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이 그렇게 말했다고?”
단테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자신의 목 아래에서 말하는 그녀를 응시했으나 남궁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믿기 힘들었죠. 하지만 이유를 들어 보니 납득은 되더라고요.”
사마제천이 우두머리를 양보한 이유는 합리적인 동시에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신은 설계자의 입장일 뿐, 무력은 저에 비해선 뒤처지는 데다가 훗날 당신이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때 자신이 우두머리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이상할 거 같다고 하던데요?”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이진 않았지만, 사마제천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그는 물었다.
“그래서?”
“뭐, 보다시피…….”
결국 그녀는 당주가 되는 것을 수락했고, 그날 이후 전장을 종횡하던 푸른 늑대는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고 그들이 안온한 삶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더 치열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많은 이들을 굴복시켰고, 과거엔 존재조차 믿지 못했던 문명들의 지식을 최대한 모으고 개량해서 대륙의 체질을 개선했죠.”
나이트 프레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대륙 곳곳에 부설된 철도는 물론이고, 궤도차와 자동차, 통신기와 마석을 베이스로 하는 각종 무기와 기기들 모두가 블랙 가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인정하지. 큰일을 했어.”
때문에 단테도 이번만큼은 그녀와 사마제천이 걸어온 길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 한다면 대륙을 존속시킨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블랙 가드라는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흐응.”
그때였다.
단테가 자신을 칭찬하는 모습이 꽤 새로웠는지 남궁연희는 살짝 홍조가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붉은 입을 열었다.
“대책이 있냐고 물었죠? 내가 이 세계에서 숨 쉬고 살아온 모든 삶이 대책이었고, 비전이었어요.”
그 안에 당신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흑색의 보석을 손가락을 살짝 쓸며 덧붙이니.
“0세대 나이트 프레임. 그건 원로들에게만 허락된 기체랍니다. 벤데타는 본디 제1 원로를 위해 만들어진 기체였어요.”
“그 말은……?”
제1 원로를 위해 만들어진 기체.
“이제까지 사마제천이 임시로 앉아 있었지만, 주인이 왔으니 돌려줄 때가 되었죠.”
순간 둘의 시선이 맞닿았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속삭이듯 말하니.
“잘 부탁해요, 제1 원로.”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선언일 뿐이었다.
기갑천마
동상이몽 (1)
“제1 원로라…….”
단테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리라 생각하는 그녀의 손목을 틀어쥔 채로 답을 했으니.
“오만하구나.”
“……에?”
예상치 못한 단테의 대답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의 손목을 살짝 비틀 뿐이었다.
“읏?”
마치 목줄처럼 벤데타의 마스터키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비틀어지며 흑옥을 놓쳤다.
하지만 단테는 전혀 개의치 않고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결국, 네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아니더냐.”
“아.”
그제야 남궁연희는 단테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인지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이전의 생보다 더 길어지게 되어 버린 그녀와 달리, 단테의 삶에서 근간이 되는 것은 모두 중원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에게 무림맹의 맹주였던 그녀의 말은 어찌 보면 모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것이리라.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덧붙였다.
“제 밑으로 들어오라는 건 아니에요. 단지 당신에게 걸맞은 직위와 대우를 약속하겠다는 것뿐이라고요.”
진실이 그러했다.
애초에 그를 아래로 두려고 했다고 한들 마땅한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런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진 덕일까?
단테는 스스로가 내뱉은 말의 속뜻을 변호하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고, 그 찰나의 틈을 남궁연희는 놓치지 않고 말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주지 않겠어요. 하지만 대우는 원로에 준할 것을 약속하죠. 이건 양보할 수 없어요.”
그것은 단테가 무어라고 말하든 그저 그렇게 하겠다는 통보에 가까웠으나 그 이면에는 단테에 대한 호의만이 가득했다.
때문에 단테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잡은 손목을 놓고 화제를 돌렸다.
“다른 건 다 제쳐 두더라도, 네가 말한 대책 중 중추를 이루는 블랙 가드는 꽤 혼란스럽던데.”
결론적으로 그러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걸어온 길이 대책이었다고 한들, 그 중추는 결국 블랙 가드라는 조직이지 않은가.
현재의 블랙 가드는 각기 다른 미래를 그리는 2개의 분파로 나뉘어 치열하게도 맞서고 있다.
즉, 그녀가 말한 대책에 이미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단테는 말했다.
“놈들은 어쩔 생각이지?”
많은 부분을 제쳐 둔다고 해도 그것만큼은 시급한 처리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머지않아 대군주가 몸을 일으킬 터인데, 후방에 불안 요소를 두고 싸우는 것은 그 자체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때.
“훗.”
남궁연희는 일말의 당혹감도 전무한 얼굴로 단테를 응시했고, 머잖아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에게 답하니.
“아까 사마제천이 사소한 문제를 감시하러 갔다고 말했죠?”
말을 내뱉는 목소리는 되레 평온하다.
순간 그녀의 품에서 옅은 빛무리가 반짝거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옷 안에 손을 넣어 빛이 번뜩이는 통신기를 꺼내 딸깍거리는 버튼을 눌렀다.
〔아, 아아.〕
찰나의 지직거림이 스치고 머지않아 통신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리니.
그것을 들은 단테는 무언가 또 다른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이 움직였습니다.〕
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마제천의 목소리는 한창 무언가를 꾸밀 때의 바로 그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