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어둡다.
눈을 떴을 때, 단테가 처음으로 느낀 감흥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당혹감은 그를 길게 잡아먹을 수 없었고, 단테는 마치 익숙한 공간에 온 듯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보이진 않는군.’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단테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어느새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 아니 벤데타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물었다.
‘또 무엇이냐.’
일전에 벤데타는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런 화두에 단테는 그저 이렇게 답했을 따름이다.
‘지향점은 모른다. 다만, 버러지를 죽일 뿐이리라.’라고 말이다.
단테는 무심한, 어쩌면 분노와 성가심이 담긴 시선으로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또 화두를 던지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기꺼이 부질없는 짓이리라 말할 수 있었다.
시급한 것은 여왕을 죽이는 것일 터.
때문에 그는 이전보다 훨씬 운신이 자유로워진 몸으로 그림자를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림자는 단테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단지 손가락을 들어 단테의 등 뒤를 가리킬 뿐인 것이다.
‘무슨…….’
단테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의 손가락을 향해 옮긴 시선의 끝자락에 존재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여왕이었다.
-길들이지 못한 군마만큼 해가 되는 것은 없거늘.
스스로 자비의 여왕이라 칭한 버러지.
놈은 영문을 모를 읊조림을 내뱉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단테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여왕 그 자체가 아닌 놈의 뒤에 드리워진 검디검은 무언가였다.
‘……저건?’
단테의 눈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크게 떠졌고, 곧 핏발이 선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군주…… 아니, 거귀(巨鬼)!’
여왕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는 검은 장막은 다름이 아닌, 모든 일의 원흉인 놈이었으니까 말이다.
놈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검은 장막은 여전히 세상을 뒤덮을 듯이 불길했고, 비대하리만큼 거대한 육신은 역겹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허억-!”
감았던 눈을 뜬 단테는 곧 밀려오는 현실감에 고개를 좌우로 돌렸고, 머지않아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니.
‘상처가……?’
꿰뚫렸던 어깨는 완벽하진 않으나 7할 이상 치유되어 있었으나, 벤데타는 금방이라도 역소환이 될 듯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단테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경위가 어떻든, 벤데타는 그를 보호하고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를 폭주시켰다는 걸 말이다.
“허!”
단테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기체가 자신의 목숨을 한번 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 무슨?
그때였다.
그는 당혹감에 물든 여왕의 목소리를 들었고, 시선을 옮김과 동시에 해야 할 일을 깨닫곤 벤데타를 유지 중이던 내력을 거뒀다.
파아앗!
섬광이 번뜩인다.
온몸에 두른 검은 장갑들이 꿰뚫리고, 온갖 케이블과 관절이 망가졌으며, 손바닥부터 어깨까지 꿰뚫렸을 정도로 엉망이 된 벤데타는 다시금 단테의 목에 걸려 있는 흑옥(黑玉) 안으로 회수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단테는 뒤늦게 몸을 빼기 위해 뒤로 날아오르는 여왕을 향해 읊조리니.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남아 있던 내력은 곧바로 대지를 따라 내달리며 그의 의지를 대변했고, 곧 수천의 뿌리를 머금은 대지가 일순간 진동한다.
말미암아 흙과 돌덩이가 허공으로 치솟아 비가 되어 흩날리니.
-크읏!
자비의 여왕은 자신에게 밀려오는 흙과 날카로운 내력을 방어하고자 남아 있던 촉수를 긁어모았다.
그러나 그 순간.
여왕은 보고야 만 것이다.
씨익, 하고 올라간 단테의 입꼬리와, 자신을 스쳐 지나가 바로 뒤에 생겨난 거대한 벽을 말이다.
-아.
찰나의 탄식이 입술을 스친다.
그리고 곧바로 검은 군복을 휘날리며 자신을 향해 도약해 오는 단테를 응시하며 여왕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패배했는가.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닫힌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여왕의 촉수는 녹아내리더니, 이윽고 두 개의 그림자가 자욱한 연기 너머로 추락했다.
휘이이잉-.
머지않아 흐르듯 스친 바람이 연기를 걷어 냈다.
“쿨럭.”
단테의 입가에 기침이 스친다.
핏물이 튀었고, 넝마나 다름이 없는 군복이 흔들렸다.
외양만 본다면 그의 패배다.
그러나 그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단테의 손에는 여왕이 뒤따랐다.
-커억…….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단테의 손아귀 안에 자리한 여왕의 가녀린 목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이, 이런 미친……!”
“……맙소사!”
그 모습을 본 군인들은 전율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숨을 내뱉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그때.
스윽.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여왕의 희고 가녀린 팔이 단테의 목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단테는 미간을 좁혔으나, 여왕은 전혀 개의치 않고 특유의 기이한 음성으로 그에게 속삭이듯 말하니.
-이 비통한 세계에 태어난 것은 그대의 잘못도, 우리의 잘못도 아닐지니.
여왕의 턱을 따라 투명한 핏물이 흐른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띤 채 덧붙였다.
-나의 조물주에게 맞서 보거라, 그것이 네게 자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실로 의미심장한 속삭임이다.
때문에, 단테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여왕과 시선을 맞춘 채로 무심히 화답하니.
“말이 많구나.”
뚜둑.
틀어쥔 목을 비틀었다.
언뜻 가녀린 육신을 그 즉시 한 줌의 액체로 변하여 모래사장으로 흘러내렸고, 단테는 뒤늦게 밀려온 고통에 살짝 미간을 좁히면서도 그 모습을 묵묵히 응시했다.
“…….”
동시에 검게 물든 하늘은 서서히 남색으로 변하며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지상에 자리한 모두에게 알렸으니.
적막함이 전장에 자리했다.
군인들도.
마수들도.
눈앞에서 펼쳐진 하나의 결말 속에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할 순 없었다.
〔뭣들 하나-!〕
이윽고 몽펠리에 드 피코크의 외침이 통신기를 타고 모든 군인에게 울려 퍼졌다.
〔모조리 쓸어버리지 않고!〕
그 직후.
이어진 것은 단지 학살에 가까운 전투일 따름이었다.
기갑천마
이 전장에 선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죽어어어!”
“제국을 위하여!”
