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55화 (155/197)

“남궁제일미라 불리던 분이 이젠 푸른 늑대라고 불린다니, 꽤 재미있는 칭호군요.”

그 칭호를 듣는 순간 남궁연희는 미간을 좁힌 후 손질을 끝낸 검을 그에게 겨누려고 했으나 그때 남자가 말했다.

“벨 때 베더라도 일단 자리를 좀 옮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겸사겸사 이야기라도 좀 들어 보시고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의 말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언급한 것들.

무언가 있다는 듯한 그런 분위기 자체는 배제하더라도 그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읊조린 ‘남궁제일미(南宮第一美)’라는 중원의 언어는 많은 의미를 내포했으니까 말이다.

“……좋아. 자리를 옮기지.”

스릉, 탁!

그녀는 손질을 끝낸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는 그렇게 답했다.

물론 방심을 푼 것은 아니었으니.

‘여차해서 죽여야 한다면, 목격자가 없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그것은 짐짓 현실적이고도 섬뜩한 이유였다.

그렇게 둘은 근처 진영에 군집한 이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자리를 숲 안쪽으로 옮겼다.

어느 정도까지 들어간 둘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공터를 발견하자 그곳에 멈춰 섰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그전에.”

남자는 그녀의 말을 끊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조약돌 몇 개를 쥐더니 곧 공터 곳곳에 내력을 담아 던지기 시작했다.

파악!

당연히 돌들은 그가 원한 곳으로 정확하게 안착했다.

남자는 점차 혼란스러움과 복잡함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남궁연희의 눈동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묵묵히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마지막 돌을 던졌을 때.

“아, 됐네요.”

“……진법?”

단지 풀 내음과 스치는 바람만이 존재하던 공터는, 마지막 돌이 박힌 직후 빠르게 안개로 물들었다.

그것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본 남궁연희는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읊조렸다.

그러자 남자는 되레 왜 놀라느냐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말했다.

“뭘 놀라십니까? 이미 대충 제 출신은 눈치채셨으면서 말입니다. 하핫!”

이번만큼은 남궁연희도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물론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게 되자 그녀 역시 쉽사리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

몇 번이나 입술을 오물거렸을까.

‘진법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문은 두 곳.’

하나는 제갈(諸葛)의 이름을 쓰는 곳.

또 하나는 사마(司馬)의 이름을 쓰는 곳.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녀가 정파의 두뇌라 불리는 제갈세가의 진법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으니 남은 곳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사마제천……?”

그녀가 이름이라도 들어 본 사마세가의 일원은 그밖에 없었기에, 반쯤은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내뱉은 읊조림이었다.

남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특유의 유하고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한 채, 어느 샌가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좀 대화를 할 생각이 드십니까?”

이번에도 즉답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차라리 천휘, 그 남자라면 모르겠지만…….’

직접 손 속을 섞으며 같은 전장에서 싸웠던 천휘와는 달리, 사마제천에 대해선 그녀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천휘가 자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목숨을 잃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이라곤 정파의 어르신들께서 늘 현 제갈세가 후계자의 기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인물이 바로 사마제천이라고 말했던 것이 전부였기에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한다.

‘……유일하게 남궁의 이름을, 지난 세계를 기억하고 있는 인물.’

비록 서 있던 세력이 달랐다고 한들, 실상 마주하는 것은 과거의 이름과 얼굴이 아닌 새로운 이름과 얼굴이라고 한들…….

같은 세계와 시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이제껏 모든 것에 정을 붙이지 않고 오직 마수들을 도륙하기 위해 앞으로 걷던 그녀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어느새 검의 손잡이를 쥔 손의 힘을 살짝 풀었고, 여전히 적대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는 듯 선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죠.”

말투는 경어로 바뀌고, 경계는 조금이나마 틈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번 들어 보겠다는 의식의 발로였을 뿐, 여차하면 단번에 그를 베고 말겠다는 생각은 여전한 것이었다.

“6년 7개월.”

피차 그것을 알았기에 사마제천은 구태여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최대한 담백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제가 계산한 이 세계의 멸망까지 남은 시간입니다.”

“뭐라고요?”

그리고 그것은 남궁연희에게도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한마디였다.

물론 사마제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믿어도 좋습니다. 침공을 채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해 버렸지만, 그래도 나름 작은 왕국의 왕자로 있던 덕에 정보 자산을 총동원해서 이 세계의 여력을 꽤 정확히 계산했으니까요.”

물론 마수들에게 고작 반년 만에 무너질 왕국이었던 만큼 정보 자산은 한없이 빈약했기에 국고를 횡령해서 사조직을 구축했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다만 왕국 예산을 때려 박아 만든 정보 자산을 기반으로 도출한 결과를 최대한 담백하고 덤덤하게 그녀에게 나열할 뿐이었다.

“동원 가능한 인구, 각 국가의 연 소출량과 영지들의 비축 식량, 대륙의 지형과 각 국가의 실질적인 군사 동원 능력은 물론, 마수들의 침공 수위가 우리 때에 비해서 어느 정도까지 달라졌는지를 모두 변수로 고려했습니다.”

그렇게 도출된 결과가 바로 ‘6년 7개월’이라는 시간이었으니, 그의 말을 들은 남궁 연희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으려 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속단하느냐고.

또한 그것이 신뢰도가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

사마제천은 말했다.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직접 전장에서 뛰셨으니 느끼셨을 거 아닙니까?”

사마제천의 눈에 순간 살기가 감돌았다.

“놈들이 더 강해졌다는 걸 말입니다. 역겹게도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본 그녀는 적어도 지금 그가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곧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그의 말에 화답했으니.

“그래요. 그게 사실이라고 쳐도…… 뭐가 달라지죠?”

스릉.

“우리의 세계는 고작 5년 만에 놈들에게 빼앗겼죠. 6년 7개월이라…….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녀의 검집 안에 잠들어 있던 푸른 검신이 뽑혔고, 그녀는 검의 칼날을 그에게 겨누며 말했다.

“내 목적은 하나예요. 보다 많은 마수를 죽이는 것, 그로써 놈들에게 죽어간 무수한 이들의 넋을 달래는 것.”

달리 무슨 목적이 있을까.

이미 모든 걸 잃은 그녀에게 복수심이란 허탈하게 비어 버린 내면을 채울 유일한 연료였던 것이다.

“다행이군요.”

그러나 그때.

사마제천은 그녀의 칼끝이 자신에게 겨눠져 있음에도 오히려 안심이라는 듯이 웃더니 곧 그녀에게 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제 목적도 당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라고 해야겠지요.”

“우리?”

“예, 우리.”

순간,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갈 곳 잃은 기대가 그녀의 동공에 어지럽게 뒤흔들리자, 사마제천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뭐죠?”

“저희 말고도 고향을 잃은 이들이 꽤 많다면, 그리고 그들을 모아 조직을 만든다고 한다면…….”

목적은 간단하고, 행동 역시 일관된 조직.

마수를 죽인다.

마수를 찢는다.

마수를 구축(驅逐)하고.

마수를 도륙한다.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어느새 검 끝을 내린 채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덧붙였으니.

“남궁연희, 그 조직을 이끌 생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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