기에 아무리 엠퍼러 가드라 한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혹감도 잠시.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을 느끼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류튜스 백작은 2황자의 미간에 겨눴던 총구를 조심스럽게 내리곤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제기랄.”
보편적인 상식 안에서 생각한다면 엄연히 황제를 보위하는 엠퍼러 가드의 수장을 타 조직의 원로가 즉결 처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류튜스는 알았다.
블랙 가드라는 조직에 몸담은 이들은 그런 상식의 범주 안에 두면 안 된다는 걸 말이다.
‘더욱이 이런 상황이라면 놈들도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모를 리가 없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반역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고 놈의 손 속에는 더욱 자비가 없겠지.
그러나 류튜스 역시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황가의 핏줄들에게 그나마 안온한 마지막을 선사해 주기 위해 꺼냈던 권총을 천천히 내렸다.
그 덕일까.
“하, 하아아…….”
미간에 닿은 총구의 감촉에 사색이 되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던 제2 황자는 서서히 멀어지는 죽음의 공포에 안도하며 짙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런 안도의 순간도 잠시.
류튜스는 반쯤 손에 걸쳐 있던 총을 놓는 즉시, 허리에 넣어 두었던 검을 뽑았다.
그 순간 사마제천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마석을 기반으로 한 총성이 울렸다.
단번에 류튜스의 뒤통수를 꿰뚫었으리라 생각되는 총성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를 쏜 사마제천은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일말의 아쉬움조차 없이 손에 쥔 총을 놓고는 몸을 뒤로 빼냈다.
그리고 그가 몸을 뺀 그 순간.
“흐읍!”
류튜스의 롱 소드가 휘둘린 궤적을 따라 마나의 잔영이 그어졌다.
사마제천은 이제까지와 달리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콰드드득!
마나의 궤적은 사마제천이 출수한 기력과 맞붙어 상쇄되었다.
류튜스는 찰나의 순간 만들어 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일갈했다.
“뭣들 하는 거냐!”
그의 일갈은 황제를 포위하고 있는 엠퍼러 가드를 향했다.
뒤늦게 그의 의도를 이해한 엠퍼러 가드들은 황제를 확보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래, 움직이려 했다.
“무, 무슨?”
갑작스럽게 그들의 발을 붙잡는 흙더미와 함께 몰아치는 짙은 먼지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이변이다.
이로 인해 엠퍼러 가드들은 제각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찰나의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실책으로 되돌아왔으니.
“읍!”
분명히 대리석과 카펫으로 치장되어 있던 알현실의 바닥에서 갈색 모래와 흙이 치솟는다.
동시에 모인 그 입자들은 그 자체로 거구의 한 남자의 모습을 빚어냈다.
황제와 엠퍼러 가드들 사이에 정확히 모습을 드러낸 그는 특유의 구릿빛 근육을 꿈틀거리며 외쳤다.
“하루타!”
그것은 대륙 공용어는 물론이고 어떤 국가의 언어도 아닌…… 전혀 낯선, 날것의 투박한 언어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그가 내뱉는 언어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모래가 일렁이는 순간 일대를 점거한 마력이었다.
“이, 이건?”
류튜스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엠퍼러 가드는 현재 군문에선 효율의 문제로 보기 힘든 체술과 검술을 중점으로 익힌다.
당연히 그들의 마나 하트는 과거 초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나에 민감했기에, 그들은 저 남자가 허공에 흩뿌린 마나 역시 날 것과 같은, 지극히 원초적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일 뿐.
이미 그들이 무언가를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커헉!”
“끄아악!”
발목을 잡은 모래가 뒤틀리며 그들의 몸을 대리석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몇몇 엠퍼러 가드는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듯이 몸을 뒤로 빼내려 했으나 남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우!”
“이, 이 무슨……!”
“끄으윽!”
오히려 반항하려던 자들은 남자가 터트린 압도적인 마력에 굴복하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피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채 1분이 걸리지 않아 황제를 포위하고 있던 엠퍼러 가드 수십이 정리가 되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지켜본 류튜스 백작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식은땀을 흘렸다.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황제의 곁에 있던 엠퍼러 가드 전원은, 과거 초인들이 대륙을 유랑하던 시기에 흔히 ‘소드 엑스퍼트’라고 불리던 경지에 닿은 무인들이었다.
물론 하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저렇게 손쉽게 무력화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터.
그는 눈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사마제천을 경계하면서도 살짝 눈을 돌려 황태자를 응시했다.
“……큭.”
황태자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으나, 그럼에도 아직 패배를 확신하는 무력감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황제가 블랙 가드라는 패를 감추고 있었듯이, 황태자인 시르투스 폰 레벤스라트 역시 아직 보여 주지 않은 패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발악해도 소용없습니다!”
그의 일갈을 들은 순간 알현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황태자의 로열 가드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