여왕과 네임드, 최상급 마수를 모두 잃은 마수들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밀려오는 군인들에게 도륙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공권이 확보되는 순간 비행함의 승무원들은 지금껏 아껴 둔 마석을 모두 포대에 쑤셔 넣어 놈들을 도륙했다.
한번 잃은 기세는 마수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뒈져 버려!〕
〔마석 가져와! 기동할 수 있는 마석만 남기고 모조리 가져오란 말이다!〕
흩뿌려진 포성은 죽음이 되어 마수들의 육신을 찢고 불태웠다.
이미 승기가 잡혔기에 마수들에게 선택지는 죽는 것과 도망치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몽펠리에 드 피코크 중장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놈들의 선택지를 전자로 강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으로 드리웠던 하늘은 서서히 밝아 오며 전장의 참상을 모두의 두 눈에 비추어 주었다.
마력포의 포성(砲聲)도.
나이트 프레임의 기계음도.
마수들의 굉음도.
죽은 이들의 신음까지도.
모든 게 서서히 멎었다.
그제야 군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수많은 군인과 마수의 핏물이 모래사장에 깃든 후였다.
“하아, 하아.”
“……아.”
거친 숨소리와 나지막한 탄식이 뒤섞인다.
군인들의 시선 그 어느 곳에도 거대한 마수들이 살아 숨 쉬는 역겨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곧 군인들은 손에 쥔 총을 놓았다.
털그럭.
털썩.
몇몇은 바닥에 부질없이 주저앉았다.
또 몇몇은 뒤늦게 밀려오는 고통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끝났다.”
너무나도 낮은, 그러나 비로소 내뱉어진 한마디에 모든 군인은 진영과 성별, 계급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서로를 껴안으며 외쳤다.
“끝이다아아-!”
“와아아아아아! 이겼다아아!”
“살았어! 살았다고오!”
작은 환희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때마침 찬란하게도 해변을 비추는 태양 아래에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보다 강렬하게 군인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수많은 삶이 사그라드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니 말이다.
설혹 얼마 뒤 꺼질 생의 불씨라고 한들, 당장의 생존은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
그런 물결 속에서 단테는 앞으로 걸었다.
적잖은 무리한 탓에 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는 묵묵히 군인들 사이를 지났다.
“단테 대령 만세!”
“특임대 만세! 제국 만세에-!”
당연하게도 군인들의 환호성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머잖아 기체에서 내린 로한과 리베라, 보리스와 클리에 등이 뒤따랐다.
그들 역시 깨닫고 있었다.
오늘, 후대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서사시가 써졌다는 걸 말이다.
그때였다.
“아, 단테 대령.”
전선을 지나 후방에 다다른 단테의 앞에는 세실을 비롯한 로열 가드들의 부축을 받은 채 서 있는 세로스가 서 있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거참, 이럴 줄 알았으면 로열 가드로 좀 더 꼬셔 볼 걸 그랬어. 그러니까 마리, 내가 쟤 물건이라고 했잖아?”
“그, 그렇지만 그때는……!”
“됐어. 변명은 안 받아.”
“세, 세로스!”
혹자들이 보기엔 너무나도 보기 좋은 연인의 대화일 뿐이었으나, 정작 둘이 나누는 대화의 주체가 된 단테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를 가늠한 듯이 세로스의 심장 쪽을 무심하게 응시할 뿐.
“……하핫.”
그 모습을 세로스가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 단테의 시선에 세로스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 올리곤 뺨을 긁었다.
“하긴, 네 녀석은 눈치챌 거 같긴 했지.”
애초에 그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남들은 몰라도 단테 대령은 왜인지 눈치를 챌 것도 같았다고 말이다.
왜인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쯧.”
단테는 혀를 찼다.
그것은 언뜻 질책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이면에는 묘한 안타까움이 섞여 있음을 세로스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덕분일까.
세로스는 왜인지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고, 머지않아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뭐, 어쩌겠어. 솔직히 후회가 없지는 않은데…… 이런 운명이려니 해야겠지.”
“세로스, 지금 무슨 말을?”
마리를 비롯해 세실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들 역시 두 남자의 대화가 어딘가 미묘한 감정을 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눈동자를 굴렸다.
“오빠, 아니 단장님……?”
오랫동안 전장에서 구른 감일까.
아니면, 혈육으로 이어진 탓일까.
세실은 순간 불길함을 느끼고 세로스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평소처럼 언뜻 능글맞은, 혹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때.
“아.”
세실은 무심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오빠인 세로스의 얼굴에 스친 것은 여유도, 장난스러운 미소도 아닌 씁쓸함이 짙은 망자의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세, 세로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마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리가 없었기에, 그녀는 이젠 감출 수도 없이 흐르는 식은땀을 확인하곤 눈을 떨었다.
“솔직히 모르겠다, 뭐가 뭔지. 그래도…….”
그러나 정작 세로스는 마리에게 잠시 눈으로 양해를 구하곤 단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으니.
“부탁한다, 단테.”
그것은 꽤나 허심탄회한 읊조림이었다.
이번에도 단테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무언의 화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쿨럭!”
조금은 불쾌할 수도 있었음에도 세로스는 구태여 불쾌함을 표현하지 않았고,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웃음을 흘린 채 핏물이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후읍.”
애써 숨을 깊게 마신다.
동시에 그의 곁에 서 있던 이들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으니, 세로스의 목숨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세로스 그 자신이 그 사실을 깊게 자각하고 있음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리라.
“아, 아아…….”
마리는 무어라 말조차 내뱉지 못했다.
단지, 이제껏 버틴 게 기적이라는 듯이 급격히 창백해지는 세로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무너지는 그의 육신을 힘겹게 지탱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마리.”
세로스는 고통으로 살짝 미간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러나 애써 그것을 펴려는 듯 안면 근육이 경련하는 모양새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핏물을 흰 셔츠 소매로 닦아 내며 말하니.
“……미안해. 그렇다고 빨리 오진 말고.”
“그, 그런 말 하지 마. 어? 세로스!”
“……사랑한다, 마리.”
담백하고도 진심이 담긴 읊조림에 마리는 무너지듯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힘겹게 서 있던 세로스의 육신 역시 막사 앞 공터로 힘없이 추락했다.
“오빠!”
“단장님!”
세실 역시 세로스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유엘과 페고르는 곧바로 조금 전 세로스를 진찰했던 군의관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달려왔다.
“쿨럭, 세실.”
세로스는 점차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어렸을 적 넘어졌던 그때처럼 엉망이 된 얼굴로 울고 있는 자신의 여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로 허겁지겁 일어나 군의관의 멱살을 잡다시피 끌어 자신에게로 데려오는 마리, 뒤늦게 소식을 듣고 부상자임에도 뛰어오는 로열 가드의 단원들을 보았다.
“큭, 크큭.”
가지런한 이빨에 핏물이 스몄지만, 그의 웃음은 늘 그러했듯이 시원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세실의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속삭이니.
“……아버지랑 어머니께 죄송하다고 전해 드려라. 쿨럭! 거참, 자식을 먼저 잃은 부모만큼 슬픈 게 없다던데. 쿨럭!”
“자, 잠깐만. 오빠. 군의관이 왔으니까.”
“빨리, 빨리 좀 봐주세요. 제발, 제발요!”
세실은 군의관이 왔다는 말에 기다시피 옆으로 비켰고, 유엘과 페고르가 데려온 군의관의 멱살을 끈 마리는 밀치다시피 그를 세로스의 앞으로 세우곤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빌다시피 외쳤다.
“……거, 미안하네. 쿨럭!”
세로스와 군의관인 대위의 시선이 맞닿는다.
하지만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피차 알기에 군의관은 눈을 질끈 감고 그들에겐 한없이 잔인한 진실을 읊조려야 할 뿐이었다.
“……세로스 단장님께선 이미 마나 하트가 파괴된 것과 동시에 시한부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시, 시한부…….”
“그런…….”
그 말에 유엘과 페고르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고, 세실은 자신의 오빠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깨닫고 원망에 찬 눈으로 응시했다.
또한 마리는 무어라 할 말도 찾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쓴웃음을 짓는 세로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패닉에 빠진 모두와 달리 묵묵히 그를 지켜보던 단테의 눈에는 보였다.
끝까지 기적처럼 붙어 있던 그의 숨결이 점점 옅어지는 걸 말이다.
까닥.
세로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노곤한 듯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당장에라도 눈을 뜨리라 생각되는 모습이었으나 모두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앞으로 눈을 뜨지 못하리라고.
그것을 확인한 마리는 그 자리에서 굳었고, 세실은 잠시 눈물을 흘리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말했어야지!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지!”
“말려! 말리라고!”
군의관은 멱살을 잡히면서도 반항하지 않았다.
유엘과 페고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단지 세실의 곁에서 그녀를 부축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에브게니아.”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단테의 입이 열리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슬픔에 몸서리치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깊게 잠긴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은 땀과 피로 절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스치며 흔들었으니, 그는 언젠가 스치듯 들었던 이름을 꺼냈다.
“에브게니아로 가겠군.”
에브게니아.
룬어를 해석하자면 「고귀」.
“에브게니아…….”
가장 영광된 묘지이므로, 가장 영광된 군인들의 시신만이 묻힐 수 있는 그곳.
단테는 그렇게 말하곤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가 로한 등을 데리고 자리를 비워 주자, 세실은 로열 가드의 단원들의 손에 의해 곱게 관 안에 눕혀진 자신의 오빠를 잠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속삭이듯 말하니.
“……고생했어, 오빠.”
그녀의 속삭임을 끝으로 남은 것은 눈물 속에서 그를 끌어안은 마리와, 뒤늦게 사실을 전해 듣고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며 애써 슬픔을 삭히는 시리아 제4 황녀의 비통함뿐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났다고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기에 시리아 황녀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간 단테를 대신하여 또다시 통신기를 쥐었다.
〔아.〕
눈물을 참아 갈라진 목소리가 마나를 머금고 한창 전후 처리에 힘쓰고 있는 해안가를 스쳤다.
모두의 시선이 황녀에게 향한다.
〔……우리는 승리했으나 많은 걸 잃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마디만을 하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으니.
〔이 전장에 선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그건, 실로 담백한 한마디였다.
기갑천마
에브게니아
망르 공방전은 그 자체로 대륙에 수많은 후폭풍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난 50년간 인류가 싸워 왔던 마수와 다른, 스스로 자비의 여왕이라 밝힌 존재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본디 연합 왕국에서 악명을 떨치던 세이렌과 크라켄이 죽었다.
그뿐인가.
법국은 기용한 병력의 7할을 잃었다.
수뇌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로 사실상 녹아내렸고, 그들이 자랑하는 천사를 본뜬 나이트 프레임 유게네스 역시 살아남은 수를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물론 연합 왕국과 제국 역시 적잖은 피해를 입은 건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망르 공방전」
그 한 가지 단어로 명시될 그 전투에서 죽어 간 이들의 목숨은 족히 수만에 달했고, 그들 중 절반은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한 손에 들어오는 유서, 군번줄과 함께 작은 목함에 담겨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세로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최상급 마수와 대적하고, 여왕의 공격을 받아 냈음에도 마지막 인사 정도는 남길 수 있었으니까.
적어도 남은 이들은 그런 읊조림을 입안에서 굴리며 슬픔을 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군, 경례!”
망르 해안가에서 죽은 제국군의 시체들은 파견된 부대와 주둔군의 손으로 최대한 수습되어 곧바로 에브게니아로 향했다.
에브게니아.
한때는 제국 제2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했던 도시였으나, 기나긴 전투로 무너져 이젠 도시가 통째로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그곳의 군인들에겐 영광임과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많은 유족이 그곳을 찾는다.
묻혀 있는 시신의 수만 해도 족히 수십만에 달하고, 시신을 찾지 못해 이름만 새겨진 이들까지 합한다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망르 공방전에서 사망한 이들이 묻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로스 드 아크레데는 로열 가드의 제4 단장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였으며…….”
추도사가 이어진다.
“……후.”
“흑, 흐으윽.”
검은 정장을 입은 세르겐은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자신의 아들이 묻힌 묘비를 응시했다.
그 곁에 세로스와 세실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세실에게 기대어 애써 슬픔을 삭였다.
“…….”
반면 마리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세로스의 무덤을 응시할 뿐이었다.
세로스와 마리.
둘이 가벼운 관계가 아니라는 건 꽤 유명했던 사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여한 인원들 대다수는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각.
단테는 한 발자국 뒤에 떨어져 묵묵히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로한과 리베라조차 멀리 물린 채 홀로 서 있는 그의 뒤로 걸어온 제4 황녀인 시리아 폰 레벤스라트는 묵묵히 푸른 숨결을 물고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담배를 태우셨던가요?”
“담배는 아닙니다.”
“그럼……?”
“푸른 숨결이라고 불리더군요.”
“아.”
그제야 시리아는 그의 입가 근처에서 흐르는 연기가 푸른빛을 띤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의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그러나 머잖아 그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시리아였다.
“로열 가드 제4 단장의 직책은 세실이 물려받기로 했어요. 원칙적으론 부단장이 이어받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번 전투로 부단장 역시 큰 상처를 입어 은퇴하기로 했거든요.”
다행히 목숨을 잃거나 신체 어느 부분이 손상되진 않았으나 그는 명예롭게 제대하기를 바랐다.
더불어 세실을 지목하며 말이다.
그 부분에서 시리아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세로스 단장의 부재 당시, 빠르게 수습한 점을 높이 샀다고 해요. 더욱이 특임대의 중령이니 절대로 부족한 자질이 아니기도 하고…….”
오히려 생각하기에 따라서 세실이 충분히 거부할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죽은 오빠의 자리를 대신 해야 한다는 것부터 생각하기에 따라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단테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세실에게서 전해 들은 소식이었기 때문도 있었고, 지금 달리 생각할 것도 넘쳐나기 때문도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시리아는 구태여 더 말을 잇지 않았고, 그저 잠시 그와 함께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과거 도시가 함락될 당시에 무너진 성벽의 틈새로 바람이 스치고, 유일하게 에브게니아에 남아 있는 중앙의 종탑에서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애앵!
그리 크지도, 맑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에브게니아를 훑고 스치며 이 땅에 묻힌 모든 영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왜 에브게니아가 모든 호국 영령을 기리는 무덤이 된 줄 아시나요?”
시리아는 반쯤 태운 푸른 숨결을 털고 다시 입에 물은 단테에게 물었고, 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시리아는 말했다.
“과거, 막 1세대와 2세대 나이트 프레임이 양산될 무렵, 전선은 끊임없이 밀리기만을 반복했다고 해요. 아무리 선전하는 전선이 있다고 한들 그 당시 대륙인들과 마수들의 격차는 컸으니까요.”
시리아의 회색빛 눈동자가 빙그르 돌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젠 완전히 무너진 동쪽 성벽을 향했고, 그곳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특히 세계수가 죽은 이후엔 그렇게 암울한 나날이 없었다고 들었죠.”
그녀의 말대로 대륙은 멸망을 점쳤다.
사이비들은 미쳐 날뛰었고, 지금은 무너진 몇몇 왕가나 귀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끝까지 이기적으로 행동하다가 죽음으로써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건, 영지를 가진 대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디 상업 도시였던 에브게니아는 한 백작이 영주로 앉아 있었어요. 그는 부유한 도시를 기반으로 승작과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목적으로 삼던 부패한 귀족이었고요.”
그러나 부패 역시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 법.
“밀리고 밀리던 전선은 결국 에브게니아의 바로 코앞까지 와 버렸고, 그는 제국군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패퇴한 군을 수습하려면 최소 7일은 걸린다는 말을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죠. 그는 결국 애첩들과 가져갈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금을 들고 야반도주했어요. 나머지 재산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도록 비밀 금고에 모조리 쑤셔 넣고 말이에요.”
“…….”
단테는 어느새 시리아를 응시했고, 그런 시선을 느낀 시리아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에브게니아의 시민들은 절망했어요. 책에서 읽기론 한 상인은 ‘고귀라는 이름만큼 모순적인 도시명이 있을까?’라며 자조했다고 하니까요.”
마수들의 진군 소리가 지척에서 울리고, 시민 중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다짐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다.
제국군이 지원을 오기까진 7일이 걸린다고 말했으나, 당시 에브게니아에겐 고장이나 기능 불능으로 퇴역에 가까운 1세대 나이트 프레임 몇십 기가 전부였고, 주둔하는 군세는 다 긁어 봐야 2개 사단급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2개 사단이라면…….”
“대략 5천이 조금 넘는 군세가 전부였다는 뜻이죠. 반면에 진군하던 마수들의 중에는 최상급 마수까지 있었으니……. 절망하지 않는 게 미친 사람이었을 거예요.”
제2의 수도라고 불린다고 한들 결국 경제적 요충지였을 뿐이었고, 특히 기존 에브게니아를 통치했던 백작이 군사적인 측면을 아예 배제한 것도 큰 원인이었다.
“그렇습니까.”
단테는 시선을 돌려 에브게니아의 전경을 훑어보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무덤들을 위해 기존에 있던 건물들 대다수가 철거되긴 했으나, 일부 남아 있는 건축물들만 보아도 처절했던 과거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7시간이나 버텼으면 다행이겠군.’
네임드에 비해 약할 뿐이지, 최상급 마수는 과거 중원에서 이류나 삼류 무인 정도는 단번에 다진 육편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다.
때문에 단테는 확신했다.
그들이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으리라고 말이다.
그때였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답니다.”
단테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시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단테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시리아는 그저 웃으며 답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결국 싸우기로 했고 일주일을 버텼답니다. 비록 제국군이 지원하기 위해 다다랐을 땐 살아남은 사람이 전무했지만 말이에요.”
담백하게 읊조리듯 말했으나, 그녀의 말을 해석하자면 에브게니아의 모든 시민은 도망이나 자살 대신 전투를 택했고, 결국 도시를 지켜 낸 대가로 전멸했다는 뜻이다.
때문에 결과를 들은 단테는 그저 입에 문 푸른 숨결을 한 모금 머금다가 이윽고 답했다.
“비극적이군요.”
“희극적이죠. 사실 숨겨진 비화가 있거든요.”
“비화라면…….”
미소는 쓴웃음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중앙에 자리한 종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제국군 제5 군단이 3일 내로 지원을 할 수 있었다고 해요. 다만 그렇게 되면 주된 마수들의 진군로를 방어하는 전선이 무너지게 되니 당시 퇴각 중이던 제7 군단에 명령을 하달했죠.”
즉, 에브게니아는 본의 아니게 제국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이유는 많았다.
전선이 무너지는 순간 벌어질 파급력은 엄청났던 반면, 에브게니아는 전략적으로 그리 큰 요충지도 아니었라는 판단이었다.
더욱이 황제는 백작이 그토록 쉽게 시민들을 버리고 도주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버텼고, 그 대가로 에브게니아에 다다른 제7 군단은 장장 일주일에 걸친 항전으로 지친 마수들을 꽤 적은 피해로 패퇴시킬 수 있었어요.”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그들에게 부채감을 느낀 황제는 제도로 도주한 백작과 식솔을 모조리 잡아 최전선의 말단 병사로 보내 버렸고, 에브게니아 자체를 거대한 묘지로 선언하며 그들의 분투를 기렸다.
“뭐, 요점을 말하자면 간단하답니다.”
어느새 그들은 종탑의 앞에 다다라 있었고, 시리아는 거대한 철로 된 문 앞에서 살짝 몸을 돌려 단테를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알려진 이야기와 별개로 숨겨진 비화가 있고, 그 이면에 담긴 진실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울 수 있다……라고.”
시리아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미간을 좁힌 단테에게 그렇게 말하며 덧붙이곤 살며시 몸을 비켜섰다.
“그렇게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뜻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었기에 단테는 천천히 손을 뻗어 종탑의 문을 열었다.
끼기긱, 따위의 듣기 싫은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곧 옅은 먼지를 일으키며 서서히 열린 거대한 문틈 사이로 안과 밖이 뒤섞인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반쯤 열리고 내부가 눈에 들어온 그 순간.
“허!”
단테는 입에 문 푸른 숨결을 떨어트렸다.
투둑거리며 떨어진 푸른 숨결의 소음과 함께 단테의 목소리가 종탑의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울린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그때.
이미 종탑 내부에서 서 있던 한 여인이 그를 반기니.
“오랜만…… 크흠, 오랜만이네요.”
벌어진 붉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건 다소 어색한 첫인사일 따름이었다.
“천휘…… 아니, 단테.”
기갑천마
이 세계의 비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응시한다.
그녀는 어색하게 건넨 인사말 이후로 말이 없었지만, 단테는 그녀가 누군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
침묵이 흐르는 종탑 안에는 묘한 기류만이 흘렀다.
둘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며 지나간 세월을 체감했다.
달라진 얼굴.
달라진 체구.
달라진 분위기.
달라진 지위까지.
그들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달라지고 마모된, 그러나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들을 눈길로 더듬어 찾았다.
잿빛 머리카락에 잿빛 눈을 가졌던 백월신교의 천마, 천휘는 흑발에 적안을 한 단테 대령이 되었다.
그렇다면 남궁연희는 어떤가.
남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그대로였으나 이목구비가 예전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뭐랄지, 조금은 성숙해진 느낌이라 말해야 할까?
다만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는 여전했기에 단테는 무심히 그녀를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내디딘 군화에 짓밟힌 푸른 숨결은 부질없이 바스러지고, 찰나의 동요를 수습한 단테는 종탑 안에 서 있는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채 1분도 되지 않아 그녀의 앞에 다다랐고, 그 순간 그를 올려 본 남궁연희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전하네요, 당신은.”
이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장난기가 살짝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 낯설다.
때문에 단테는 곧 알 수 있었다.
“환골탈태를 했나?”
환골탈태(換骨奪胎).
임독양맥과 생사현관을 타통하게 되면 이룰 수 있는 경지로,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육신으로 재구축되는데, 이 경지에 오르려면 엄청난 내공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사마제천에게 전해 들은 대로 그녀는 이 세계로 넘어온 시간이 단테보다 월등히 길었고, 또 원체 기재라고 불리던 그녀였으니까 말이다.
‘비록 개판이었던 세상이라고 한들 자존심이 높은 정파 놈들이 맹주로 앉힐 정도였으니.’
또 모르는 일이다.
만약 무림에 그런 변고가 일어나지 않고 시간이 흘렀더라면 미래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역시 알아보긴 하네요. 혹 당신이 아닐까 조금은 걱정했는데 말이에요.”
한편 남궁연희는 그런 말을 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도 잠시.
단테는 머리 하나는 아래에 서 있는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짓들을 벌였던데.”
그가 말하는 재미있는 짓들.
그 이면에 담긴 속뜻을 알아듣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기에 남궁연희는 어설픈 변명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숨길 이유가 없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단테, 아니 천휘라면 들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남궁연희는 괜스레 피식 웃으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글쎄요.”
“뭐?”
단테는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이제껏 쉬이 고개를 들지 않았던 자그마한 당혹감이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더 장난기가 샘솟은 것인지, 남궁연희는 그저 싱긋 웃으며 붉은 입술을 살짝 혀로 훑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하네요. 예전도 나쁘진 않지만, 이쪽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아주 능글맞아졌군. 남궁세가의 여식이. 거기에 반말까지.”
“뭐가 어때서? 이젠 당신의 전생과 현생을 합쳐도 나보다 나이가 어릴 텐데. 오히려 당신이 반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거기에 나는 블랙 가드의 당주인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단테는 잠깐이지만 말문이 막힌 채 서 있다가 머잖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0년이 길긴 길었다고 말이다.
때문에 그는 이 우습지도 않은 장난에 더 어울려 주지 않겠다는 듯이 물었다.
“됐으니 빨리 본론을 꺼내라. 괜히 말장난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훗, 여전하네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뭐, 그게 당신의 매력이었죠.”
조금은 긴장이 풀린 것인지, 남궁연희는 그렇게 스치듯 말하곤 단테가 궁금해하는 본론을 꺼내 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 단테가 물었다.
“그런데, 사마제천은 어디에 있지?”
“아.”
그의 거취는 충분히 단테가 궁금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의 물음에 답했다.
“조금 신경 쓰이는 움직임이 생겨서, 그 부분을 수습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답니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은 쓰지 않아도 돼요.”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답이었기에.
“그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제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제일 시급한 건 경고하기 위해서예요.”
“경고라면…….”
가늠이 가는 것이 없진 않았다.
아니, 그녀가 자신에게 경고라는 단어를 쓴다면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단테의 적안이 순간 번뜩였다.
그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대군주겠지.”
이번에 남궁연희는 답하지 않았다.
스윽.
단지 그녀의 손이 아무런 계급도 훈장도 없는 군복의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을 뿐이었으니,
곧 그녀는 작은 구체 하나를 꺼내 단테에게 건넸다.
그것을 건네받은 단테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이건?”
“이해를 도울 시청각 자료가 담긴 마도구랍니다. 아, 뭔지 알아들었으려나?”
시청각 자료니, 뭐니 하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이미 다른 세계의 문명을 수없이 접해 보았을 그녀의 말에 단테는 묵묵히 구체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 직후.
파앗, 하는 섬광이 번뜩이며 그들이 서 있는 종탑 내부가 밝게 물들었고, 머잖아 단테와 남궁연희는 거대한 환영이 떠도는 세상 위에 서 있었다.
우웅.
수많은 거울이 그들을 감싼다.
다만, 그것에 비치는 것은 단테와 남궁연희의 얼굴이 아닌 수없이 늘어진 혈겁이었다.
-끄아아아악!
-어, 어째서 총알이 박히질 않는 거야!
-틀렸어! 이미 우린 좆 됐다고!
녹색으로 물든 철모를 쓰고 검은색과 은색이 뒤섞인 총을 쥔 군인들은 무너진 마천루 사이에서 절망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지신 가오마엘이여, 당신의 자식들을 버리시나이까……!
-읍타룩! 아쿠아트!
진흙을 근육질 몸에 바르고, 손에 거대한 도끼를 든 전사들은 곁에 일렁거리는 갈색 정령들과 함께 분노와 원망이 담긴 읊조림을 내뱉었다.
“……이건.”
단테는 그들을 모두 눈에 담았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도, 오른쪽으로 돌려도, 위와 아래,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무수한 세계가 마수들에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벅.
한 거울 앞으로 걸어간 남궁연희는 슬픔과 애환, 어쩌면 분노와 혐오가 담긴 눈동자로 그곳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았나요? 우리의 세계가 무너졌을 땐 여왕이라는 존재는 없었는데 말이에요.”
그것은 확실히 단테에게 적잖은 의문을 가져다준 화두였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 연희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참극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여왕은 소화되지 못한 세계의 편린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사뭇 충격적인 비화였다.
“대군주와 마주한 당신과 나는 알죠. 놈은 일반적인 마수와 궤가 다른 존재라는 걸 말이에요.”
아직도 눈에 선하지 않은가.
까드득, 까드득, 따위의 소리를 내며 세상을 뒤덮을 듯이 허공을 날아오던 그 검은 그림자가 말이다.
“놈은 세계를 무너트리고 그 세계가 가진 모든 걸 게걸스럽게 포식해요. 그리고 놈이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포식하게 되면 스스로 여왕이라고 읊조리는 놈들을 잉태하죠.”
놈들은 스스로를 감정에 빗댄다.
지배의 여왕이 그러했고, 기만의 여왕이 그러했으며, 자비의 여왕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이유는 모른다.
다만 블랙 가드 내부에 있는 연구진이 추측하건대 감정이라는 매개체가 여왕이라는 존재를 빚어내기에 적합한 재료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여왕은…….”
“네.”
남궁연희는 피식 웃었다.
그것은 짐짓 자조적인 동시에 한없이 비극적인 속삭임이었다.
“굳이 이런 비유를 하긴 그렇지만, 이미 멸망한 세계의 잔존한 사념과도 같은 거겠죠.”
“…….”
단테는 무슨 말을 하려던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윽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잖아 그는 거울을 찬찬히 훑고 있는 남궁연희의 뒷모습을 향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 우리의 것도 있었나?”
“…….”
남궁연희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뻗어 꽤 멀리에 떨어진 거울을 가까이에 가져올 뿐이었으니.
그것에 담긴 상황은 간결했다.
-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거대한 죽립을 눌러쓴 망령이 인간과 도마뱀을 뒤섞은 듯한 이들을 도륙한다.
그것은 흡사 고매한 무림의 여고수를 보는 듯했으나, 순간 드러난 얼굴에는 봇물처럼 흐르는 눈물이 가득할 뿐이었으니.
-미, 미안하다. 미안하도다……!
애절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 죄책감과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으나…… 단테는 보았다.
놈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남궁연희는 말했다.
“위선의 여왕이에요. 다행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어요.”
“위선이라…….”
단테는 조금 전 보았던 여왕의 모습을 떠올리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직후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곤 물었다.
“다른 세계에서 죽었다는 말은 뭐지?”
“여왕은 마수들과 달리 세계선을 건너뛸 수 없는 모양이에요. 그 탓에 대군주는 세계를 옮겨 갈 때마다 새로운 잉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겠죠.”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여왕마저 함께 세계를 뛰어넘었다면 대군주를 막을 수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요. 대군주는 더 강해졌으니 자칫 이제까지의 상식대로 흘러가지 않고 다른 세계선에 있는 여왕들이 넘어올 수도 있겠죠.”
상식이나 여태까지의 일로 모든 걸 가늠하기엔 너무나도 혼란스럽고도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말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허.”
단테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너무 많은 정보가 머리에 담긴 탓인가, 아니면 그저 다가올 전투에 전율한 것인지 이유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지금 내뱉을 말을 어렵지 않게 고를 수 있었다.
“대책이 없다고 말하진 않겠지.”
“여기까지 말해 놓고 대책까지 없다고 하면, 당신은 지난 50년 동안 대체 뭘 했느냐며 쏘아붙인 후 홀로 대군주에게 달려가겠죠?”
지극히 극단적인 방향이었으나 단테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까.”
그런 그의 모습에 남궁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머리 하나 정도의 키 차이를 가진 덕에 그녀의 손은 조금 위로 기울며 단테의 목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 직후.
꽈악.
그녀의 손에는 금색 줄로 묶인 벤데타의 마스터키인 흑옥이 쥐어졌고, 그녀는 마치 목줄을 쥔 듯한 능글맞은 표정으로 단테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가며 속삭였으니.
“어째서 벤데타가 0세대 나이트 프레임이라 불린다고 생각해요?”
그건 사뭇 의미심장한 읊조림이었다.
기갑천마
그들의 발자취 (1)
“어째서 벤데타가 0세대 나이트 프레임이라 불린다고 생각해요?”
“뭐?”
그녀의 속삭임에 단테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그러자 남궁연희는 손에 쥔 흑옥을 얇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며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리곤 속삭이듯 답했다.
“간단하잖아요? 벤데타는 처음부터 천…… 아니, 단테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기체였다고요.”
단테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더 설명을 해보라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걸 말하기 전에.”
하지만 그것은 벤데타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읊조림이었다.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남궁연희는 이제 완전히 긴장이 풀린 듯이 단테에게 말했다.
여전히 단테의 목줄을 쥔 듯한 묘한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단테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마치 자신의 기다림에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히 들어 줘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
때문에 단테는 침묵함으로써 무언의 동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저는 가난한 화전민의 자식이었어요. 물론 저는 태어난 직후 고아가 되긴 했지만요.”
마수들의 침공이 있기 대략 10여 년 전.
제국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은 도적들에 의해 점령당했고, 반항하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 놈들은 어렸을 때부터 반반한 외모를 지닌 그녀를 죽이지 않고 키웠다.
아마, 키운 후에 노예로 팔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놈들의 실수였다.
“저는 중원의 기억을 잃지 않았기에 열 살이 되던 날, 이류 무인에 오르자마자 2백 명 남짓하던 도적들을 모두 죽였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지쳐서 죽을 뻔하긴 했지만…….”
고작 날붙이를 쥔 무뢰배나 다름이 없던 도적들은 검기를 일으키며 사람을 베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소녀를 막을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멈춘 것은 목적의 공허함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죠.”
중원은 어떻게 되었는가.
남궁세가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신이 필리아가 아닌, 남궁연희라는 존재로 인연을 맺어왔던 수많은 이들은 모두 죽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모든 것은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리고…… 천마, 천휘는 어떻게 되었는가.”
남궁세가의 딸도, 무림맹의 맹주도 아니라 그저 필리아가 된 그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수없이 고민하며 이미 10년 동안 도적의 소굴로 완전히 뒤바뀐 마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곳에 머물렀을까.
갓 떠올랐던 해는 저물었고, 자욱한 어둠이 하늘을 뒤덮은 직후 그녀의 기감에 무수한 이들의 발소리가 잡혔다.
“토벌대였어요. 지속된 추격으로 본거지를 파악한 인근 남작가의 기사와 병사 들이 놈들을 토벌하기 위해 야습한 거죠.”
하지만 당연하게도 습격은 의미가 없었다.
발각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베고 죽일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 이게 무슨?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야, 이게 무슨 일이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녀의 외모는 이런 숲속 화전민의 자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형 같았고,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당연하게도 병사와 기사들은 그녀가 2백에 달하는 도적들을 죽였으리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못한 채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남궁연희는 피식 웃었다.
그것은 자조적인 웃음이 아닌, 어딘가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기사와 병사 들은 어린 소녀를 의심하지 않았고, 말도 못 한 채 멍하니 서 있던 건 그저 충격을 받아서 그랬다고 생각했겠죠.”
그들의 모든 생각은 틀렸다.
그들을 죽인 원흉은 그녀였고,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말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었으며, 가만히 서 있던 것은 어디로 갈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이든, 그녀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손에 보호받으며 빠르게 남작가로 향했다.
기사와 병사 태반이 자식이 있는 부모였기 때문인지, 그들은 말도 하지 않고 경계심도 없이 자신들을 뒤따르는 소녀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행을 이끌던 중년의 기사는 남작 부부에게 그녀를 데리고 갔다.
-붉은 도끼 도적단의 소굴은 무슨 일인지 이미 소탕당해 있었고, 피와 시체가 즐비한 곳에 홀로 서 있던 아이입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충격으로 무슨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어린 나이인데…….
남작 부인은 도적 소굴에서 충격을 받아 마음을 닫아 버린 소녀를 지나칠 정도로 모질지 못했고, 때마침 딸이 가지고 싶었다던 남작 부인의 의견으로 남작은 그녀를 양녀로 맞이했다.
거기까지 들은 단테는 무심결 읊조렸다.
“운이 좋았군.”
“……운이 좋았죠. 실제로 좋은 분들이셨으니까요.”
제국은 한창 온갖 기술이 피어나는 과도기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외곽 변경에 자리한 남작가는 그런 변화의 물결과는 거리가 있었다.
남작 부부와 남작가의 후계자인 장남은 그녀를 미워하기는커녕 스스럼없이 가족으로 받아 주었고, 기사들과 병사들은 물론 가문의 사용인들 역시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날이 서 있던 그녀라도 마음을 놓지 않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으리라.
“저는 말을 배웠고, 이곳의 글을 배웠으며, 과거를 잊어가고 있었어요. 비록 처참히 죽어간 과거의 인연들이 매일 밤 꿈에 나오더라도 그저 잊고 살아갔죠.”
안온하다곤 할 순 없겠으나, 그녀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는 시간이었다.
무심결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서히 남궁이라는 가문을 잊고 연희라는 자신을 놓으면 필리아가 되어 새로운 삶을 이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우스운 착각이었죠.”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무심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무수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세상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면 일개 인간으로 태어나 바꿀 수 없었던 미래에 대한 아쉬움일까?
단테는 알 수 없었다.
“제가 열한 살쯤 기이한 소문이 상인과 용병, 피난민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시간에도 남궁 연희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재앙이 밀려오고 있다고 말이에요.”
남작은 단지 흔하디흔했던 잡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창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던 제국군의 제3 군단이 남작령을 지나가자 비로소 그들은 깨달았다.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필리아. 별일은 아닐 거다.
-맞아. 걱정하지 말자. 듣기론 제국 3군단이 최근에 증강된 군비를 바탕으로 강병이 되었다고 하던데. 설마 별일 있겠어?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 부부와 자신의 의붓오라버니는 항상 레벤스라트 제국에 대해 이 대륙의 패자라고 말했고, 그녀가 보기에도 제국의 제3 군단은 확실히 군율이 똑바로 선 강병이었으니까 말이다.
“안일했어요.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면, 놈들이 이 세계도 침공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 했는데.”
날이 서 있던 그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생각일지도 모른다.
짧지만 달콤했던 안락이 눈을 가린 것일까.
그게 아니라, 스스로 안주하고 싶었던 마음이 애써 마음속에서 외치던 불안감을 억지로 잠재운 것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예정된 절망은 너무나도 빠르게 그녀의 상처를 다시금 찢어 발겨놓았다.
“제국 제3 군단은 그야말로 궤멸당했고, 중상을 입고 남작가까지 도망친 군인들은 반쯤 미쳐서 중얼거렸죠. 이 세상은 망했다고. 저런 놈들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남작은 뒤늦게 일의 중대함을 느끼고 최대한의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군인들은 산맥에 필적하는 크기의 몬스터가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남작가보다 더 후방으로 도망치거나 심할 경우 자살까지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야 생각했다.
어쩌면 놈들이 이 땅에 다시금 발을 디뎠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 기이했습니다. 제일 작은 놈이 어지간한 마을의 목책보다 더 컸단 말입니다! 몬스터들까지도 죽이고 있어요. 저희 눈앞에서 오우거가 반으로 찢어발겨졌습니다!
-이, 이미 산맥에 필적하는 괴물들에게 왕국들이 멸망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제발, 제발 후방으로 보내 주십쇼! 가족, 가족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군인들의 증언을 들은 그녀는 확신했다.
중원을 집어삼킨 놈들이 이제는 이 땅에도 발을 디뎠다는 걸 말이다.
-……어찌 이런 일이.
남작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필리아는 다가가 말했다.
“도망치자고, 애초에 대적할 수가 없는 상대라고 말했죠. 하지만 아버…… 아니, 남작은 도망치지 않았어요. 단지 제국에게 추가적인 증원 병력을 요청하고 두려움에 떨던 군인들을 수습해서 의붓오라버비가 된 남작가의 후계자와 함께 전선으로 나갔죠.”
“…….”
“그리고…… 둘 다 작은 목함에 담길 정도의 살점과 유골로 돌아왔어요. 그마저도 귀족이었기에 겨우 수습할 수 있었던 거였죠.”
그다음은 남작 부인이었다.
본디 기사 출신이었던 그녀는 그들의 죽음과 함께 패퇴한 군인들을 독려하며 또다시 맞서 싸웠다.
그녀는 전투에 나서기 전에 남궁연희에게 말했다.
-필리아, 집사장과 함께 내 처가로 가려무나. 의붓딸이 똘똘하고 예쁘다고 부모님께 한껏 자랑했으니 내치진 않을 거란다.
말리려고 했지만, 남궁연희는 말리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같이 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네.
남궁연희는 보고 만 것이다.
-사랑한단다, 필리아.
이미 죽음을 각오한, 무인의 눈을 말이다.
-……가시죠, 아가씨.
집사장은 묵묵히 그녀를 끌고 마차에 올랐고, 그녀가 남작 부인의 처가에 다다랐을 즈음 부인의 부고가 들려왔다.
“그래도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활약으로 한동안은 전선은 불리하게나마 유지가 되었고, 저는 남작 부인의 처가에서 없는 사람처럼 지내며 묵묵히 무공을 연마했어요.”
열한 살의 소녀는 열여섯 살이 되었다.
노쇠한 집사장은 끝까지 그녀를 돌보다가 노환으로 죽었고, 서서히 균열을 보이던 전선은 다시금 깨져 처가를 덮쳤다.
-크아아아아!
마수들의 괴성이 울린다.
당연히 처가였던 백작가의 사람들은 죽음을 확신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아, 아아.
-신이시여…….
그러나 그때.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게걸스럽게도 이빨을 들이밀던 마수의 몸이 반으로 갈리자, 모두의 시선은 온전히 그녀에게 향했다.
핏물이 저택의 분수를 덮쳤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유일하게 돌봐 준 집사장의 무덤에 인사를 건네고 백작가를 떠나 전선으로 향했다.
-캬아아아아아악!
-키에에에에!
고함을 지르던 마수들은 남궁가의 묵직한 검격에 도륙당했고, 그녀는 전선을 종횡하는 무인으로서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그때…….”
-남궁제일미라 불리던 분이 이젠 푸른 늑대라고 불린다니, 꽤 재미있는 칭호군요.
“사마제천이 찾아왔죠.”
기갑천마
그들의 발자취 (2)
“…….”
남궁연희.
아니, 이제는 필리아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나선 그녀는 그날도 전투가 끝난 후 홀로 진영과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모닥불 앞에 걸터앉아 묵묵히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스릉.
스르릉.
핏물이 들러붙은 검날을, 기름을 살짝 묻힌 천으로 닦아 내자 묻어 나온 핏물이 천에 스며들며 곧 핏물이 감춰져 있던 푸르른 검의 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풍기는 날카로운 분위기에 주변의 기사들은 무심결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괜히 푸른 늑대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남색으로 물든 머리와 눈, 그리고 척 보기에도 아름다운 외모는 뭇 사내들의 마음을 동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나 그들은 감히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녀가 저 검으로 벤 마수들의 수만 해도 족히 수백은 넘으니까 말이다.
그뿐인가.
그녀의 외모만 바라보고 치근덕거리던 기사나 귀족들 몇몇이 전장에서 의문사했다는 소문마저 들리는 상황이다.
물론 그녀가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리라.
결국 그녀가 서 있는 최전선에선 암묵적인 규칙처럼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묘한 분위기 속.
“흐음, 확실하네.”
어딘가 한량 같은 외모를 한, 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는 그런 분위기를 읽은 듯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뒤로는 검은 후드를 입은 호위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누가 만류하기도 전에 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
“자, 잠깐……!”
당연히 다른 이들이 뒤늦게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만류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호위들의 기세에 눌려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송장 하나 치우겠군. 쯧.”
“척 보면 모르겠어? 좀 사는 집 도련님 같은데 하여튼 이래서…….”
한량처럼 생긴 외모와 즐비한 호위까지.
전장에서 싸우는 이들에겐 곱게 보일 수가 없었기에, 내심 필리아에게 호의와 동경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그녀가 저 무도한 놈을 단번에 혼쭐내 주기를 기대하며 은근히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곧 놀랄 수밖에 없었으니.
“…….”
“…….”
잘 들리진 않았으나, 남자가 다가가 몇 마디를 하자 곧 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숲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뇌리에는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고개를 들었으나, 감히 누구도 그들의 뒤를 쫓을 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
남자의 뒤를 따르던, 검은 후드를 쓴 채 제각기 무기를 쥔 일련의 사내들이 조금 전 필리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 걸터앉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